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7월부터 장애등급제 단계적 폐지
장애등급제 대체할 ‘종합조사도구’ 발표
장애계 “기존 장애등급제와 다를 바 없어”
시각장애계 “장애유형별 특성 반영해야”

지난 2012년 4월 20일 서울 종로수 보신각 앞에서 열린 420장애인차별철폐 투쟁결의대회 참가자들이 장애등급제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지난 2012년 4월 20일 서울 종로수 보신각 앞에서 열린 420장애인차별철폐 투쟁결의대회 참가자들이 장애등급제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국민명령 1호’로 장애등급제를 없애겠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이에 발맞춰 지난 8월 22일 6단계로 구분하는 장애등급제를 내년 7월부터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중증(현행 1~3급)과 경증(4~6급)으로만 구분하겠다고 밝혔다.

장애인들이 꾸준히 주장하던 ‘장애등급제’ 폐지가 결국 이뤄지게 됐으나 장애계는 오히려 반발하고 있다.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복지서비스 제공 기준으로 적용될 ‘종합조사도구’가 기존의 등급제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복지부는 지난 9월 3일 ‘장애등급제 폐지 시행을 위한 장애인단체 토론회’에서 장애등급제를 대체할 ‘종합조사도구’를 발표했다. 이날 함께 공개된 돌봄지원 종합조사표는 ▲기초상담 ▲복지욕구 조사 ▲분야별 서비스 필요도 평가 등 3개 영역으로 이뤄져 있다.

기초상담 영역은 장애 정도, 가족상황, 주요문제 등을 조사하고 복지지원을 위한 여건과 환경을 파악한다. 복지욕구 조사 영역은 서비스 이용 현황, 희망 서비스 등을 조사해 공공과 민간의 서비스 발굴 및 사례관리에 활용된다. 서비스 필요도 평가 영역에서는 돌봄 지원, 이동지원, 소득 및 고용 등 분야별 서비스 필요도를 점수화해 평가한다. 이 중 서비스 필요도 평가 영역은 ‘돌봄지원 평가도구(이하 평가도구)’를 통해 분야별 서비스 필요도를 점수로 계량한다. 점수가 높을수록 활동지원 서비스 제공량이 높아진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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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활동지원 9.1시간 줄어

문제는 이 평가도구가 다양한 장애 유형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한다는데 있다. 평가도구는 ▲기능제한(최대 532점) ▲사회활동(최대 24점) ▲가구환경(최대 40점)으로 구성돼 있으며 각 영역별, 지표별로 가중치를 반영해 종합점수를 산출하게 된다. 이 중 29개 문항으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기능제한 항목은 신체기능에만 치우쳐 있다.

기존 활동지원 인정조사표에서는 시각 기능과 청각 기능이 각각 분리돼 있어 최대 60점까지 점수를 인정받을 수 있었으나 평가도구에서는 ‘시청각복합평가’ 1개 항목으로 묶여 최대 20점까지만 인정된다. 때문에 시각장애인뿐만 아니라 청각·정신장애인은 점수가 낮게 나올 수밖에 없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이하 한시련) 이연주 정책팀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복지부가 평가도구를 토대로 모의평가를 진행한 결과 시각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가 9.1시간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실질적으로 제도가 시행이 된다면 하락폭이 더 클 것이라고 예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평가 항목들을 보면 거의 요양보호에 가까운 조사표다. 그런데 시각장애인들은 요양보호보다는 활동지원을 원한다”며 “이번에 발표된 평가도구를 보면 기존의 인정조사표의 틀을 유지했다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시각장애인의 특성이나 욕구가 전혀 반영돼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시각장애계는 평가도구 자체를 수정해야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장애 유형별로 조사표를 따로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각장애계는 지난 8월 초에 시각장애인의 특성과 욕구가 반영된 평가도구를 수정 제안한 바 있다.

