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인해 사망한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509호실 ⓒ뉴시스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인해 사망한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509호실 ⓒ뉴시스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전두환 정권 시절 발생한 이른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해 당시 청와대가 개입한 정황이 포착됐다.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위원회(위원장 김갑배)는 11일 대검 진상조사단(이하 조사단)으로부터 받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조사 결과를 토대로 이 같은 내용을 밝혔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란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2단 소속이던 경찰 5명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당시 대학생이던 박종철씨를 물고문으로 질식사하게 한 사건이다.

조사단은 해당 사건 발생 다음날 국가안전기획부장, 법무부장관, 내무부장관, 치안본부장, 검찰총장 등이 ‘관계기관대책회의’를 가졌고 이후 검찰의 직접 수사가 중단, 치안본부가 이를 맡게 된 사실을 확인했다.

조사단은 같은 해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측이 은폐 의혹을 폭로하기 전까지는 검찰에서 공범에 대한 추가 수사를 시행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같은 장기간의 수사 착수 지연에는 관계기관대책회의를 통해 전해진 청와대 및 대통령의 영향과 지시 때문이라고 추정된다는 게 조사단의 설명이다.

정구영 당시 서울지검장은 지난 8월 8일에 열린 조사단 면담에서 “검찰종장이나 법무부장관이 애초 나에게 부탁하듯 말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청와대의 뜻이라고 알아들었다”며 “검찰총장이 계속해서 ‘일주일만 미루자’고 했고 그렇게 일주일, 또 일주일 시간이 흘렀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발표가 오히려 속 시원했다”고 말했다.

당시 폭력에 연루됐다고 알려진 5명 중 구속된 피의자는 단 2명이다. 구속된 2명의 고문경찰관이 심경의 변화로 추가 공범을 밝히려 했으나 치안본부 대공5차장 등 간부들이 특별관리하던 자금 2억을 이용해 회유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 실제로도 고문경찰관의 가족들이 치안본부장과 간부들로부터 위로금, 생활비 등 명목의 비용을 지원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과거사위는 “사건 발생 초기 검찰이 치안본부의 조작 및 은폐 시도를 막아내고 부검을 지시해 사인을 밝혀낸 점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면서도 “그러나 검찰은 정치적 고려를 우선, 정권 안정을 위해 치안본부가 사건을 축소 및 조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치안 간부들의 범인 도피 행위를 의도적으로 방조했다”고 심의했다.

과거사위는 이를 토대로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립과 검사 개개인의 확고한 직업적 소명의식 정립을 위한 제도 및 대책 수립 등을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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