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차일드 44 (Child 44, 2015)’라는 영화가 있다. 개리 올드만, 톰 하디 등 유명배우들이 출연했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낙원엔 살인이 존재하지 않는다(There is no murder in Paradise.)’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이 영화의 배경은 옛 소련이다. 전후 스탈린이 주장하는 소비에트 연방은 모든 인민에게 행복한 낙원이어야 했고, 국가 안보 총국(MGB)은 그런 지상낙원에 위협이 되는 이들을 색출하고 잡아간다. 반체제 인사를 분류하고 고문해서 죄를 인정하면 총살형. 일단 붙잡히면 유죄나 다름없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MGB에 찍히면 평범한 사람도 죄없이 끌려가 약물과 고문을 이기지 못해 거짓 자백 후 누명을 쓰고 죽는다.

고아 출신으로 독일과의 전쟁에서 엉겁결에 전쟁영웅이 된 레오는 전우들과 함께 MGB의 일원이 된다. 자긍심을 갖고 위세를 누리던 레오의 일상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동료의 아들이 사체로 발견되면서부터다.

인민의 지상낙원이 되려면 살인과 같은 강력범죄는 있을 수 없다. 더군다나 어린 소년이 외과수술에 가까운 정교한 장기적출을 당한 채 발가벗겨져 숲에서 발견되는 흉악한 일은 더더욱 없어야 한다. MGB는 소년의 죽음을 사고사로 결론 짓는다. 이를 살인사건이라고 주장하면 지상낙원에 대한 반동이므로, 레오는 동료와 그의 가족들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설상가상 그 즈음 레오의 사랑하는 아내 라이사가 반체제인물로 몰리고, 아내의 무죄를 주장한 레오는 볼스크 민병대로 좌천된다.

영화 '차일드 44'는 볼스크에서도 소년 연쇄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레오가 범인을 추적하는 내용이다. 그 과정에서 이견을 용납하지 않는 체제가 어떻게 사회의 최약체인 어린이를 향한 구조적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은폐되는지 그려간다. 완전무결한 사회라는 신화에는 결함에 대한 침묵이 필요하다. 볕이 들지 않는 침묵의 그늘에서 괴물이 키워진다. 레오는 체제 수호의 절대적 의지가 오히려 연쇄살인 방조라는 체제위협적 현상을 만드는 모순을 따라가, 결국 범인을 잡아낸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범인의 정체가 아니라 레오의 아내 라이사다. 레오에게 있어 라이사를 보고 반했던 기억은 로맨틱하기 그지없다. 그는 자신이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라이사의 기억은 다르다. 라이사는 처음부터 MGB 요원인 레오를 두려워했다. 그의 구애를 거절하면 반체제 인사로 몰려 죽을 지 모른다는 공포를 느낀 것이다. 밤마다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던 라이사에게 있어 레오와의 결혼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외길이었다.

라이사는 레오의 부족함 없는 삶에 승차한다. 아름다운 옷을 입고 좋은 음식과 와인으로 풍족한 만찬에 참석한다. 레오의 동료들과 즐거운 표정으로 대화하며 레오를 향해 미소 짓는다. 보통 사람들보다 좋은 집의 값비싼 침대에서 - 굳은 표정을 들키지 않은 채 - 레오와 성관계도 갖는다. 그렇게 라이사는 생존을 위해 삶을 위장한다.

어느 한쪽에겐 사랑인 것이 다른 한쪽에겐 폭력이 되는 상황. 그렇다면 이 여성의 미소는 생존을 위한 가면으로 온전히 인정받을 수 있을까. 살인사건의 은폐로 인해 힘없는 어린 소년들이 계속해서 살해당하는 것이나, 라이사가 원치 않는 결혼생활을 하는 것이나, 일방의 체제를 유지하는 위력에 의해 강요된 침묵의 피해란 점에서 두 사안은 서로의 구조적 양상을 은유한다.

레오는 살인자를 쫓으며 사람들이 어떻게 지상낙원의 구조적 공범이 되어 체제를 유지하는지 발견하지만, 정작 자신이야말로 그런 체제의 수호자로서 덕을 보는 이상 누군가를 사랑하기만 해도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자신에게 상대를 마음껏 통제할 수 있는 위력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남자.

오늘날이라면 라이사는 과연 남편 레오를 위력에 의한 성폭력으로 법정에 세울 수 있을까? 라이사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담은 주장 뿐이다. 목숨을 위협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는 하나도 수집되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인들은 라이사가 만찬에 참석하고, 즐겁게 담소를 나눴으며, 미소를 지었고, 레오와의 로맨스를 긍정했다고 증언할 것이다. 레오는 라이사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항변할 것이다.

안희정 전 지사의 성범죄 재판 1심이 무죄로 판결됐다. 도지사로서의 위력이 영향을 끼쳤다는 걸 인정치 않았다며 판결이 잘못 됐다는 비판 여론이 일고 있다. 주말 광화문에선 이번 판결을 규탄하는 시위가 있었다.

한 언론이 보도한 판결 요약문 속기를 보면 일부의 비판과 달리 재판부는 상당히 깊은 고민을 한 것 같다. 우리사회에 진행중인 성폭력 논의가 현행법 안에 제대로 담겨 있지 않았다고 보기에, 기존의 사회적 합의인 법체계를 임의로 뛰어넘는 판결을 해선 안된다는 재판부의 판단은 일견 타당하다.

그 중심에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있다. 법치국가가 꿈꾸는 낙원에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쓰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이는 능력과 상관없이 개개인의 평등한 인권이 지켜져야 하는 민주주의 국가의 이상향과도 일치한다. 이 나라에서 사는 이상 강력한 의심만으로 누군가를 유죄로 단정지어선 안된다. 우리는 MGB가 판치는 공산독재 국가에서 사는 게 아니니까.

때문에 길거리 잡담이 아닌 법정에서의 판결이란 점에서, 현행 법체계에 맞춰 ‘억울한 한 사람’을 만들지 않으려 한 재판부의 노력은 정당하다. 법치국가로서의 낙원에 한걸음 더 다가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겐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이렇게 완벽하고 합리적인 법치주의의 지상낙원을 실현하는 게 무슨 수로 가능했나.

재판부가 난색을 표명한 대로, 이 사건은 언뜻 보면 가해지목자가 위력을 행사했는지 증명하는 게 핵심인 사안 같다. 그러나 실제 사건의 중심에 있는 문제는 '피해자가 상대의 위력을 어떻게 인식했느냐'에 있다. 그리고 이는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고 증명할 길도 없다. 마치 라이사의 경우처럼. 우리는 지금 라이사의 재판결과를 보고 있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측의 팽팽한 입장차를 모두 인정하고 각자가 억울할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재판부의 판단대로라면 현행 법체계에 의해 한 쪽의 억울함은 구제됐다. 그렇다면 절대 증명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진 쪽은 언제까지 완벽한 낙원을 유지하기 위해 침묵해야 하는지 궁금해진다.

이번 판결은 그리하여 입법기관인 의회를 구성시키는 시민사회에 묻는다. 정말 이대로만 가면 우리가 꿈꾸는 낙원에는 억울한 이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게 되느냐고. 혹시 그 낙원에는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 하기에 누군가의 억울함이 침묵의 그늘 아래 묻혀져야 하는 게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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