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책 ‘유럽 낙태 여행’ 저자 ‘봄알람’
낙태 주제로 유럽 5개국으로 여행 떠나
동시대 다양한 낙태 이슈 일어나고 있어
유럽 활동가들, 한국 상황 긍정적 평가
낙태 허용, 당사자에게만 주어진 권리
국가·남성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 아냐
낙태, 의료시술 중 하나로 여겨져야

(왼쪽부터) 이두루씨, 우유니게씨, 이민경씨, 정혜윤씨 ⓒ투데이신문
(왼쪽부터) 이두루씨, 우유니게씨, 이민경씨, 정혜윤씨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2016년 9월 22일 보건복지부는 의료법 시행령과 시행규칙 개정안을 내놓았다. 개정안에서 규정하는 비도덕적인 진료행위에 임신중절수술, 이른바 낙태가 포함됐다. 그해 10월 15일 수많은 여성들이 낙태는 여성의 권리임을 주장하며 검은 옷을 입고 거리로 나섰다. 낙태죄 폐지 촉구하는 한국 여성들의 첫 ‘검은 시위’였다.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올해 여름에도 여성들은 거리에서 ‘낙태죄 폐지’를 목 놓아 외쳤다. 한국은 낙태죄 존폐가 결정되는 중요한 시점에 서 있다. 낙태죄 위헌 여부 헌법소원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단만을 앞둔 상황이다.

페미니즘 출판사 ‘봄알람’은 합법적으로 임신 중단을 선택할 권리를 위한 한국 여성들의 투쟁에 불을 지피고자 낙태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유럽으로 향했다. 각국의 낙태권 활동가들을 만나 그들의 낙태 역사와 현실에 귀를 기울였다.

<투데이신문>은 지난 16일 봄알람 운영진 우유니게(28), 이두루(31), 이민경(27), 정혜윤(27)씨를 만나 그들의 유럽 낙태 여행기와 여행을 마친 후 바라보는 한국의 낙태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봄알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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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책 ‘유럽 낙태 여행’에 대해 소개 바란다.

‘유럽 낙태 여행’은 낙태라는 주제를 가지고 떠난 여행을 기록한 책이다. 유럽의 5개국을 방문해 각국의 낙태 운동은 어떻게 진행됐는지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봤다. 인터뷰에 가깝지만, 여행기로 형식으로 풀어낸 게 특징이다. - 이민경씨(이하 이민경)

Q. 낙태를 주제로 여행을 떠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지난해 8월 다 함께 떠난 여름휴가의 마지막 날 밤 술자리에서 이다음 여행을 얘기하는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결정됐다. 2016년 10월 한국에서도 낙태죄 폐지를 위한 ‘검은 시위’가 일어났고,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 우리가 어떤 담론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여행이라는 테마로 낙태를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 이민경

Q. 여행지로 프랑스, 네덜란드, 아일랜드, 루마니아, 폴란드 등 5개국을 선정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유럽 대륙에는 정말 다양한 나라가 존재하고, 동시대에 낙태라는 이슈와 관련해서는 저마다 다른 시간을 살고 있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낙태 문제로 과거와 미래를 오갈 수 있는 국가’를 기준 삼아 프랑스, 네덜란드, 아일랜드, 루마니아, 폴란드를 가게 됐다. 투쟁을 통해 낙태권을 얻어낸 국가, 이미 가지고 있는 낙태권을 다른 국가와 연대하는 데 주목하는 국가, 현재 낙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국가 등 선정한 모든 국가에 낙태 관련 이슈가 정말 다양하게 존재했다. - 이민경

페미니스트 역사학자 플로랑스 몽테르노와 봄알람 ⓒ봄알람
페미니스트 역사학자 플로랑스 몽테르노와 봄알람 운영진 <사진 제공 = 출판사 봄알람>

페미니스트가 이룩한 낙태 합법화 ‘프랑스’

