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 “처벌 위해 비동의 간음죄 마련돼야”
로스쿨생 “대법원 판례에 반하는 판결” 규탄
여성계·법조계 “재판부 위력해석 문제”
재판부 법리오해·사실관계 오인 비판도

안희정 전 충남지사 ⓒ뉴시스
안희정 전 충남지사 ⓒ뉴시스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1심 선고 공판이 지난달 14일 열렸다. 이날 재판부는 “위력은 존재했으나 행사하지 않았다”, “(김지은씨가) 피해자답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안 전 지사 사건 1심 선고 이후 여성계는 재판부가 간음행위가 있었던 상황에서의 유형력 행사에만 초점을 맞춰 업무상 위력에 대한 판단을 엄격하고 좁게 해석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에서도 안 전 지사 사건의 1심 재판부가 대법원의 판례에 어긋나는 판단을 내렸다는 목소리가 제기됐다.

대법원은 지난 1998년 1월 23일 선고 당시 피감독자 간음죄가 성립하는 위력의 의미를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세력 ▲유·무형의 사회·경제·정치적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는 것 ▲현실적으로 피해자의 자유의사가 제압될 것임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고 판시한 바 있다.

한편 안 전 지사 사건 판결 이후 유사한 사례의 재판에서는 정반대의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수원지법 평택지원 형사4단독 이승훈 판사는 지난달 29일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혐의로 기소된 평택대 조기흥 명예총장에 대해 징역 8월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또 최근 서울중앙지법은 여직원 2명을 상습 추행(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한 화랑 대표 A씨에 대해 징역 8월을 선고했다.

이들 판결은 피해자가 생계나 직을 걸지 않고서는 저항할 수 없는 경우 위력에 의한 성범죄라고 판단한 것으로 해석된다. 위력에 대해 안 전 지사 사건의 재판부와는 다른 해석을 내놓은 것이다.

法 “위력 존재하나 행사되지 않아”

안 전 지사 사건 1심 재판부는 선고 공판에서 114쪽에 달하는 선고문을 모두 읽는 것이 적정치 않다면서 핵심 내용을 요약한 선고문을 통해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이를 공개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의 쟁점을 ▲안 전 지사에게 김씨를 제압할 정도의 위력이 있었는지 ▲안 전 지사가 위력을 행사했는지 ▲행사된 위력과 간음, 추행행위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지 ▲위력의 행사로 인해 김씨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됐는지 ▲검찰이 제출한 증거에 의해 강제추행의 공소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증명되는지 등으로 봤다.

먼저 위력의 존재와 행사 여부에 대해서 재판부는 “피고인이 유력 정치인이고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거명되고 있는 지위 및 도지사로서 별정직 공무원인 피해자의 임면 등 권한을 갖고 있다”며 “위력에 의한 간음, 추행죄에서 위력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네 차례의 간음행위에서) 피고인이 어떤 위력을 행사했고 피해자가 이에 제압당할만한 상황이었다고 볼만한 사정이 드러나지 않는다”라고 판단했다.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서 재판부는 당시 수행비서였던 김지은씨가 피해 후에도 자신의 업무를 수행한 점, 김씨가 안 전 지사 및 지인들과 주고받은 메시지 내역, 김씨가 안 전 지사와의 텔레그램 대화 내역을 삭제한 점 등을 들어 김씨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봤다.

또 김씨가 간음행위가 있었던 안 전 지사의 방에서 문을 열고 나가는 등 최소한의 회피와 저항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임에도 간음에 이른 점 등을 들어 “(김씨는) 성적 주체성과 자존감이 낮다고 볼 수 없다”며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아울러 재판부는 안 전 지사의 5회에 걸친 강제추행 혐의에 대해서도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성적 자유가 침해된 강제추행행위가 있었다고 볼만한 증명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지난달 18일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미투운동과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이 주최한 성폭력·성차별 끝장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지난달 18일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미투운동과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한 성폭력·성차별 끝장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재판부 성인지감수성 부족”…여성단체 반발

