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보행환경 여전히 열악해
마구잡이로 설치된 볼라드에 ‘쾅’
무용지물 점자블록에 낭패보기도
관계기관 노력에도 불구 개선 더뎌
당사자 목소리 반영된 정책 필요

훼손된 점자블록 ⓒ뉴시스
볼라드와 훼손된 점자블록 ⓒ뉴시스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장애인들은 지하철이나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에 어려움을 호소한다. 그렇다고 해서 길을 오고 가는 일이 쉬운 것도 아니다.

보도 곳곳에 설치된 볼라드(Bollard)라는 거대한 지뢰가 장애인들의 보행을 가로막곤 한다. 볼라드는 자동차가 인도에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차도와 인도 경계면에 세우는 구조물이다.

비장애인도 자칫 한눈을 팔면 볼라드에 걸려 넘어지거나 부딪히기 십상인데 장애인의 경우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휠체어장애인은 볼라드 충돌 위험에 노출되거나, 이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 보도가 아닌 도로 위를 보행해야 하는 상황에 마주치곤 한다. 시각장애인은 볼라드에 부딪히는 일이 빈번해 정강이에 퍼런 멍이 자주 서려 있을 정도다.

또 길의 방향과 위험성을 알리는 점자블록은 시각장애인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보도 곳곳에는 깨지고 부서진 점자블록이 그대로 방치돼 있거나, 잘못 설치돼 엉뚱한 방향으로 안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보도 곳곳에 숨어있는 위험요소들 탓에 장애인에게는 보행마저도 쉽사리 허락되지 않고 있다.

볼라드 ⓒ뉴시스
볼라드 ⓒ뉴시스

도로 위 암초 ‘볼라드’…관리소홀이 야기한 사고

# 2012년 4월 시각장애 1급 A씨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소재의 한 마트에 물건을 사러 가던 중 횡단보도에 설치된 볼라드에 걸려 넘어졌다. 문제의 볼라드는 단단한 화강암 재질로 높이는 불과 50cm로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매우 낮았다. A씨는 이 사고로 오른쪽 팔목에 전치 5주의 중상과 타박상을 입었다. 

A씨는 ‘영조물의 설치 또는 관리상의 하자’로 인한 사고를 주장하며 그해 8월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에 안산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피고 안산시의 ‘모든 보행자는 보행상에 안전주의를 할 의무가 있다. 시각장애인이라고 할지라도 원고는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안전주의 의무를 태만히 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2심은 원심의 판결을 깨고 ‘시각장애인의 안전하고 편리한 통행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충돌의 위험성이나 충격의 정도를 최소화하는 등 사고 방지를 위한 안전성을 구비해야하는데 안전성을 결여한 설치·관리상의 하자가 있었다’며 안산시에게 책임을 물었다.

ⓒ뉴시스
볼라드 ⓒ뉴시스

현재 볼라드는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시행규칙’에 근거해 보행자가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해 높이 80~100cm·지름 10~20cm·간격 1.5m 내외로 규격으로 설치하도록 규정됐다. 또 볼라드 전방 30cm 지점에는 시각장애인이 인식할 수 있도록 점자블록을 설치하도록 정했다.

하지만 관련 규정이 만들어지기 이전 화강암처럼 딱딱하고 탄력성이 없는 재료를 사용하고 크기도 제각각이던 초기 형태의 볼라드가 여전히 남아있어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이하 한시연)에서 2017년 6월 말부터 9월 말까지 약 3개월간 서울시 동부도로사업소(강남구·수서구·강동구·송파구) 관할 교차로 499개소 총 2169개 횡단보도의 점자블록과 볼라드 현장 조사를 실시한 결과 볼라드가 설치된 횡단보도 725개 중 17.7%만 올바르게 설치됐고 나머지 82.3%는 부적절하게 설치된 것으로 확인됐다.

