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소연 칼럼니스트▷성우, 방송 MC, 수필가▷저서 안소연의 MC 되는 법 안소연의 성우 되는 법
▲ 안소연 칼럼니스트
▷성우, 방송 MC, 수필가
▷저서 <안소연의 MC 되는 법> <안소연의 성우 되는 법>

나에게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열다섯 살 위 외삼촌이 있다.

그 누구보다도 스마트하고 유쾌한 우리 외삼촌은 특히 말솜씨가 아주 뛰어나다.

삼촌의 이야기 솜씨를 증명하는 일화 하나.

1980년이던가, 아가사 크리스티 원작 <나일 살인 사건>이 개봉했다. 한창 추리소설 좋아할 나이였던 난 친구들과 함께 보러가기로 약속을 하고 그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영화를 보기로 한 그날 아침, 외삼촌에게 자랑을 한 것이 사단이었다.

“그으래? 나도 그 영화 봤는데.”

“재밌어? 어떤 내용이야, 삼촌?”

곧 보러 갈 영화 내용은 왜 물어봤는지... 나는 외삼촌의 영화 얘기가 너무 흥미진진해서 친구들과의 약속을 간단히 포기했다. (친구들아 미안해) 삼촌은 <나일 살인 사건> 외에도 이소룡 영화며 당시에 자신이 본 영화 얘기를 메들리로 들려주었다. 나는 추운 겨울에 동동거리며 극장까지 가는 것보다 삼촌의 안방극장에서 여러 편의 영화를 듣는 게 훨씬 재미있었다. 그날 안방 아랫목에서 뜨거워지는 궁둥이를 움찔움찔 해가며 삼촌의 얘기를 듣던 일이 어제인 듯 생생하다.

외삼촌은 그 화려한 언변으로 70년대 중반, TBC인가 동아방송에서 주최한 MC선발 최종 3인에 들기도 했었다. 당시 부모님의 추천가요인 <서울의 찬가> 대신 <댄서의 순정>을 부르도록 내게 가르친 것도 삼촌이었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처음 본 남자 품에 얼싸 안겨~

하는 노래를 유치원생 조카에게 가르칠 줄 알았던, 유머와 페이소스가 가득했던 삼촌은 고등학교 때 낙지국을 두 번이나 먹고도(어린 시절 나는 이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뛰어난 수학 실력 덕에 명문 K대에 합격했다.

집안의 문제아이자 또 엔터테이너이기도 했던 외삼촌은 연년생인 우리 남매에겐 우상에 가까웠다. 삼촌이 들려주는 역사이야기, 종교 이야기, 연예계 얘기... 모든 게 우리에겐 바이블이었으니까. 그러던 삼촌에게 슬슬 장가갈 나이가 다가왔다.

아마도 <나일 살인 사건>이 개봉한 그 즈음이었을 거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어느 날 삼촌은 이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며 엄마와 외할머니에게 사진 한 장을 들이밀었다. 옆에 있던 오빠와 나도 보았음은 물론이다.

아! 어쩌면 좋은가.

코발트 블루의 야한 수영복을 입고 미스코리아처럼 파마를 한 사진 속의 아가씨는 진한 눈화장이며 표정이 누가 봐도 여염집에서 자란 사람 같질 않았다. <선데이 서울>의 수영복 화보를 보는 느낌?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두어 달 쯤 후, 삼촌은 또 다른 사진을 들고 왔다.

지난 번 여인과 헤어진 후 상처가 깊었으니 이번에는 허락해 달라나?

그러나 그 사진은 더 강렬해진 속편에 지나지 않았다.

할머니와 엄마는 화 낼 기운도 없으신 것 같았다.

한 동안 절망한 표정으로 다니던 삼촌은 또 결혼 얘기를 꺼냈다. 이번엔 사진이 아니라 실물을 보시라는 거였다. 가족들은 모두 긴장했고 도대체 어떤 여자가 올 것인가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런데! 삼촌과 함께 들어선 아가씨는 우리의 예상을 확 뒤집는, 너무나 참한 아가씨였다. 귀밑 찰랑거리는 생머리 단발에 화장기 하나도 없는 아가씨. 외할머니도 엄마 아빠도 모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좋다고 하셨다.

사실 엄마와 외할머니는 집안의 3대 독자였던 외삼촌에게 기대가 컸고 재력, 학벌, 집안 환경... 등 많은 면에서 까다로운 기준을 가지고 색싯감을 고르고 계셨다.

삼촌은 알고 있었다. 이 정도 환경의 아가씨를 허락하실 리가 없다고. 해서 6개월쯤 장기 전략을 짜고 그 요상한 사진들을 구해서 먼저 들이밀었던 거다. 그리고 그 사진 쇼크 전략이 맞아 떨어져 모든 관문을 무사통과하게 되었던 것.

부모님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는 연인들에게 우리 외삼촌의 전략을 소개한다.

충격요법을 통한 마음 비우기!

요즘처럼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에 거짓 연인인 척 하기가 그 때처럼 만만하진 않겠지만 한 번쯤 사용해볼 법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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