이 팀장은 “장애 특성을 고려해 종합적으로 접근해야하는데 단순히 행위적인 측면에서의 조사항목으로 돼 있어 시각장애계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수정 제안한 것이 어느 정도 반영될지 지켜보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2016년 3월 23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20대 총선 장애인 정책 요구안 발표 및 투쟁 선포 기자회견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가운데) 상임공동대표가 장애등급제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 2016년 3월 23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20대 총선 장애인 정책 요구안 발표 및 투쟁 선포 기자회견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가운데) 상임공동대표가 장애등급제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뉴시스

장애유형별 서비스 제공 예산 확대돼야

복지부의 종합조사도구 발표에 반발하는 것은 시각장애계뿐만이 아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는 지난 9월 5일 성명을 내고 “정부가 국회로 내놓은 예산안은 참으로 실망스럽고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라며 “예산 반영은커녕 정책에 대한 수용여부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무슨 신뢰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장애등급제 폐지의 목적은 장애인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파악해 개인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지역사회 자립생활을 지원하는 것”이라며 “종합지원체계의 내용으로는 개인별 맞춤은커녕 유형별 욕구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종합조사표는 기존의 활동지원 인정점수조사표를 근거로 사회적 환경요소를 삭감하고 기능평가를 확대한 점수표에 불과하다”며 “한정된 예산으로 그 점수에 가둬 놓고 유형별, 개인별 욕구와 필요도에 맞춰진 서비스의 확대와 개발 없이 장애인들을 점수에 목매달게 하는 것은 장애유형별 갈등만 증폭시켜가고 있다”고 꼬집었다.

전장연 박경석 공동대표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점수를 조정해서 누구는 떨어뜨리고 누구는 붙이는 방식”이라며 “이를 통해 지원이 늘어나는 사람들도 있지만 기존 지원과 대비해 13% 정도의 사람들이 급여가 감소한다. 조사항목이 장애유형별 특성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박 공동대표는 “등급제를 폐지한다고 하면서 개인별 특성에 맞는 서비스와 예산을 마련하지 않고 점수만 조작해 문제가 된다”며 “예산은 확충하지 않고 장애인들을 점수로 줄 세워 갈라치기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짝퉁’ 폐지안으로 장애인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고 제대로 된 장애등급제 폐지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장연은 장애등급제 완전 폐지를 요구하며 지난 9월 18일부터 추석 연휴가 끝나는 같은 달 26일까지 서울역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지난해 3월 21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2017대선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해 3월 21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2017대선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뉴시스

복지부 “유형별 조사표 마련 한계…장애계 요구 반영 노력”

장애계의 반발에 복지부는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합의점을 마련한다는 입장이다.

장애등급제 폐지를 담당하는 복지부 장애인정책국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장애계의 요구사항을 가능한 부분부터 단계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한시련의 수정제안에 대해서는 “한시련의 제안은 시각장애인의 특성을 반영할 수 있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조사표 같은 개념”이라며 “복지부에서 15개 장애유형에 대한 조사표를 각각 만들기는 현실적으로 어렵고 취지에도 맞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만 시각장애인들의 특성이나 지원이 필요한 부분을 반영할 수 있는 지표가 있으면 최대한 반영하려고 검토 중이다”라고 덧붙였다.

장애인 서비스를 위한 예산에 대해서는 “장애인 서비스 지원이 관련 부처, 지자체, 민간 기관 등으로 분산돼있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예산을 확대하거나 추가확보하기 어렵다”며 “다만 장애등급제 폐지와 관련해 예산이 확보된 장애인정책국의 사업들이 있으나 장애계에서 보기에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장애계가 복지부의 종합조사도구 발표에 반발하고 있지만 소통의 끈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닌 만큼 복지부는 의견차를 줄이고 접점을 찾을 계획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등급제폐지는 로드맵을 갖고 단계적으로 추진된다. 만족스러울만한 합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설득을 통해 장애계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할 수 있도록 노력 중이다”라고 밝혔다.

장애등급제 단계적 폐지가 시작되는 내년 7월까지 장애계의 요구가 반영된 대안이 마련될 수 있을까. 말뿐인 장애등급제 폐지가 아닌 장애인의 삶을 개선하는 ‘진짜’ 장애등급제 폐지가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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