Q. 첫 번째 목적지인 프랑스는 현재 낙태를 합법으로 인정하고 있나.

프랑스는 현재 임신 12주까지 낙태가 가능한 낙태 합법 국가다. 주 낙태 방법은 약물이며, 12주가 지나서 낙태할 경우 의료인에게 징역 2년 또는 벌금 3만 유로가 부과된다. 프랑스는 과거 활발한 여성운동 역사를 가진 나라로 알려졌다. 하지만 낙태에 대해서는 보수적이었다. 1960년대에는 피임죄도 존재했다. 프랑스는 가톨릭이라는 종교적 배경 때문에 피임 기구를 사용한다거나, 약을 먹는 등 임신을 조절하는 피임행위가 금지돼 있을 정도였다. - 이민경

Q. 낙태 문제에 보수적이었던 프랑스는 어떻게 합법화를 이뤄냈나.

‘68 혁명’ 전후로 피임죄를 없애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히 일어났고 남성과 여성이 함께 투쟁해 피임죄 폐지를 이뤄냈다. 68 혁명 이후 여성운동이 활발해졌고 페미니스트들이 ‘343선언’ 등 투쟁으로 1970년대 초 낙태죄 폐지를 쟁취했다. 당시 페미니스트들은 피임과 낙태금지로 인해 몸의 자유를 제한받고 있고, 이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은 낙태라고 생각했다. 프랑스는 전적으로 페미니스트 여성들의 투쟁으로 낙태 합법화를 이뤄냈다고 볼 수 있다. 그 시기에 프랑스에는 진보정부가 들어섰는데 페미니스트 여성을 보건부장관으로 임명하고, 유명 인사들이 낙태 공개선언에 나서는 등 각계각층에서 대중들의 활발한 낙태죄 논의 동참을 끌어냈다. - 이민경

Q. 그렇다면 낙태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인식은 긍정적인 편인가.

사실 그렇게 좋지 않다. 프랑스는 낙태가 합법이고 낙태약도 무료로 제공되는 등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비교적 상황이 좋은 편이지만 국민들이 낙태를 입에 올리는 게 굉장히 생경하다. 여성들이 직접 투쟁으로 일궈낸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낙태가 여성의 권리라는 의식이 우리가 기대했던 것만큼 선진적으로 통용되고 있진 않다. - 이민경

낙태 합법화를 이뤄낸 지 50년이 다 돼가는데 현재 보수 정치인들이 다시 불법으로 되돌리려는 역행을 강력하게 시도한다는 게 굉장히 놀라웠다. 프랑스도 낙태 합법을 지켜내기 위해 계속해서 싸워나가야 하는 상황이다. - 이두루씨(이하 이두루)

Q. 낙태 합법을 유지하기 위한 어떤 노력이 시도되고 있나.

대표적인 예로, 5년 전쯤에는 인터넷에 낙태를 검색하면 관련 의료 정보가 아닌 낙태를 하지 말라는 광고가 상위를 차지했다. 구글(Google) 검색결과 맨 위에 그런 광고가 나온다는 건 자금과 정치력이 동원된 프로모션인 거다. 현재 정부에서 이런 광고를 하지 못하도록 한 상황이다. 여성단체에서도 노력하고 있지만 사실 프랑스에서 낙태는 활발한 이슈가 아니다. 프랑스는 과거에서부터 이미 낙태권이 보장됐기 때문에 현 세대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잘 몰라 필사적으로 지켜내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거 같다. 그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낙태 문제가 전면적으로 다뤄지진 않는다. 여성단체에서도 굉장히 걱정하는 부분이다. - 이민경

재생산권 단체 ‘위민 온 웨이브’의 창시자 레베카 곰퍼츠와 봄알람 운영진 <사진 제공 = 출판사 봄알람>

세계적인 낙태 활동가 레베카의 나라 ‘네덜란드’

