1948년 제헌 이후 70여년간 9번의 개헌
3·4·9차 제외하곤 권력유지 위한 목적
위로부터의 개헌, 구조적 한계 지녀
한계 극복 위해 국민참여 개헌 돼야

지난 1972년 유신헌법 공포식 모습 ⓒ뉴시스
지난 1972년 유신헌법 공포식 모습 ⓒ뉴시스

 

정권이 레임덕에 빠질 때마다 흘러나왔던 개헌 논의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과 이어진 장미대선과 맞물려 본격화됐다.

그러나 지난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최고점에 달했던 개헌 논의는 결국 ‘추후’로 넘어갔다. 대통령 개헌안은 국회에서 처리조차 무산됐고, 1년 넘게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해 개헌 논의를 이어온 정치권은 합의된 개헌안을 내놓지 못했다. 이로 인해 ‘위로부터의 개헌’에 대한 비판은 점차 거세졌다.

앞서 지금까지 대한민국 헌정사에는 총 9번의 개헌이 있었다. ‘위로부터의 개헌’의 전형을 보이는 이들 개헌은 대부분 현 집권세력의 집권연장이나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의 존립 근거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뤄졌다.

<투데이신문>은 70주년 제헌절을 맞아 위로부터의 개헌의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지난 9번의 개헌을 되돌아보고, 다가올 10차 개헌에서 ‘아래로부터의 개헌’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짚어봤다.

【투데이신문 남정호 기자】 지난 2017년 장미대선부터 본격화된 개헌 논의는 대통령 개헌안 처리가 무산되면서 일단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6.13 지방선거 이후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등 범야권을 중심으로 개헌연대를 꺼내 들면서 다시금 개헌 이슈가 수면 위로 오르고 있다.

이런 가운데 권력구조 개편에 중점을 둔 정치권의 개헌 논의와 관련해 ‘위로부터의 개헌’의 한계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그간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이뤄진 총 9번의 개헌에 국민의 역할은 크지 않았다. 4.19혁명과 6월 항쟁과 같은 혁명으로 인한 개헌이 두 번 있었지만, 당시에도 시민세력은 개헌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개헌 과정에서 국민들에게 주어진 권리는 대통령이나 국회에 의해 만들어진 개헌안에 대한 찬반 여부가 전부였다.

이처럼 국민의 의견은 배제된 채, 국회에서 진행된 개헌 논의는 결국 각 당간의 유불리를 따지는 권력구조 개편에 매몰되면서 ‘위로부터의 개헌’의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굴곡의 개헌사

1948년 제헌헌법 공포 이후, 70여년간의 헌정사 동안 총 9번의 개헌이 있었다. 이승만 정권 시기였던 1~2차 개헌은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포석을 마련하려는 목적으로 실시됐다.

1차 개헌은 ‘발췌개헌’으로 불린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연임을 위해 기존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꿨다. 당시 개헌 과정에서도 군인과 경찰 등에 의해 국회를 포위한 가운데 기립투표를 실시하고, 개헌 공고 절차를 생략하는 등 위헌을 저질렀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잘 알려진 2차 개헌은 1954년에 이뤄졌다. 기존 헌법에서 ‘대통령의 중임을 1차례로 제한한다’는 규정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 철폐한다’는 내용으로 수정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꾀했다. 개헌안은 당시 개헌정족수인 135.333…명에 1표가 부족한 135표를 얻어 부결됐으나, 여당이었던 자유당은 사사오입 논리를 들어 개헌정족수를 135명이라 주장한 끝에 개헌을 이뤘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자유당 정권이 붕괴한 뒤 이뤄진 3차 개헌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합법적인 절차에 따른 개헌으로 기록된다. 같은 해 진행된 4차 개헌은 이승만 정권 당시 적폐청산을 목표로 3.15 부정선거 관련자와 부정축재자 처벌조항을 담았다.

5~7차 개헌은 5.16쿠데타 이후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권력기반 마련을 위해 실시됐다. 1962년 이뤄진 5차 개헌은 쿠데타 직후 국회가 해산된 상황에서 박 전 대통령이 이끈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 대통령 중임제로 회귀하는 내용을 담았다.

‘3선 개헌’이라 불리는 1969년 6차 개헌은 대통령 중임제하에서 재선까지 마친 박 전 대통령의 3선을 위해 대통령 연임제한을 폐기한 개헌이었다.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야당을 배제한 채 새벽에 국회 제3별관에 모여 기습적으로 통과시켰다.

‘유신헌법’을 탄생시킨 1972년 7차 개헌은 박 전 대통령의 종신집권을 위해 마련된 헌법이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법적 근거 없이 국회를 해산하고, 그 권한을 국무회의로 옮겨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1980년 8차 개헌은 10.26 사태 이후 12.12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에 의해 진행됐다. 대통령 간선제와 7년 단임제를 주요 골자로 하는 개헌안으로, 전두환씨의 집권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헌법은 다시 쓰였다.

87년 체제의 명암

이후 1987년 6월 항쟁을 거쳐 이뤄진 9차 개헌은 ‘87년 체제’라고 불리는 현행 헌법을 탄생시켰다. 민주화 투쟁의 산물로써, 한국 정치 역사에서 드물게 여야 간 정치적 논의와 합의에 의해 이뤄졌다는 평가를 받는 87년 체제에도 암(暗)은 분명히 남아있다.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강원택 교수는 논문 <87년 헌법의 개헌 과정과 시대적 함의>에서 “여느 헌법처럼 87년 헌법 역시 결국 정치적 산물이자 타협의 결과일 수밖에 없지만, 87년 헌법에는 그런 속성이 보다 강하게 나타났다”고 평가했다.

