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연의 그린라이트㉟] 남들이 뭐라든
[안소연의 그린라이트㉟] 남들이 뭐라든
  • 안소연 칼럼니스트
  • 승인 2018.10.04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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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소연 칼럼니스트▷성우, 방송 MC, 수필가▷저서 안소연의 MC 되는 법 안소연의 성우 되는 법
▲ 안소연 칼럼니스트
▷성우, 방송 MC, 수필가
▷저서 안소연의 <MC 되는 법> <안소연의 성우 되는 법>

얼마 전, 남북 정상이 백두산 천지에 오른 소식에 내가 천지에 올랐던 20대의 여름이 떠올랐다.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기 직전이던 1992년 7월, 성우협회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배우들과 한중합작 라디오드라마 제작을 하기위해 중국을 방문했다. 함께 드라마를 제작하고 그쪽 분들과 친교의 시간을 갖는 것 외에도 만리장성, 자금성 등의 유명 관광 코스를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당연히 백미는 백두산 천지였다.

개혁개방을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1992년의 중국은... 아, 알 사람은 알 것이고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 아무튼 그 끔찍한 여행의 모든 피로와 짜증을 씻은 듯 사라지게 해준 것은, 백두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천지의 장엄함이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의 가슴까지도 탁 틔워주는 장관...

백문이 불여일견인 것 딱 한 가지를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천지를 꼽겠다.

마침 과학 숙제를 하던 아들이 한여름 백두산에 만년설이 있냐는 질문을 해 그 시절 사진첩을 펼쳤다.

엄마가 천지에 오른 사진을 보여주지!

그 사진들 속에서 나는 한 청년을 발견했다.

나와 다정히, 그러나 예의바르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그는 가이드를 맡았던 조선족 청년이다. 당시 성공한 사람의 상징이던 벽돌크기 모토롤라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던 그는 막 불기 시작한 한중 교류 바람에 제일 먼저 올라탄 성공한 사업가였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인상이 좋았다. 총명한 사람이었고 외국인이지만 말이 통하는데다 나이도 나와 비슷했다. 여행을 함께 간 분들이 죄다 높은 연배의 선배님들이어서 무거운 물건(이를테면 30인분의 김치와 고추장 같은)을 혼자 도맡아 들어야했고 말이며 행동거지도 조심 또 조심하던 나로서는 가이드가 내 또래라는 것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렇게 일주일을 붙어 다니다보니 그와 나는... 뭐랄까... ‘사랑에 빠졌다’ 같은 관계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없었다. 7박 8일이라는 시간은 물론이고 그 빡빡한 일정에서 둘만의 시간을 만든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게 가슴만 태우다 마지막 밤이 되고 말았다. 누가 먼저 말을 꺼냈는지 모르지만 그와 나는 용기를 내어 밤늦게 만나기로 했다. 모두 잠든 후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차를 마시자고. 그날 밤 우리는 차 한 잔을 마신 후 근처 공원으로 갔다.

사회주의 국가의 밤 공원은 엄청 안전하다. 노숙자도 불량배도 없다. 오로지 쏟아지는 별빛 달빛(아마 그랬겠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뿐 온 세상에 그와 나 단 두 사람뿐인 것 같았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그와 나는 밤새 노래를 불렀다. 주로 그가 부르고 내가 들었던 것 같다. 나는 그가 골라 준 편안한 나뭇가지 위에 밤새도록 앉아 있었다. 그는 그 나무 밑에서 노래를 불렀다. 지치지도 않고 밤새도록.

여름은 밤이 짧다. 어느새 동이 터왔고 공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나타나 태극권을 하거나 무도 연습을 시작했다. 더는 있을 수 없어 우리는 아쉽게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아, 이것이 마지막이라니.

그런데 그 이른 새벽의 호텔 로비가 우리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내가 납치됐다고 괴소문이 났었던 것.

아, 그날 아침 나는 그와 애절한 이별의 슬픔을 누리지도 못하고 밤새 외간 남자와 나돌아 다닌 행실 나쁜 여자아이가 되어버린 현실과 싸워야했다.

서울로 돌아와 그와 몇 번의 통화를 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 모든 떨림과 설렘이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그가 좋거나 그립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니 나는 주변의 시선을 과하게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자유로운 척, 내 주장이 강한 척 살지만 사실은 소심하고 남 눈치보고 혹여 라도 내 평판이 나쁘게 날까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사람...

그와의 아름다웠던 기억보다 선배들의 평판에 더 마음을 쓰느라 그 꿈결 같았던 아름다운 여름밤을 완전히 잊고 살았다.

이번 생에서는 힘들겠고... 혹시라도 다음 생에 그런 짧은 로맨스를 또 만나게 된다면 남들이야 뭐라건 내 사랑에 집중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위의 다짐을 다섯 글자로 줄이면

뒤늦은 후회!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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