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그 장면은 코미디 같았다. 한국유치원총연합회 비상대책위의 간부이자 현직 유치원 원장이 국정감사에 불려 나와 헤드랜턴을 쓰는 순간이었다.

아이들 교육에 쓰여야 할 돈이 유치원 원장 개인의 주머니로 빠져나간 사건을 다루는 자리였다. 그 간부는 영세한 원장들이 이른 아침부터 몸소 일한다는 걸 주장하려 헤드랜턴을 썼다. 한유총 측은 제도미비와 경영난을 말하며 자신들을 범죄자로 몰지 말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일말의 책임이 있는 측의 모습이라기엔 매우 엉뚱했다.

더 코미디 같은 상황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헤드랜턴 퍼포먼스를 벌인 그 간부가 입고 나온 셔츠가 한 벌에 60만원대의 고가 브랜드였다는 지적이 나왔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파트와 차를 팔아 교사들 월급을 마련했다던 주장을 무색케 하는 가격이었다. 

많은 부모가 밤 늦게까지 맞벌이를 하며 자식에게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해 몸과 마음을 저며낸다. 그렇게 번 돈으로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따듯한 밥 한 수저에 고기 한 조각을 올려준다. 평범한 부모들에겐 음식을 가득 물고 오물거리는 아이의 작은 입을 보는 행복을 위해 돈이 존재한다. 그러니 유치원 원장들이 내 자식에게 쓰여야 할 돈을 사적으로 쓴 것도 모자라, 그 책임을 회피하려 변명하는 자리조차 고가의 옷을 입고 나왔다는 소식에 여론이 들끓었다.

하지만 상황은 곧바로 반전 코미디가 됐다. ‘동네 구멍가게’ (아마도 작은 옷가게)에서 산 싸구려 옷이라는 당사자의 반론과, 자사에서 판매하는 옷이 아니라는 해당 브랜드 관계자의 발언이 기사화됐다. 종합해 보면 그 셔츠는 유명 브랜드 옷을 흉내 낸 모사품 즉 흔히들 ‘짝퉁’이라 부르는 가짜였다. 

이 소란은 일종의 블랙 코미디 같다. 여기엔 사립유치원 비리문제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의 구조적 양상이 다 담겨 있다. 구멍가게라 불릴 정도로 영세하여 점원조차 없을 것 같은 그 옷가게의 주인을 떠올려 본다. 

‘짝퉁’을 팔아 번 돈으로 옷가게 주인은 자식들에게 따듯한 밥 한 끼를 먹였을 것이다. 엄연한 불법이지만 그 정도를 가지고 야박하게 굴면 먹고 살기 힘들다는 묵계가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 공장에서 나온 그 옷을 여기저기 실어주고 번 돈으로 트럭운전사도 자식에게 밥을 먹인다. 그 옷을 만든 공장의 사장도 그 돈으로 자식을 키운다. 디자인을 흉내 낸 옷을 만든 종업원도, 종업원들의 단골 식당 주인도 그 돈을 받아 자식을 키우고 입히고 재우고 먹인다. 

그들을 비난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남들의 버려진 양심은 쉽게 입에 올릴 수 있어도 스스로에게 엄격하기란 힘들다. 자신이 아르바이트 하는 옷가게에서 ‘짝퉁’ 옷을 판다면 당장 일을 그만 둘 것인가. 겨우 싸구려 옷일 뿐인데 내가 몰던 트럭을 세울 것인가. 재봉하던 미싱을 멈추고 퇴사할 것인지, 그런 돈을 받고서 내가 만든 음식을 내놔야 하는 것인지, 일일이 따져가며 사는 게 거의 불가능한 대한민국이다. 

불의를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 그 임계치의 사회적 합의가 현실 도덕의 보이지 않는 기준이 된지 오래다. 스마트폰이, 자동차가, 인터넷이, 가전제품이, 옷이, 밥이, 반찬이 그 기준을 줄타기하며 생산되고 판매되고 유통된다. 우리는 단 십분도 깨끗하고 정정당당하게 살 수 없게 됐다. 그렇게 세상과 타협한 돈으로 아이를 키우고 유치원에 보낸다. 크고 작은 타협의 직조가 반복되어 사립유치원 공금비리라는 무늬를 만들어낸다. 

웹하드 업계 굴지의 업체 회장이 퇴사한 전 직원을 회사에 불러 무참히 때리는 동안, 그 무늬는 사무실에 있던 수많은 현직 사원들 누구도 폭행을 말리지 않는 장면이 되어 돌아왔다. 뿌리 내린 바위처럼 꿈쩍 않는 직원들의 뒤통수 저편으로 보이는 모니터에는 그들의 끼니가 한 줄 한 줄 코딩 되고 있었다.

저작권침해 영상물과 불법촬영영상물(몰카)의 유통으로 떼돈을 번 이는 가해자인 사업가지만, 그런 사업이 별 문제없이 순항한 것은 직원들의 협력과 사회의 방기 없이는 불가능하다. 비약하자면 내 자식에게 먹일 밥이 필요하다는 이유 때문에 몰카 피해자의 고통은 사회로부터 상시 외면됐다. 그 결과 영상물을 지워주는 디지털 장의사의 수익으로 직결되는 악의 순환 사업이 아무런 방해없이 지속됐으며, 결국 탈출구를 찾지 못한 몰카 피해자의 자살로도 이어진다. 웹하드 업체 회장의 폭행은 이를 방조한 사회의 평범한 표정이다. 

사람들은 적폐청산을 우리시대의 최고가치처럼 내세운다. 하지만 우리가 먹고 사는 여정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적폐의 지도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것을 현실이니 받아들이자고 했을 때, 사안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고 죄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한유총 측은 ‘범죄’라는 단어를 그리 거부했던 것이다. 

물론 더 바르게 법을 지키며 살아온 이들을 위해서라도 비리 행위자들은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당장 먹고 살기 위해 오늘도 적폐의 지도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또다른 얼굴이다. 티브이 광고에 나오는 현대인의 생활필수품들을 쓰는 동안 이는 변치 않는다. 그러므로 문제의 원인을 몇몇 인물들의 양심문제로 타자화 시키는 건 꽤나 무책임하고 비겁한 일이다. 

생각해 보면 굳건한 양심이나 완벽한 제도가 해결책은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에게 양심의 줄기는 연약하다. 제도가 잘 닦여져 있어도 비리와 탈법은 늘 가능했다. 사람들이 염원하는 보다 공정하고 행복한 사회는, 그러지 못했던 구세계를 지탱해 오던 우리가 고통을 겪어야만 현실화된다. 그러므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고통을 감내할 준비가 돼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 용기를 내기 전까지는, 다들 이 거대한 블랙코미디의 공모자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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