김씨의 변호인단은 1심 선고 당일 입장문을 내고 “피해자는 법정에서 증인으로 출석해 약 16시간 동안 자신의 피해 사실을 일관되게 진술했다”며 “피해자의 진술을 의심할만한 요소는 없었으며 피해자 진술에 부합하는 주요 증인들의 증언도 나왔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번 판결은) 위력의 인정범위를 넓혀가는 최근 판결 동향이나 피해자의 자발적이고 진지한 동의 없음을 성폭력 범죄의 요건으로 정하고 있는 선진국의 추세에도 역행한다”고 주장했다.

여성단체들도 재판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안 전 지사의 1심 선고공판 당일 한국여성민우회, 불꽃페미액션,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등 여성단체들은 판결이 있었던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항의시위를 열었다. 이날 시위에는 주최 측 추산 500여명이 참여했다.

이어 지난 8월 18일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개최된 ‘성폭력 성차별 끝장 집회’에는 2만여명의 참가자들이 모여 “안희정은 유죄다. 재판부도 유죄다”를 외치며 판결을 규탄했다.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의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배복주 상임대표는 “재판부가 안 전 지사 측 증인을 공개한 반면 검찰 측 증인은 비공개해 정보가 불균형하게 공개됐고 이로 인한 2차 피해가 많았다”며 “재판부에서 소송지휘권을 적절하게 행사해 2차 피해를 줄였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재판부는 재판 과정에서 ‘정조’를 말하거나 ‘피해자다움’을 판단 근거로 삼는 등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했다”고 비판했다.

재판부가 안 전 지사 측의 말만 인용하며 김씨의 증언을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한 데 대해 비판하는 주장도 제기된다.

로스쿨 학생들도 재판부의 판결을 규탄하고 나섰다. 전국법학전문대학원 젠더법학회 연합(이하 전젠연)은 “업무상위력에 의한 추행 및 간음의 구성요건을 기존 대법원 판시보다 엄격하게 해석했다”며 “대법원이 정립한 법리를 자의적으로 변경해 납득하기 어려운 결론을 내린 근거에 대해 책임 있는 답을 내놔야 한다”고 밝혔다.

지난 19일 전국 법학전문대학원 젠더법학회 연합회가 발표한 성명 자료출처 = 전국법전원젠더법학회연합회 페이스북
지난 8월 19일 전국 법학전문대학원 젠더법학회 연합회가 발표한 성명 <자료출처 = 전국법전원젠더법학회연합회 페이스북>

“비동의 간음죄 없어 처벌 못 해”

재판부는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현재 우리나라의 성폭력범죄 처벌체계 하에서는 피해자가 명시적으로 성관계에 동의 의사를 표명한 적이 없고 통상적으로 볼 때 거부나 저항의 정도에 이르지 않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거절하는 태도를 보인 바 있으며, 피해자의 진정한 내심에는 반하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처벌의 대상이 되는 성폭력 범죄라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어 이와 같은 사건의 처벌을 위해 “비동의 간음죄(No Means No 혹은 Yes Means Yes rule)를 도입할 것인지 여부는 입법 정책적 문제이며 근본적으로는 사회 전반의 성문화와 성인식 변화가 수반돼야 할 문제”라며 판결의 책임을 입법부에 돌렸다.

영국, 독일 등의 국가와 미국의 일부 주(州)는 비동의 간음죄를 두고 있다.

영국은 피해자의 명백한 동의가 없을 경우 성폭행으로 판단한다. 상대방에게 분명한 동의를 받았다는 증거를 제출하지 못하면 폭행·협박이 없더라도 성폭행으로 처벌한다.

독일의 경우 2015년 12월 31일 쾰른에서 발생한 집단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이듬해 비동의 간음죄가 통과됐다. 피해자가 몸짓이나 말로 거부의사를 표현했다면 성폭행으로 규정해 처벌하는 것이다.

