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노회찬과 한국현대사
[칼럼] 노회찬과 한국현대사
  • 이종우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7.26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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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강의전담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강의전담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노회찬 투신 사망. 뭐냐, 이거?’

7월 23일 월요일 10시 30분경 일이 있어서 모처로 이동하는 길에 나는 친구로부터 위 내용의 메시지를 받았다.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나는 사실 확인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서 휴대전화로 검색해서 부고를 확인했다. 그 날은 24절기 중 하나인 대서(大暑)였다. 아스팔트가 녹아내릴 정도로 뜨거운 여름의 한복판, 뜨거운 여름보다 더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한 정치인이 그렇게 유명을 달리했다.

노회찬 의원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월요일 이후 나는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해야 할 일을 빼먹기도 하고, 회의 장소를 예약하면서 엉뚱한 날짜로 예약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만나기로 한 사람과 의사소통이 되질 않아서 하마터면 이 더위에 상대방에게 헛걸음을 시킬 뻔한 경우도 발생했다. 내가 그 전 주말에 지방에 다녀온 탓일 수도, 1994년 이후 가장 덥다는 올 여름의 더위 탓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노회찬 의원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극도의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편인데, 분노 이외의 스트레스가 극에 치달으면 극도의 무력감과 피로감을 느낀다. 이런 체질 탓에 아무 일도 못했다면, 그것은 노회찬 의원의 죽음이 나에게 큰 상처와 스트레스였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노회찬 의원의 삶은 우리 현대사와 그 궤적을 같이 하고 있다. 노회찬 의원의 고향은 부산이지만, 그의 부모님은 피난민이었다. 노회찬 의원의 가족은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상처 중 하나인 한국전쟁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또한 노회찬 의원이 처음으로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시기는 경기고등학교 재학 시절이었다. 노회찬 의원의 구술에 따르면, 이 때 고등학생 신분으로 유인물을 만들어서 학교에 배포하고, 학생운동 조직을 만들었으며, 함석헌, 백기완 등 당시 민주화 운동을 활발히 하던 사람들의 강연을 듣고, 직접 찾아가서 면담을 요청했다. 이어서 노회찬 의원은 이런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박정희와 군사독재정권의 10월유신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 그리고 그 이후에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을 하면서 투옥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 시기는 197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으로, 광주민주화운동, 87항쟁, 88노동자 대투쟁 등 우리 현대사에서 한 획을 긋는 사건들이 있었던 시기이다. 이러한 민주화운동의 현장 한복판에 노회찬 의원이 있었다.

국회의원 당선과 그 이후의 활동들을 통해서도 노회찬 의원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노회찬 의원은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 당시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 배출은 진보정당의 역사에서 최초의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노회찬 의원이 선대본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보여준 뛰어난 언변이 민주노동당의 이미지 개선과 국회의원 배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노회찬 의원이 의정활동이나 방송 토론, 인터넷에서 보여준 촌철살인의 언변은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과 지식을 동시에 제공했으며, 언변의 정석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국회의원 재직 시절 “삼성X파일 사건”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이 사건은 삼성의 수뇌부가 검사와 정치인에게 불법 자금을 제공하거나 제공하려고 모의하는 것을 녹취한 파일이 공개된 사건이었는데, 이 사건에서 엉뚱하게 불법도청이 더 큰 문제로 부각되었다. 그리고 이 파일의 내용을 인터넷에 전파한 노회찬 의원이 통신보호법 위반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으면서 의원직을 박탈당한 것이다. 사회 비리 고발보다 도청이 더 큰 문제라는 프레임으로 인해 훗날 재벌 권력이 다른 권력이나 정의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인식하게 만드는 사건이 되었다.

삶의 여정에서 한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 하면서 민주화와 정의를 위해서 노력했던, 예술을 사랑했던 노회찬 의원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이유는 후원금 4000만원 때문이었다. 노회찬 의원이 국회의원 예비후보이던 시절 드루킹이 만든 조직인 경공모의 회원들 중 노회찬 의원의 고등학교 동창을 중심으로 한 사람들이 십시일반 모아준 돈을 받았다는 것이다. 진보정당의 원외 의원이면 재정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경공모의 회원이 준 돈이 대가성이 있는지도 확인이 안 된 상태였다. 결국 도덕성과 깨끗함을 강조했던 노회찬 의원의 자괴감, 특검의 피의사실 공개와 수구 언론의 보도를 통한 피의사실 유포가 노회찬 의원의 죽음의 원인이라는 여론이 대다수였다. 참고로 차떼기 사건 당시 한나라당이 배상한 정치자금은 800억원이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노회찬 의원의 서울 빈소에 7월 24일 밤 10시 현재까지 8,000여명의 조문객이 다녀왔다고 전해진다. 전국의 조문객 수를 다 합치고, 5일장임을 감안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의 애도의 물결은 노회찬 의원의 삶의 여정이 어떠했는지를 방증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 물결은 곧 적폐와 불의를 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