Q. 두 번째 방문한 네덜란드는 낙태가 임신 24주까지 가능한 독보적인 국가라고 하던데.

그렇다. 네덜란드는 임신 24주까지 낙태 시술이 가능한 낙태 합법 국가다. 주 낙태 방법은 약물 및 수술이며, 지정되지 않은 병원에서 시술할 경우 의료인에게 징역 1년까지 형을 부과한다. 네덜란드에서는 가족계획이 중요해지며 자연스럽게 낙태 합법화가 추진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됐다. 당시 네덜란드보다 앞서 낙태가 합법화된 영국 등 주변국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 우유니게씨(이하 우유니게)

사실 네덜란드는 어떤 특별한 사건을 계기로 극적으로 낙태 합법화가 되진 않았다. 우리가 네덜란드를 갔던 이유는 재생산권 단체 ‘위민 온 웨이브’의 창시자 레베카 곰퍼츠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 이두루

Q. 레베카는 어떤 인물인가. 그가 낙태와 관련해 어떤 활동을 했나.

앞서 언급했던 레베카는 ‘위민 온 웨이브’를 만들어 여성의 재생산권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로 낙태와 관련해서는 합법이 아닌 국가의 여성들이 네덜란드의 법을 적용받아 낙태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들을 네덜란드 선박에 태워 국제법에 따라 해당 선박의 국적법을 따르는 해역으로 이동해 낙태 시술을 하거나 낙태약을 지급했다. 법의 구멍을 찾아 창의적인 방법으로 낙태 금지 국가 여성들을 도왔다. - 우유니게

레베카는 세계적으로 여성의 낙태권을 이슈화하고자 했다. 다른 국가의 토크쇼에 즉흥적으로 출연해 낙태 관련 이야기를 하고, 낙태약의 존재조차 모르는 국가에서는 여성들에게 이와 관련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길거리 벽 한쪽에 ‘안전한 낙태’라는 문구와 함께 전화번호를 남기기도 하고 시내의 유명 기념물 같은데 낙태 관련 현수막을 걸기도 했다. - 이두루

Q. 네덜란드는 여성의 재생산권을 가장 많이 이룩한 국가로 알려졌는데, 낙태권도 잘 보장되고 있나.

다른 국가와 비교했을 때 선진적이긴 하지만 아직은 싸워야 할 게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에서는 낙태 클리닉을 통해서만 낙태가 가능한데 전국에 12군데 정도뿐이라 접근성이 굉장히 떨어진다. 게다가 수도인 암스테르담에도 없다고 하더라. - 우유니게

클리닉 과정도 복잡하고 외국인의 경우엔 유료다. 낙태가 24주까지 가능하다는 게 선진적이지 낙태를 한다고 했을 때 오히려 프랑스가 더 나은 편이다. - 이민경

Q. 낙태에 대한 네덜란드 국민들의 인식은 어떤가.

낙태 클리닉이 전국에 12군데뿐이고 그 과정이 복잡한 거 보면 제도적 측면에서도 낙태권을 제대로 보장받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 네덜란드 국민들 사이에서는 낙태권이 이미 오래전에 얻은 권리라는 인식이 강해서인지 더 나은 법제화를 위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고 있다. - 우유니게

당시 레베카씨는 여성 문제에 관심 없는 게 제일 큰 문제라고 하더라. - 정혜윤씨(이하 정혜윤)

Q. 그렇다면 낙태 합법을 유지하기 위한 움직임은 있나.

그런 노력은 없을 것 같다. 사회운동은 입에 오르내려야 생명력을 가지는데 네덜란드는 그렇지 못하다. - 이민경

레베카씨도 네덜란드 안에서보다는 다문화 유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유럽 내 평등한 낙태권을 위해 합법국이 불법국과 연대해 불법국의 상황이 나아져 비슷한 수준의 낙태권을 확립하면 그다음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거라고 보고 있다. - 이두루

