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첫발 내디딘 ‘감정노동자 보호법’
고객 폭언·폭행 등으로부터 노동자 보호
당사자 기대 컸지만, 현장 체감은 아직
속속들이 드러난 맹점에 우려도 커져
실효성 판단 ‘시기상조’…더 지켜봐야

지난 2014년 4월 10일  서울 중구 명동 예술극장 앞에서 열린 감정노동자 보호 대국민 캠페인 ⓒ뉴시스
지난 2014년 4월 10일 서울 중구 명동 예술극장 앞에서 열린 감정노동자 보호 대국민 캠페인 ⓒ뉴시스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지난 2015년 인천 대형 백화점에서 수리비 부담을 두고 고객과 마찰을 빚던 점원 2명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객에게 사과한 이른바 ‘인천 백화점 점원원 무릎사죄 사건’은 다수 국민의 공분을 샀다.

‘인천 백화점 점원 무릎사죄 사건’을 포함해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 ‘콜센터 실습생의 자살 사건’은 다수의 감정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비춘 거울이었다. 감정노동자들은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면서도 ‘고객은 왕’이라는 이유로 참고 견디며 소리 없는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감정노동의 문제점과 감정노동자의 정신적·신체적 피해에 대한 논쟁은 약 10여년 전부터 계속돼왔지만 큰 변화나 개선은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노동계와 시민단체 등에서는 감정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고 끊임없이 목소리를 냈고, 지난달 18일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에 따른 ‘감정노동자 보호법’(이하 감정노동법)이 첫 삽을 떴다.

어렵사리 시행되는 법안인 만큼 감정노동자들은 개선에 기대를 하면서도, 하나둘씩 드러나는 구멍 탓에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감정노동자는 도를 넘은 고객의 갑질에 화가 나거나 괴로워도 항상 웃는 얼굴을 유지해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감정노동자는 도를 넘은 고객의 갑질에 화가 나거나 괴로워도 항상 웃는 얼굴을 유지해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감정노동자’

감정노동이란 말투나 표정, 몸짓 등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 표현을 직무의 한 부분으로 연기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통제하는 일이 수반되는 노동을 뜻한다.

감정노동은 주로 고객, 환자, 승객, 학생, 민원인 등을 직접 대면하거나 음성대화매체 등을 통해 상품판매 또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고객응대업무에서 발생한다.

국내 산업구조가 서비스 중심으로 변화함에 따라 감정노동 종사자 비율은 점차 높아졌다.

고용노동부가 2017년 발행한 ‘감정노동 종사자 건강보호 핸드북’에 따르면 감정노동 종사자는 560~740만명으로 전체 임금노동자 1829만6000명의 31~41%로 추정된다.

이들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직업 특성상 고객으로부터의 막말이나 폭언, 심각하게는 성희롱이나 폭행 위험성에 늘 노출돼 있다.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가 제공한 ‘2018 서비스산업 노동조건 및 삶의 질 실태조사’에 따르면 서비스 노동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고객으로부터 피해 경험’ 설문조사에서 폭언이 41.9%로 가장 높았으며, 괴롭힘 12.6%, 성희롱 5.5%, 폭행 2.0% 순으로 집계됐다.

이들 중 13.3%는 지난 3년간 우울증 진단을 받았으며, 현재 우울증 증상을 느끼는 노동자는 25.3%로 조사됐다. 이들 중 6.0%는 실제로 우울증 치료를 경험한 것으로 확인됐다.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 이성종 집행위원장은 “그동안 서비스 노동자를 대상으로 실태 조사를 실시한 결과 고객으로부터 폭언이나 폭행, 성희롱을 경험했다는 응답자가 절반에 가깝다. 이들 중에는 아주 심각한 상황까지 흘러간 경우도 있다”고 증언했다.

ⓒ뉴시스
ⓒ뉴시스

첫 삽 뜬 감정노동법
현장 상황은 ‘미지근’

과거 우리나라는 감정노동자를 위한 보호 장치는커녕 감정노동에 대한 인식조차 형성되지 않았다. 언론 등을 통해 감정노동 피해의 심각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감정노동자 보호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이 기세를 몰아 노동계와 시민단체 등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을 촉구했고, 정계에서도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법장치 마련에 힘썼다. 수년에 걸친 논의 끝에 지난 3월 ‘감정노동법’이 포함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국회의 문턱을 넘었고 10월 18일부터 본격 시행됐다.

감정노동자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제26조의2 ‘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한 건강장해 예방 조치’에 따르면 사업주는 폭언과 폭행, 그 밖에 적정 범위를 벗어난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유발하는 행위로 인한 고객응대근로자(감정노동자)의 건강장해를 예방하기 위해 고용노동부령을 토대로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또 사업주는 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해 고객응대근로자에게 건강장해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현저한 우려가 될 경우 업무의 일시적 중단이나 전환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고객응대근로자는 이를 토대로 사업주에게 조치를 요청할 수 있으며, 사업주는 이 같은 요구 때문에 해고 또는 그 밖에 불리한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 위반 시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그동안 고객의 폭언 및 폭행, 성희롱, 무리한 요구 등이 걸러지지 않고 고스란히 노동자의 피해로 이어졌다면, 사업주가 이를 저지하고 노동자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 위험을 인식할 경우 피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감정노동법의 핵심이다.