한시연은 볼라드가 시각장애인에게 상당히 큰 보행 방해 요소로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한시연 이진원 편의증진팀장은 “현재 많이 개선되고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여전히 불법 설치된 볼라드가 남아 있어 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 보행상의 흉기로 여겨질 정도”라고 말했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지체장애인 박현(44)씨도 볼라드로 인한 보행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박씨는 “밤에는 볼라드가 잘 보이지 않아 부딪히기도 하고, 횡단보도에서는 전동휠체어 한 대가 내려갈 수 있을 정도의 폭으로 경사로를 만들어 놨는데 볼라드로 인해 그 폭이 줄어들기도 한다. 또 규정과 용도에 맞게 볼라드가 설치돼야 하는데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경우도 많다”며 “과연 교통약자를 위한 안전지대라고 볼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고 꼬집었다.

보행자의 안전을 위한 설치 규정이 마련됐음에도 불구하고 주먹구구식으로 세워진 볼라드가 여전히 남아있어 장애인의 안전사고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맨홀이 가로막은 점자블록 ⓒ뉴시스
맨홀이 가로막은 점자블록 ⓒ뉴시스

갈 길 잃은 ‘점자블록’…깨지고, 부서지고

# OOOO아파트 정문과 후문 쪽에 시각장애인 점자블록이 떨어져 그대로 방치돼 걷다가 걸리고 넘어지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저렴한 자재를 사용하는지 점자블록이 뒤틀리고 깨지며, 하나 보수하고 나면 다른 하나가 망가지는 식이다. 품질 좋은 제품으로 교체해 주길 바란다.

# OO 앞 버스 정류장이 시각장애인용 점형블록 위를 막고 세워져 있다. 새로 만들어진 버스 정류장인 듯하다. 길을 이용하는 시각장애인 입장에서는 직진 표시를 따라갔는데 벽이 가로막힌 무척 당황스러운 상황이 될 거라고 생각된다.

# OOO동 주민센터 가는 길의 우체국 오른쪽에 있는 보도블록을 따라 길을 걷다 보면 일자로 직진을 안내해야 할 점형블록이 잘못 설치돼 지하주차장으로 유도하게끔 놓여있다. 잘못 안내된 주차장을 따라 내려가다 넘어지면서 출구로 올라오는 차량과 부딪혀 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

도로 위 골칫덩어리는 비단 볼라드뿐만은 아니다.

시각장애인이 안전하게 도로를 보행할 수 있도록 돕는 편의시설인 점자블록은 ‘장애인, 노인, 임산부 등의 편의증진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에 의거해 계단·장애인용 승강기·화장실 등 시각장애인 유도 필요성이 요구되거나, 위험한 장소의 0.3m 전면, 선형블록이 시작·교차·굴절되는 지점에 설치돼야 한다.

점형블록은 위치 경고용으로 보행 동선의 분기점, 대기점, 시발점, 목적지점 등의 위치를 표시하며, 장애물이나 위험지역을 경고하는데 사용한다. 그 형태는 가로 30cm×세로 30cm 안에 일정 규격에 맞추어 36개의 원뿔절단형으로 구성된다.

선형블록은 방향 유도용으로 보행동선의 분기점, 대기점, 시발점에서 목적 방향으로 일정한 거리까지 설치하여 정확히 직선 방향을 잡는데 사용된다. 끝나는 지점은 점형블록으로 마감해 더 이상 연장되지 않는다고 알려야 한다. 선형블록의 형태는 가로30cm×세로30cm 안에 4개의 원뿔절단형직선으로 구성된다.

ⓒ투데이신문
깨진 점자블록 ⓒ투데이신문

시각장애인의 ‘길잡이’가 돼줘야 할 점자블록은 정확한 위치에, 규정에 적합한 설치뿐만 아니라 이후 유지 및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도로 곳곳에는 망가지고 엉뚱하게 설치된 점자블록들이 그대로 방치돼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애초 잘못된 설치와 관리 소홀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올해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실시한 점자블록 관련 민원 1672건 분석 결과에 따르면 점자블록 관련 민원의 월평균 추이가 2015년 58.7건에서 2017년 39건으로 감소하다가 2018년 46건으로 다시 증가 추이를 보였다.