수정헌법 8조 폐지를 위한 길거리 캠페인 중인 ARC 활동가들과 봄알람
수정헌법 8조 폐지를 위한 길거리 캠페인 중인 ARC 활동가들과 봄알람 운영진 <사진 제공 = 출판사 봄알람>

낙태 금지 ‘수정헌법 8조’ 폐지 이뤄낸 ‘아일랜드’

Q. 세 번째 방문국인 아일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낙태 규제법을 가진 국가라고 하더라.

아일랜드는 현재 임신을 지속했을 때 모체의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를 제외한 모든 낙태가 금지인 국가다. 아일랜드는 영국에서 독립해 국가가 생길 때부터 가톨릭 이념을 가져와 처음부터 낙태가 불법이었다. 1983년 세계적으로 진보 물결이 일렁이며 낙태 관련 규정이 약화되는 분위기를 보였으나 가톨릭 세력이 낙태죄가 폐지될 것을 우려해 낙태죄를 헌법으로 넣는 국민투표를 했다. 이를 통해 태아와 산모의 생명권을 동등하게 보는 형법이 생겼고, 여성이 낙태할 경우 당사자와 의료진이 형법상 징역 14년에 처했다. 모순적인 게 아일랜드 국민이 다른 낙태 합법 국가에서 시술을 받는 건 처벌 대상이 아니었다. 아일랜드 여성들은 낙태 금지로 여러 문제를 겪었다. 건강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 낙태 시술을 받으려면 돈과 시간이 필요한데 이는 결국 단순히 여성의 불행이 아닌 계급과 연계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돈 있는 사람만이 원할 때 낙태가 가능했던 거다. 이런 문제를 가시화하자는 대중의 움직임이 시작됐고 ‘2012년 사비타 할라파나바르의 사망 사건’이 낙태 합법화 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 정혜윤

아일랜드는 국내에서 낙태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고, 낙태를 하는지 안하는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할 정도로 죄라는 인식이 강했다. 국가 역시 헌법상 이를 죄로 규정했고, 심지어는 자연유산한 여성들까지 낙태 혐의를 씌울 정도였다고 한다. - 이두루

Q. ‘2012년 사비타 할라파나바르의 사망 사건’이 무엇인가.

사비타는 인도에서 이주해 아일랜드에서 치과의사로 일을 한 중산층이었다. 어느 날 임신을 한 사비타는 몸이 아파 병원에 갔는데 태아에 문제가 생겨 곧 죽을 것이고 이로 인해 본인이 아픈 거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도 병원에서는 낙태 시술을 해주지 않았다. 태아가 완전히 숨을 멈춘 게 아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결국 사비타는 합병증으로 사망에 이르렀다. 사비타의 죽음에 분개한 많은 여성이 집회를 열었고 여성의 재생산권을 위한 단체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 정혜윤

Q. 아일랜드 국민들은 낙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

현재 아일랜드는 지난 5월 국민투표를 통해 66.4%의 지지율을 얻어 낙태를 금지하는 수정헌법 8조 폐지가 결정된 상황이다. 낙태 문제가 점차 나아지고 있다. 사실 아일랜드가 그동안 낙태가 불법이었던 가장 큰 이유는 종교적 배경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 가톨릭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국민들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많아지기 시작했다. 낙태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는 건 5월 국민투표 결과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60대 이상은 과반이 낙태 금지 헌법을 유지하길 원했지만 그 아래 세대는 폐지를 원했다. 아일랜드 국민들이 이전에는 낙태에 관해 관심도 없고 논의조차 하지 않았지만 합법화 과정을 거치며 많이 알아가고 있는 거 같다. - 정혜윤

페미니스트 단체 ‘ANA’ 소속 다니엘라 드라기치(좌)와 젠더 전문가 카르멘 라두(우), 그리고 봄알람 운영진 <사진 제공 = 출판사 봄알람>

끔찍한 낙태 역사를 가진 ‘루마니아’