ⓒ뉴시스
ⓒ뉴시스

논의만 있을 뿐 이렇다 할 결과물이 없었던 탓에 현장에서 이번 감정노동법 시행에 거는 기대는 컸다. 그러나 강제성 없거나, 협력업체 노동자는 보호 대상에서 제외되는 등의 큰 맹점을 가지고 있어 감정노동 사각지대 해소가 쉽지 않을 거라는 우려의 소리도 적지 않다.

일과건강 한인임 사무처장은 “고객 응대 중지를 요청했을 때 이를 이유로 인사상 불이익을 주면 처벌을 받지만 예방 관련 조항에 대한 처벌은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관련 단체에서 모든 조항에 처벌 규정을 넣어야 한다고 했지만 마지막 조율 과정에서 제외돼 아쉽다. 어쨌거나 법에 있다는 건 지켜야 한다는 의미기 때문에 예방의무를 지키지 않으면 당연히 고소·고발이 이뤄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성종 위원장은 “면세점이나 백화점, 마트 등 판매직종 종사자는 보통 협력업체 소속이다. 감정노동법에 규정된 사업자의 보호 의무는 직접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노동자만 해당된다. 즉, 협력업체 노동자는 보호 대상이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이어 “또 고객으로부터 폭언이나 폭행의 피해를 입기 전에 노동자의 업무를 중단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상황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며 “결국엔 모든 피해를 입고 난 후에야 조치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아울러 “기업들이 고객응대 매뉴얼을 만들도록 돼 있는데, 최근 만들어진 매뉴얼을 취합해보니 (업무중단까지) 상당한 절차를 거쳐야 해 폭언이나 폭력 등의 상황을 즉시 피할 수가 없다”고 부연했다.

실제 모 온라인 마켓플레이스의 고객 상담원으로 재직 중인 A씨는 감정노동법 시행으로 사내 고객응대 매뉴얼에 변화는 생겼지만 실효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증언했다.

A씨는 “부당한 요구나 간접 폭언, 상담원 비하 같은 부분은 응대 중단 사유가 되지 않는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직접적인 폭언이나 성희롱 발언을 들을 경우에만 ‘지속적인 욕설 등은 상담이 제한됩니다’라는 안내 멘트를 3번 하고서야 겨우 상담을 끝낼 수 있다. 만약 간접 폭언 등을 이유로 관리자에게 응대 중단을 요청할 경우 나중에 파악하라거나 요청을 거절하기 일쑤다. 최근 감정노동법 시행되면서 보호프로그램이 새롭게 생겼지만 현실적으로 이용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그는 “힘든 상담전화를 마치고 나서 정신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상담직원을 위해 30분 정도의 휴식 시간을 준다. 없는 것보단 낫지만 현실적으로 별 도움이 되진 않는다. 휴식은 상담원 선택에 달렸다. 하지만 그날 정해진 업무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눈치가 보이고, 월급에서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상담원 입장에서는 피 같은 30분을 힘들다고 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라고 설명했다.

또 “상담원을 위한 전화 상담센터 운영을 시작했다. 하지만 전화 상담센터는 이용 자체가 거의 불가하다”며 “오전과 오후 근무시간 동안 휴식 시간이 각각 10분 남짓인 데다가, 상담처리 건이 많은 날에는 점심시간도 30분 정도다. 빨리 퇴근해도 6시인데, 상담센터에 전화할 여유가 있겠느냐”고 토로했다.

ⓒ게이티미지뱅크
ⓒ게이티미지뱅크

“예방의무 보완될 필요 있어”

관련 단체들은 감정노동법의 실효성 여부를 판단하기는 아직 이른 시점이라면서도, 개선될 필요는 있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이 위원장은 “현행법으로는 협력업체 소속 감정노동자를 보호할 수 없기 때문에 원청 사용자가 소유 및 관리하는 사업장 내에 근무하는 모든 감정노동자가 보호받을 수 있도록 법 개정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피해 상황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부분은 고용노동부 차원에서 기준 지침을 만들어 전 사업장에 배포할 필요가 있다”며 “기업의 업무 매뉴얼에 관해서는 노동자가 피해 상황을 즉시 피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으로 바꿀 수 있도록 모범 응대 매뉴얼 배포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어 “아직 시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며 “감정노동법 시행 한 달이 되는 시점에 현장 변화를 조사해볼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한 사무처장은 “피해 상황으로부터 스스로 피할 수 있는 권리가 노동자의 피부로 와닿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시점에서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며 “다만 무엇보다 예방의무가 중요하기 때문에 사업장 내에서 폭언이나 폭행 등 피해가 일어나는 것은 무조건 막을 수 있도록 보완이 이뤄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사실 이유 없이 막말이나 폭언을 행사하는 경우는 일부이고, 다수의 고객은 합리적인 이유로 컴플레인을 제기한다. CS(customer satisfaction, 고객만족) 교육보다는 정확한 직무 교육과 적정 인력 배치가 필요하다”며 “폭력을 피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말고 합리적인 고객의 불만을 해소함으로써 감정노동의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