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한종선 대표
2012년 진상규명 1인 시위 시작
316일째 국회 앞 노숙농성 이어와
‘진실의힘’에서 인권상 수상하기도
“특별법 통과 때까지 농성 이어갈 것”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한종선 대표 ⓒ투데이신문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한종선 대표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형제복지원에서의 삶은 ‘짐승의 삶’이었습니다.”

지난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만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이하 피해자모임)’ 한종선 대표는 형제복지원 강제수용 기간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곳이었다는 말이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당시 내무부 훈령 410호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조치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 지침’(이하 내무부 훈령 410호)에 근거해 ‘부랑인 단속’이라는 명목으로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장애인, 무연고자를 비롯해 일반인을 강제 수용·불법 감금한 일이다. 형제복지원에서는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강제노역·폭행·성폭력·살인 등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형제복지원 자체 기록으로 확인된 사망자만 513명이다.

국회 앞에서 317일째 노숙 농성을 벌이며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특별법 입법을 촉구 중인 한 대표는 지난 13일 있었던 법무부 검찰개혁위원회의 형제복지원 사건 비상상고 권고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들이 축하받아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비상상고 권고 이후 축하 연락을 많이 받았는데, 이는 피해자들이 축하받을 일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들이 축하받아야 할 일이에요. 대한민국은 민주국가고 법치국가인데, 법치국가에서 법 적용이 잘못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면 판례로 남아 계속 잘못된 판결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잖아요. 이를 바로잡겠다는 것은 국민들 모두에게 좋은 일이죠.”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은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뒤 특수감금, 특정경제가중처벌법 위반(횡령), 초지법 위반, 건축법 위반, 외국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그러나 1989년 7월 대법원은 이 사건의 재상고심에서 “피해자들의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취침시간에 자물쇠로 철문을 잠그고 행동을 제한한 것은 사회복지사업 등 법령에 의한 정당한 직무로서 감금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며 특수감금 혐의를 무죄로 판단하고 나머지 혐의만을 유죄로 인정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이 판결이 내려진 지 29년 만에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한종선 대표 ⓒ투데이신문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한종선 대표 ⓒ투데이신문

‘위탁종용’으로 강제수용

한 대표는 9살인 1984년 10월 형제복지원에 입소했다. 당시 부산은행 뒤편에서 구두점포를 운영하던 아버지가 학교에서 돌아온 한 대표와 누나에게 ‘가방 내려놓고 따라오라’고 했다. 아버지는 남매를 이끌고 부산 시내를 구경시켜주면서 옷과 신발도 사주고 극장에서 영화도 한 편 보여줬다. 그리고 그날 오후 8시쯤 아버지는 동광파출소에 들러 “아버지 어디 잠깐 다녀올게. 누나랑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고 한 뒤 사라졌다. 잠시 후 형제복지원 차량이 파출소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남성 2명은 경찰 문서에 사인하고 서류를 주고받더니 한 대표와 누나를 차에 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위탁종용일 가능성이 99%예요. 분명히 아버지가 ‘파출소에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형제복지원이 경찰과 합의 하에 우리(한 대표와 누나)를 납치한 거잖아요. 어른이 돼서 당시 상황을 추정해 보면 아버지가 ‘국가에서 지원하는 좋은 복지원이 있다. 먹여주고 공부도 시켜주는 곳이 있으니 아이들을 위탁하라’는 말을 듣고 우리를 맡겼을 가능성이 가장 높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서류까지 조작해가면서 우리를 끌고 갈 이유가 없잖아요.”

형제복지원의 신상기록카드에는 ‘6년 전 어머니가 가출하고 아버지마저 3일째 집에 돌아오지 않아 84년 10월 16일 인근 주민이 경찰에 신고해 당일 동광파출소 의뢰로 누나와 함께 본원에 보호됐다“고 적혀 있다. 입소 경위가 조작된 것이다.

형제복지원은 ‘부랑인 선도사업’이라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감금했다. 일하지 않고 구걸하는 부랑인들을 계도해 사회에 환원시킨다는 것인데, 형제복지원은 ‘부랑인’들을 사회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한 대표는 “이건 선도사업이라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부랑인 선도사업은 정부가 엄청난 금액을 지원하는 국가사업이었어요.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두환 정권이 선택한 거죠. 내무부 훈령은 경찰 훈령인데, 경찰이 총동원돼 사람들을 감금해 실적을 올려 좋은 평점을 받고, 박 원장은 수용자 한 명당 얼마씩 지원금을 받은 거예요.”

경찰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 형제복지원은 지원금을 받기 위해 시민들을 강제로 감금하고 사회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다는 것이다.