Q. 네 번째 방문국인 루마니아는 지금보다 과거에 낙태가 비교적 쉬웠다고 하던데.

그렇다. 루마니아는 원래 낙태가 가능했다. 그런데 여성의 사회참여와 공적 영역에서의 활동이 늘어나다 보니 피임이나 낙태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출생률이 줄어드는 현상이 발생했다. 당시 차우셰스쿠 정권은 출생률 감소가 국가적 문제라며 ‘포고령 770호’를 만들어 낙태를 전면 불법화했다. 이때 피임도 함께 불법화됐다. 여성을 아이를 낳는 도구로 본 것이다. - 정혜윤

Q. 어떻게 낙태죄가 부활했나.

차우셰스쿠의 독재에 불만을 가진 국민들이 시민혁명을 일으켰고 그와 그 가족을 총살했다. 이후 차우셰스쿠가 만든 악법을 자연스럽게 폐지했고 그중 하나가 바로 낙태죄다. 차우셰스쿠의 낙태 금지로 많은 여성이 비위생적이고 안전하지 못한 환경에서 시술을 받다 숨졌고, 원치 않은 임신으로 출산까지 해 버려지는 아이도 많았다. - 정혜윤

Q. 낙태에 대한 루마니아 국민들의 인식은 어떤가.

루마니아는 여성운동을 통해, 여성권리를 위해 낙태죄 폐지를 이뤄낸 건 아니다. 단지 낙태가 금지된 시절 수많은 여성이 죽고, 아이들이 버려져 낙태죄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던 거다. 루마니아도 종교적 배경 등 이유로 낙태를 제외한 성 문제에 있어서는 진보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다. - 우유니게

루마니아 국민들의 인식은 ‘낙태를 합법화해야 한다’가 아니라 ‘끔찍했던 낙태 금지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거다. 여성 인권적 측면에서 접근이 아닌 끔찍한 과거를 상기시키는 폐습을 부활시킬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 이민경

Q. 힘겹게 얻은 낙태 합법화를 지켜내기 위해 어떤 노력이 이뤄지고 있나.

사실 낙태 합법을 유지하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미 많은 국민들이 낙태죄가 끔찍하단 걸 역사적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이를 되돌리기 쉽지 않다. 실제 일부 정치인들이 낙태죄를 부활하려 하자 국민들이 이를 막아서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 때문에 현지 활동가들도 낙태 관련 법보다는 성교육과 피임 관련 이슈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 정혜윤

폴란드 좌파 정당 ‘라젬’ 국제협력 담당 우르술라와 아그니슈카, 그리고 봄알람
폴란드 좌파 정당 ‘라젬’ 국제협력 담당 우르술라(좌)와 아그니슈카(우), 그리고 봄알람 운영진 <사진 제공 = 출판사 봄알람>

유럽 중 낙태권이 가장 절망적인 ‘폴란드’

Q. 마지막 방문국인 폴란드는 유럽 가운데서도 낙태권이 가장 절망적인 국가라고 하는데.

폴란드는 강간 및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 태아에 심각한 장애가 있거나 임신 지속이 모체의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를 제외한 낙태를 금지하고 있다. 사실 공산국가였던 폴란드도 과거에는 낙태 합법국이었다. 그런데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들어서며 이에 힘을 보탰던 가톨릭의 이념을 계승해 낙태가 금지됐다. 폴란드는 현재 낙태권에 있어 강력한 퇴행기로 유럽에서 상황이 가장 나쁘다. 지금도 불법인데 완전 불법화하려는 움직임과 싸우고 있다. 현재 집권 여당이 높은 지지율을 유지해오고 있고, 그들이 강행해서 낙태 완전 불법화 법안을 통과시키면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위태로운 상황이다. - 이두루