강 교수는 “(당시) 헌법개정은 국회 논의에 앞서 민정당 4인, 통일민주당의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각 2인씩으로 구성된 ‘8인 정치회담’에서 실질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87년 헌법은 기본적으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라는 정치 보스 3인의 정치적 협의의 산물이었던 셈”이라며 “이들에게 ‘민주화’된 환경은 자신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을 높여주는 정치적 기회구조였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런 이유로 인해 87년 헌법은 민주화운동 주도세력이었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배제하고 국민의 참여 범위를 최대한 제한했던 구체제 정치 엘리트들의 정치게임의 결과”라며 “개헌 의제에서 직선제 개헌이라는 최소강령적 요구만을 실현하면서 실질적인 민주화의 의제를 모호하게 정의하거나 의도적으로 회피한 정치협약이라는 비판을 받는다”고 부연했다.

이어 강 교수는 “한국의 민주화는 애초부터 혁명적인 것이 아니었다”며 “1987년의 6.29선언은 권위주의 세력과 민주화운동세력 간의 타협을 의미했다”고 말했다. 민주화의 요구는 거셌지만 권위주의 세력을 타파할 만큼 강하지 못했고, 권위주의세력 역시 민주화운동세력의 도전을 억압할 수만은 없었다. 두 세력의 힘이 균형점에 다다랐을 때, 6.29선언을 통해 양측은 새로운 게임의 규칙 아래 경쟁을 모색했다는 설명이다.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장영수 교수도 논문 <국민참여개헌의 당위성과 방법론>에서 87년 체제가 높아진 국민들의 민주의식과 정치권의 권위주의가 충돌한 가운데 이뤄진 타협으로 볼 수 있다며 87년 체제의 한계에 대해 짚었다.

장 교수는 “국민들의 요구에 따른 직선제 개헌은 관철됐지만, 그 밖의 구체적 헌법 조항들은 국민들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 없이 정치권의 합의를 통해 개헌안에 반영됐고, 국민들은 국민투표를 통해 전체 개헌안에 대한 찬반만을 결정할 수 있었다”며 “87년 헌법은 역대 최초의 여야 합의에 의한 헌법이라는 특징을 보이지만, 헌법의 개별 조항들에까지 국민의 의사가 충실하게 반영된 헌법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당시의 정치적 여건이나 국민의사를 수렴할 수 있는 기술적 조건들이 성숙되지 못했던 것도 원인의 하나일 수 있지만, 헌법개정안의 마련에 참여했던 정치세력들이 시간에 쫓겼던 것과 대통령 직선제 이외에는 구체적인 요구를 내세우지 않았던 국민들의 헌법개정에 대한 의사를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시키려는 의지가 크지 않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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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의 개헌이 남긴 것들

이처럼 그간 한국 사회에서 이뤄진 개헌의 특징은 ‘위로부터의 개헌’이었다는 점이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결과물로 탄생한 87년 체제 역시 논의 과정에서 당시 시민사회의 참여는 없었다. 대부분 정권의 연장이나 존립 근거를 만들기 위해, 또는 새로운 정치적 기회구조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이뤄진 앞선 9차례의 위로부터의 개헌에서 헌법개정은 매번 전형적인 ‘그들만의 리그’였다.

공주대학교 법대 권형둔 교수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헌법에 개헌안을 발의할 수 있는 권한은 사실상 대통령과 국회에 있어 그 권한을 행사한 건 맞다”면서도 “6월 항쟁과 4.19혁명 당시 개헌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 권력자들이 통치 구조를 변경해 권력을 유지하려는 개헌이었기 때문에 국민의 뜻과 유리된 그들만의 권력놀음이었다는 문제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위로부터의 개헌의 구조적 한계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홍완식 교수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헌법은 △기본권 △통치구조론 △헌법 전문을 포함한 헌법총론 등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헌법총론을 제외한 기본권과 통치구조론이 개헌의 쟁점 사안인데, 국민의 관점이 아닌 정치인의 관점에서 통치구조론에 주력한 것이 앞선 9번의 개헌에서의 한계라는 지적이다.

홍 교수는 통화에서 “위로부터 개헌에서 결국 정치인들은 주로 통치구조론에 관심이 많아 그걸 고치는 데 주력하게 된다”며 “상대적으로 국민의 기본권 신장부분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고치게 되는 등 구조적 한계점이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국민의 관점에서는 통치구조나 정부시스템은 결국 기본권 신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며 “국민의 관점에서 바라본 통치구조론은 권력이 분산돼야만 권력자들이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기 때문에 국민의 기본권이 지켜지고 신장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정치권에서 진행된)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논의도 국민의 기본권 신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회의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제왕적 대통령제가 안 된다는 관점이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없애야겠다고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가 다른 것”이라며 “지금까지 개헌의 역사를 보면 이 같은 한계점이 있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홍 교수는 지금까지의 개헌의 한계를 넘기 위해 국민참여 개헌 등 개헌 과정에 국민의 의견이 반영돼야 하고, 그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개헌에 국민의 의견이 왜 들어가야 하느냐’에는 원론적으로는 국민이 주권자이기 때문이라 하지만 이 관점을 바꿔야 한다”며 “원칙적으로 주권자는 국민이고,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은 국민이 고용한 계약직 공무원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이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게 하려면 권력이 집중돼선 안 된다. 때문에 주권자인 국민을 위해 이런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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