지난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규명 특별법 통과 촉구 노숙농성장 모습 ⓒ투데이신문
지난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규명 특별법 통과 촉구 노숙농성장 모습 ⓒ투데이신문

강제노역에 시달려…풀어주고 다시 감금하기도

형제복지원에서 사회로 나가는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입소 7~8년차가 되면 사회로 나가는 ‘환송식’ 같은 행사를 하고 나갔다.

학교를 가는 아이들은 근처의 개금분교로 가서 수업을 듣고, 나머지 소대원(수용자)들은 볼펜을 조립하는 등의 노동을 했다. 그러나 아동들에게는 수당이 나오지 않았다. 어른들은 수당을 받았지만, 그마저도 담배 4~5개비 정도를 받았을 뿐이다. 그 안에서 철공·목공 등을 하는 성인에게는 월급이 지급됐지만, 바로 준 것은 아니고 환송식 이후 사회로 나갈 때 받는 15만원 정도가 전부였다.

“그 당시 평균 월급이 30~40만원 정도였던 걸로 아는데 형제복지원에서 7~8년 일한 사람들은 고작 15만원을 받고 나갔어요. 적게 받는 사람은 7~8만원 정도를 받았고요. 그 돈으로 어떻게 집을 구하고 생활할 수 있겠어요. 그 돈을 받고 나간 사람들이 저녁에 술도 한잔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술을 먹고 있으면 형제복지원 차량이 와서 부랑인이라며 또다시 잡아가요.”

한 대표와 함께 노숙농성을 하고 있는 피해자모임 최승우 활동가는 “당시 형제복지원 차량이 부산 전역을 수시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잡아갔다”며 “형제복지원에 있다가 사회로 나온 사람이 보이면 ‘저 XX 형제복지원에 있던 놈이잖아’라고 다시 잡아갔다”고 증언했다.

형제복지원에서는 같은 소대원이 ‘조장’ 완장을 차면서 가해를 일삼는 악마로 변하기도 했다. 조장이 소대원들을 때리고 통제하지 않으면 다시 피해자 입장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형제복지원이 절대 무너지지 않을 성(城)이라면, 그런 가해도 용서되는 곳이었어요. 폭력에 이의제기하는 사람도 없고 사람을 때려죽여도 처벌받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가혹하게 변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형제복지원에서의 삶을 ‘짐승의 삶’이었다고 표현합니다.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곳이었어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한종선 대표 ⓒ투데이신문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한종선 대표 ⓒ투데이신문

피해당사자 목소리 내는 일 쉽지 않아

한 대표는 지난 6월 재단법인 ‘진실의힘’에서 선정한 제8회 인권상 수상자가 되기도 했다. 진실의힘은 ‘피해 당사자가 주체적으로 진실을 밝히는 출발점임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또 다른 국가폭력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연대의 힘이 되고 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한 대표 역시 피해당사자로서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2012년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하기까지 5년간 고민했다.

2007년, 한 대표는 전북 군산에서 장병숙소를 짓는 공사장에서 일을 하던 중 허리를 다쳤다. 이후 산업재해를 신청했지만 거절됐다. 일을 하기 힘들어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알아보던 중 아버지와 누나가 정신병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동사무소에서는 내가 아버지의 부양의무자가 되니 ‘수급비를 받으려면 일을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아버지와 누나가 정신병원에 있게 된 이유는 국가폭력 사건인 형제복지원 사건이에요. 그런데 진상규명도 없이 피해자들을 사회로 돌려 보내놓고 피해자 부양은 나한테 책임지라는 거죠. 생각해보니 화가 나서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분명히 나와 같은 피해생존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이를 바로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 피해자들에게 ‘우리가 그 당시 왜 잡혀갔는지는 밝혀야 하지 않겠느냐’고 주장한다면 과연 동참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 피해자들마저 반대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한 대표는 결국 5년간의 고민 끝에 2012년 국회 앞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진상규명을 촉구하면서 한 대표가 가장 많이 느낀 것은 ‘배우지 못한 사람에 대한 차별’이었다. 무식한 사람으로 낙인찍고 믿지 못할 이야기로 치부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았어요. 그래서 검정고시를 통해 고졸 학력을 얻었죠. 검정고시 공부는 전혀 하지 않고 그저 살면서 얻은 지식으로만 시험을 봐서 통과했어요. 그렇다면 고졸이라는 간판만 달았지 ‘배우지 못했다’는 건 똑같잖아요. 자기들이 정한 기준과 시각으로 바라보는 차별이고 억압인 거죠. 그 억압에 저항했을 뿐입니다.”