Q. 이에 반발한 여성들의 시위가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그렇다. 2016년 여성들 사이에서 ‘검은 시위’ 물결이 일었다. 폴란드에 가기로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2016년 낙태 가능 예외 조항마저 없애고 전면 금지하겠다는 법안이 발표되자 많은 여성이 즉각적인 분노를 표출한 사례다. 이때 143개 도시에서 10만명이 넘는 여성들이 낙태 전면 금지 법안 통과를 막기 위해 직장과 학교에 가지 않고 거리로 나섰다. 혹은 검은 옷을 입고 출근을 했다. 결국 해당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 이두루

Q. 폴란드는 피임도 금지하고 있다던데.

법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아니고 규정상의 문제가 존재한다. 남성용 피임 도구가 콘돔이라면 여성용 도구인 피임약에 접근하기 쉽지 않다. 피임약을 살 때마다 병원에서 진단서를 받아야 하는데 그 과정이 매우 모욕적이라고 하더라. 또 피임약 가격도 굉장히 비싸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적 인식인데 폴란드도 가톨릭이라는 종교적 배경 때문에 낙태는 물론 피임도 신 앞에 죄로 여겨진다. 실제로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어 피임하지 않는 남성이 많다고 한다. 낙태가 금지면 피임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모든 걸 통제하고 있다. 신의 영역이라고는 하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진짜 신을 존중해서라기보다는 여성을 통제하기 위해 남성들이 만든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이두루

Q. 그렇다면 낙태에 대한 폴란드 국민들의 인식은 폐쇄적인 편이라고 봐야 하나.

폴란드에서 낙태 시술을 받으려면 높은 위험성과 비싼 가격을 감내해야 한다. 그런데도 가톨릭 여성의 60% 이상이 낙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런 사회 인식에서 나온 굉장한 결과였다. 서로를 옥죄는 인식 속에서도 많은 여성이 낙태 시술을 받고 있다는 게 확인됐다. - 이두루

Q. 낙태권 확립을 위한 움직임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런 면에서 2016년 낙태 전면 금지 법안을 막아낸 사건은 낙태권에 폐쇄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한 번에 일깨웠다고 볼 수 있다. 낙태가 죄라고 생각하는 여성들마저도 나쁜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려는 움직임에 ‘내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구나’를 느낀 듯하다. 워낙에 강력한 보수 여당이었기에 시위하면서도 법안 폐기를 이뤄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이후 여성권리에 관심을 두고 여성운동에 뛰어든 사람이 늘어났고, 문제가 가시화돼 지금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 이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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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방향으로) 우유니게씨, 이민경씨, 정혜윤씨, 이두루씨 ⓒ투데이신문

낙태죄 존폐 갈림길에 선 ‘한국’

Q. 앞선 5개국과 한국의 낙태권 상황에 대해 비교한다면.

한국은 강간 또는 준강간(準强姦)에 의한 임신,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임신 등 일부 예외 경우에만 낙태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암암리에 많은 낙태가 이뤄지고 있다. 어쨌거나 불법이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 집계는 어렵다. 어느 기관에서 어떤 방식으로 조사하느냐에 따라 그 수치가 천차만별이다. 책에는 상대적으로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의료계 통계를 실었는데 해당 통계에 따르면 하루에 3000명 정도가 낙태한다. 믿을 수 없는 수치다. - 이두루

상황은 오히려 나쁘지 않다고 판단된다. 일단 한국은 낙태를 죄악으로 여기고 가톨릭적 남성성으로 여성을 처벌하려는 종교적 영향이 덜하다. 한국이 최악의 상황일 거라 생각했는데 유럽 낙태 여행을 다녀오고 더 최악의 상황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 이민경

Q. 5개국에서 만난 활동가들은 한국의 낙태권 상황을 어떻게 평가했나.

낙태가 이슈화되고 있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으로 봤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는 여전히 싸워 쟁취해야 할 재생산권이 남아있지만, 국민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아 이야기되고 있지 않다. 어찌 됐든 한국에서는 계속해서 논쟁 중이니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다. - 정혜윤