민원 유형별로는 ‘점자블록 파손 등에 대한 신고’가 1020건(61.0%)으로 가장 많았으며, ‘점자블록을 가리는 것에 대한 신고’ 185건(11.1%), ‘잘못 설치된 점자블록 재설치 요구’ 146건(8.7%), ‘미설치 지역 설치 요구’ 130건(7.8%), ‘각종 질의·건의 등 기타’ 191건(11.4%)이 뒤를 이었다.

유형별 세부 내용을 분석한 결과 ‘점자블록 파손’이 515건(50.5%)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며, ‘점자블록 침하’ 등은 162건(15.9%), ‘점자블록 이탈’ 45건(4.4%), ‘점자블록 들뜸’ 35건(3.4%) 순으로 조사됐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당사자 목소리 빠진 정책…실행마저도 ‘느릿느릿’

각 지자체나 관계기관에서 볼라드나 점자블록 등 보도 위 장애인 이동권 문제에 대해 인지하고 개선안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 2012년 경기도는 기준에 어긋난 볼라드의 대대적인 정비를 하겠다고 밝혔다. 2016년 강원 동해시도 불법 볼라드 300여개를 2019년까지 정비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올해 5월 대전시도 1만6970여개 볼라드 가운데 기준에 어긋난 5010개 전면 철거 방침을 밝혔다.

권익위는 위 분석 결과를 토대로 보행 편의시설을 관리하는 자치단체 등 소관 기관에 통보해 파손 또는 잘못 설치된 점자블록, 다른 시설물에 가려 제 기능을 못하는 점자블록 등에 대한 점검과 적극적 조치를 시행하도록 요청할 계획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적용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리고 있다는 평가다.

한시연 이지원 팀장은 “기본적으로 이전에 설치된 볼라드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법의 한계가 존재하긴 하지만 예산을 마련해서라도 잘못된 것은 바꿔 나가야 한다. 그동안 이 문제를 계속해서 방치해오던 지자체가 늦었지만 최근에야 ‘잘못된 볼라드를 순차적으로 없애겠다’고 대응에 나서기 시작했다”며 “다만 그 비용이 큰 탓에 움직임이 더딘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볼라드의 문제점이나 교체 필요성에 대해 지자체가 인식하고 있는 건 다행”이라며 “볼라드는 편리함보다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보다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점자블록에 관해서는 “건물의 경우 사용승인 전 장애 전문기관이 해당 건물에 장애인 편의시설이 제대로 갖춰졌는지 확인하면 그제야 관련 부서에서 승인이 떨어지는데 보도는 예외다”라며 “보행전문가를 거치지 않고 시공사 측에서 확인만 되면 승인이 떨어져 설계 단계에서 장애인 고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마찬가지로 유지관리 측면에서도 설계한 측에서 평가하다 보니 잘못된 내용이 답습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마련됐음에도 불구하고 장애 당사자나 전문가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아 방임적으로 설계될 수밖에 없고 권익위 등에 민원제기까지 이뤄지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끝으로 이 팀장은 무엇보다 도로 위 장애인 이동권 문제 전반에 관해 당사자들의 의견이 반영되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이 팀장은 “점자블록 설치 및 운영, 점검 방법을 정한다면 장애 특성에 대해 아무거도 모르는 토목박사나 건축분야 교수보다는 기본부터 잘 아는 시각장애인 당사자나 관계 전문가의 의견이 반영돼야 한다”며 “이는 비단 시각장애인만의 경우는 아니다. 모든 장애와 관련한 전문 기관이 존재하고 이들이 정책결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해야만 장애인 당사자의 이동권 확립이 가능해진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자체 차원에서 이들로 구성된 전문기관이나 위원회가 구축되면 좋을 것 같다”고 부연했다.

또 “기존에 있는 규정이나 지침이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장애 관련 시스템 연구개발도 함께 이뤄져야 하는데 한국은 열악한 상황”이라며 “예를 들어 장애인을 위한 연구개발 사업과 최근에 주목받는 IoT(사물인터넷)를 결합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