지난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규명 특별법 통과 촉구 노숙농성장에 '노숙농성 315일째'라고 쓰인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투데이신문
지난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규명 특별법 통과 촉구 노숙농성장에 ‘노숙농성 315일째’라고 쓰인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투데이신문

형제복지원 사건, 가장 큰 책임은 국가에

한 대표는 형제복지원 사건의 가장 큰 책임은 국가에 있다고 말한다. 부랑인을 잡아 가두는 사회정화사업 정책을 만들어내지 않았더라면 형제복지원 사건이 생기지 않았을 거라는 얘기다.

“정부는 부랑인을 선도한다는 명분 하에 국민의 세금으로 어마어마한 예산을 투입했어요. 그 돈으로 박 원장은 더 많은 사람들을 잡아 올 수 있었던 거고요. 박 원장은 국가 정책을 따라 충실하게 자기 욕망을 채운 사람일 뿐이에요. 최종 책임은 언제나 정부, 국가에 있습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책임은 관할 기관이었던 부산시에도 있다. 지난 16일, 오거돈 부산시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너무 늦었지만 부산시를 대표하는 시장으로서 피해자와 그 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오 시장은 “형제복지원 사건은 무고한 시민에 대한 감금과 폭행, 협박, 강제노역 등이 자행된 참혹한 인권유린이었다”며 “당시 부산시는 복지시설에 대한 관리감독 책임을 소홀히 해 시민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고 덧붙였다.

한 대표는 부산시의 사과를 좋게 평가하면서도 ‘일방적 사과’라고 질타했다. 기자회견 이틀 전인 14일 오후 늦게서야 ‘사과 기자회견이 있으니 나오시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부산시의 태도를 꼬집은 것이다.

“31년 만에 공공기관에서 분명하게 사과 의사를 밝힌 것은 좋게 평가해요. 하지만 사과가 일방적이어선 안 됩니다. 가해자 입장에서 무조건 피해자를 찾아가서 ‘내가 미안해. 용서해줘’라고 하는 건 사과가 아닙니다. 사과의 일정을 조율했어야 해요. 기자회견 이틀 전에 일방적으로 통보하니 몇 분을 모시고 갈지 조율할 틈도 없었어요. 오 시장의 사과문이나 입장문이라도 먼저 전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조차 거절당했습니다. 부산시가 진상규명에 앞장서고 지난 과오를 바로잡아갈 때 신뢰가 생기고 용서해 줄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한종선 대표 ⓒ투데이신문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한종선 대표 ⓒ투데이신문

진상규명 특별법 통과될 때까지 농성 이어갈 것

한 대표는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이 피해자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증언자·기록자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삶을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해자로만 산다는 것은 ‘불쌍하다’는 전제가 깔려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 거죠. 그런데 피해자가 나서서 ‘나는 생존자로 살 테니 같이 해주십시오’라고 먼저 말한다면 내가 힘들다고 할지라도 손 내밀기 전까지는 손잡아주지 말라는 겁니다. 피해자로 머무는 게 아니라 기록으로 남기고 피해를 증언하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갈 겁니다.”

오 시장의 사과와 검찰개혁위의 비상상고 권고로 진상규명에 한 발짝 더 다가선 시점이다. 한 대표는 진상규명을 위한 ‘큰 물결’은 만들어졌다고 평가했다.

“7년째 진상규명 활동을 하면서 큰 물결은 만든 것 같아요. 언젠가는 진상규명이 될 겁니다. 그런데 4대강에 보를 세우면 그 큰 물결도 막히고 ‘녹조라떼’가 되잖아요. 지금이 그런 상태예요. 빨리 보를 열어야 해요. 진상규명을 위한 큰 물결을 빨리 바다로 흘려보내서 피해자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해요. 피해자들이 지금이라도 재능을 발굴하고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죠.”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 등 의원 73명이 지난 2016년 7월 발의한 ‘내무부 훈령 등에 의한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규명 법률안(이하 특별법)’은 아직까지 상임위원회 심사 단계에 계류 중이다. 한 대표는 특별법이 통과돼야 인권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권에는 여야가 없는데 계속 서로 대립하면서 특별법이 통과되지 않는데 대해서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어요. 자국민을 핍박하고 감금했던 역사를 반성해야 인권선진국으로 거듭날 수 있어요. 그런데 이를 미루면서 어떻게 다른 나라에 인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북한인권법 타령이나 하고, 일본에 사과하라고 어떻게 요구할 수 있겠느냔 말이죠. 특별법 통과로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한 대표는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될 때까지 국회 앞 투쟁을 이어갈 생각이다.

“최소한 우리가 왜 잡혀갔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국가가 먼저 나서서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합니다. 국회가 한 번쯤은 피해자 입장에서 생각해달라는 겁니다. 농성은 특별법이 통과될 때까지 이어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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