Q. 낙태 합법화를 주장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일단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말이 안 된다. 여성이 임신했을 때 낙태를 허용할 수 있는 건 당사자뿐, 국가가 처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가 여성의 낙태를 허용하든, 불허하든 전 세계적으로 이미 수없이 낙태가 일어나고 있고 그것은 당사자인 여성 스스로 결정해야 할 몫이다. 국가가 처벌한다는건 황당할 따름이다. - 이민경

비슷한 생각이다. 현행법이 낙태를 죄로 규정하곤 있지만 실제로 처벌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제대로 규제하지도 못하고 안전하게 시술받을 수 있는 권리만 박탈하고 있다. 사문화된 법이라고 해도 무방한데 이걸 유지하는 건 여성에게 부채감을 안기고 권리를 박탈할 뿐이다. 근친상간, 강간 등 특수한 상황에는 낙태를 인정하기 때문에 과잉규제가 아니라고 하는데 이는 아직도 낙태가 문란하고 철없는 여성들이 하는 거라는 인식이 남아있단 걸 보여준다. 다른 활동가들도 같은 생각이겠지만 낙태는 의료시술이 돼야한다. - 이두루

Q. 낙태 합법화를 반대 측에서는 ‘태아 생명권’을 문제 삼는데.

여성 자기결정권과 태아 생명권은 병합된 권리가 아니다. 임신한 당사자의 삶에 일어난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딜레마다. 낙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태아의 생명에 대해 고민한다. ‘태아의 생명과 내 권리 중에 후자를 선택하겠습니다’ 이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태아 생명권과 여성 자기결정권의 충돌은 낙태 합법화를 주장하는 측이 만들어낸 프레임이라고 생각된다. 여성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국가 혹은 남성이 가지겠다는 게 결국 그들의 주장이다. 낙태 금지로 오히려 더 많은 여성과 태아가 죽고 있다. 낙태를 막을수록 태아는 더 자라고, 그만큼 더 큰 고통을 받고 죽게 된다. 의료적 서비스로서 낙태가 빠르게 이뤄지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결국 이는 태아의 생명권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 이민경

덧붙여서 정말 태아의 생명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면 어떠한 낙태도 허용돼서는 안 되는 거다. 하지만 강간, 근친상간 등 예외를 두고 있다. 이런 경우에는 왜 태아 생명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인지 굉장히 모순적이다. 결국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건 태아 생명권이 아니라는 게 드러나는 것이다. - 우유니게

Q. 애초 이달로 예상됐던 낙태를 범죄로 보는 형법 269조의 위헌 여부 선고가 미뤄졌다.

책임지기 싫어서 미루는 거다. 현 정부가 민주정부임과 동시에 가톨릭 남성이 대통령인 정부이기 때문에 낙태 이슈는 점치기가 어렵다. 문재인 대통령이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지만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있는 거 같다. 성폭력이나 몰카보다도 첨예하고 급진적으로 다뤄야 할 이슈인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알아서 잘 해결해주라고 기대는 하지 않는다. 여성들이 얼마나 자기 일로 여기고 들고 일어서느냐가 중요할 것 같다. 만약 현 정부가 개선안을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처벌 수준을 낮추는 정도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한다. - 이민경

Q. 법률적인 개선과 함께 인식 개선도 함께 이뤄져야 할 것 같은데.

최근 유럽 낙태 여행 북 콘서트를 열었는데 티켓을 판매하시는 분이 낙태가 적힌 옷을 입고 음식점에 갔더니 사람들이 낙태라는 두 글자만 보고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더라. 단어가 가진 부정적인 이미지부터 바꿔나가야 한다. - 정혜윤

법리적으로 낙태죄가 폐지된다고 할지라도 대중의 인식이 변화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낙태가 소수의 문란한 여성이 하는 게 아닌 모든 여성에게 주어진 권리라는 걸 인식하는 것부터 하나씩 변화해나가야 한다. - 우유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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