미국의 뉴욕주는 상대방의 동의 없이 성관계를 맺은 경우와 18세 이상 성인이 15세 미만의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맺은 경우 등을 성폭행으로 규정해 피해자가 가해자의 폭행·협박에 저항하지 않았더라도 성폭행이 성립될 수 있도록 했다.

한국의 경우 안 전 지사의 무죄 선고 이후 비동의 간음죄 입법 마련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정미 의원 등 10명의 의원들은 지난 8월 27일 명백한 거부의사 표시에 반한 강간죄 신설, 협의의 폭행·협박에 의한 강간죄 규정, 저항이 곤란한 폭행·협박에 의한 강간죄 규정,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죄의 형량 상향조정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형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이밖에도 지난 8월 17일 자유한국당 송희경 의원 등 12명이 발의한 형법 일부개정법률안, 같은달 21일 바른미래당 김수민 의원 등 10명이 발의한 형법 일부개정법률안 등 동의 없는 성관계를 성폭력 요건으로 하는 법안이 위원회 심사 중에 있다.

안희정 전 지사의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등 혐의 1심 선고공판일인 8월 14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불꽃페미액션 회원들이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무죄 선고를 규탄하고 있다 ⓒ뉴시스
안희정 전 지사의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등 혐의 1심 선고공판일인 지난 8월 14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불꽃페미액션 회원들이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무죄 선고를 규탄하고 있다 ⓒ뉴시스

여성계·법조계 “입법 문제 아닌 법 해석 문제”

한편 안 전 지사 사건 1심 재판부의 무죄 선고는 입법 미비 문제가 아닌 법 해석 문제라는 지적도 잇따르고 있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차혜령 변호사는 ‘전 충남도지사 안희정의 피감독자 간음 및 추행 사건 제1심 판결 톺아보기’라는 글을 통해 “한국 형사법상 성폭력범죄 구성요건 구조는 피해자-행위 수단(폭행·협박 등)-행위(성기 삽입, 추행 등)로 이뤄져 있는데 이 사건에 적용되는 형법 제303조 제1항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0조 제1항도 피감독자(피해자)-위계 또는 위력(행위 수단)-간음·추행(행위)으로 나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차 변호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재판부는 이 사건의 쟁점인 행위 수단으로서의 위력을 ‘존재’와 ‘행사’라는 두 가지 요건으로 나눠 법률규정에 없는 구성요건인 위력과 간음 사이의 ‘인과관계’를 추가했다”며 “사법부는 입법자가 만들어놓은 법을 적용해야 하는데 이는 사법부가 법을 만든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차 변호사는 재판부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잘못 이해했다고도 꼬집었다. 위력에 의한 간음 자체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범죄이기에 위력에 의한 간음으로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라는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재판부의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어 “비동의 간음죄가 규정돼 있지 않아 피고인을 처벌하기 힘들다는 것이 재판부의 의견인데, 이 사건의 판결은 비동의 간음죄가 아닌 재판부의 위력 판단에 달려있다”며 “비동의 간음죄가 있다고 해도 범죄성립 여부 판단이 가능해지거나 수월해지는 사건은 아니다. 재판부가 비겁하게 입법으로 도망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배복주 상임대표는 “비동의 간음죄가 있어야 처벌할 수 있다는 재판부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대법원 판례를 보더라도 가해자의 위력의 정도가 피해자의 자유로운 의사를 충분히 제압할 만큼 행사되지 않더라도 그 관계에서 위력이 작동해 간음행위에 이르렀다면 피감독자 간음으로 해석할 수 있는 판례들이 있고 유사한 하급심 판례도 있다”고 말했다.

배 상임대표는 “판례라든지 법률적 피감독자 간음의 보호법익 자체가 업무상 낮은 직급에 있는, 피감독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성적 자기결정권, 성적 보호가 모두 보호법익으로 적시돼 있는 부분들을 반영한다면 안희정 사건은 위력 행사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1심 재판부가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미투(#MeToo)를 외치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는 가운데 항소심의 판결이 어떻게 내려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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