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현 칼럼니스트
▲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11월 27일에 대법원장의 출근차량에 불이 붙었다. 강원도에서 돼지 농장을 하던 70대 남성이 던진 화염병에 김명수 대법원장이 타고 있던 차가 맞았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 의해 불은 이내 진화됐고, 범행을 저지른 남모씨는 그 자리에서 붙잡혔다.

그는 과거 자신의 농장에 친환경 인증과 관련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했다고 한다. 소송은 모두 남씨의 패소로 돌아왔다. 1심에서만 변호사를 선임했던 남씨는 2, 3심을 혼자 진행했다. 남씨는 경찰 조사에서 법원이 자신의 주장을 받아주지 않아서 화가 났다고 했다. 그는 며칠 동안 김 대법원장의 출근 동정을 살피며 상황을 체크했다. 그는 단순협박 정도를 저지른 게 아니었다. 법조인에게 화염병까지 내던진 건 남씨가 처음이다. 법조인에 대한 테러는 정상적인 사회라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껏 우리사회는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 약속을 잘 지켜왔다. 그럼에도 그는 그 묵계를 깼다. 어떤 과정이었든 그는 법을 믿지 않았고, 제도를 불신했으며, 자신을 챙기는 건 자신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남씨는 소송도 혼자 진행하고, 테러준비도 혼자 하고, 범행도 홀로 저질렀다. 조용히 혼자서. 그는 대체 어느 시점에서 자신이 철저히 혼자라고 느낀 것일까.

그로부터 3일 전인 11월 24일.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는 KT 통신 아현지사 건물의 지하에서 불이 났다. 이 화재 때문에 거대 도시 서울의 서쪽 거의 절반에서 상당수 사람들의 일상이 모조리 멈췄다. 중구, 종로구, 용산구, 서대문구, 마포구, 은평구 그리고 경기도 고양시 일부까지 피해지역이었다. 유선전화, 휴대전화, 초고속 인터넷, IPTV 서비스가 전부 끊겼다. KT는 국내에서 가장 큰 통신회사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지역 내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재의 피해자였다. 우리의 삶과 인터넷이 얼마나 촘촘하게 연결됐는지 사람들은 실감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이토록 중요한 시설에 제대로 된 화재예방책이 없었다. 황창규 회장은 사건 직후 신속히 보상을 약속했지만, 노조를 비롯한 직원들은 회사 경영진의 자질을 문제 삼았다. 수익성 강화만 좇다 벌어진 일이라 지적했다. 최소한 KT가 망의 공공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지금까지 통신서비스를 해왔다는 점은 부인 할 수 없을 듯 하다.

이 국면의 한 구석에선 또다른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 영상과 영화 등을 주제로 다루는 인터넷 커뮤니티인 DVD프라임이 피해를 본 것이다. 화재가 난 건물에 두었던 커뮤니티 서버의 데이터가 일부 유실 돼 버린 것이다. 수 많은 회원들이 공들여 작성한 여러 콘텐츠들은 다시 볼 수 없게 됐다. 오늘날 온라인 공간은 한 개인이 걸어온 기록의 공간으로도 기능한다. 웹에 올린 데이터는 자신의 일부를 구성한다. 입사면접 때 지원자의 SNS를 살피는 것은, 그 공간에 그 사람이 누구인지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이라는 증명을 온라인에 올려 두는 셈이다. 다시 말해 KT의 망 서비스 철학부재가 일으킨 피해는 누군가의 실존에 대한 기록을 훼손시켜버렸다. 그러나 회사와 사회는 그들의 피해가 가진 함의에 대해서 생각지 않는 모습이었다. 개인은 그렇게 공공의 보호로부터 소외되었다.

그로부터 3일 전인 11월 21일.

나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서 입술 안쪽으로 욕 비스무레한 발음들을 뭉개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은행업무를 하려던 참이었다. 인터넷 뱅킹을 하려면 깔아야 하는 보안 관련 프로그램들이 많다. 오랜 경험과 체감으로 이 프로그램들이 미세하게나마 컴퓨터의 부팅시간과 연산속도에 영향을 끼친다는 불쾌감을 습득한 상태다. 그래도 은행일을 보려면 원치 않는 프로그램이 깔리는 걸 막을 길이 없다. 그걸 거부하면 아예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날 대한민국의 인터넷 사용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는 일이 생겼다. 프로그램들 중 일부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오류를 일으켰다. 이래 봬도 컴퓨터만 수십년 사용해 온 사람이다. 프로그래머는 아니지만 IT 회사 개발부서에서 꽤 일했고, 여러 프로그램들의 온갖 오류들에 맞서 내 손으로 직접 해법을 찾아가며 컴퓨터의 웬만한 속사정은 들여다 봤던 사람이다. 그런데 안된다. 도통 이유를 모르겠다. 

시간은 여지없이 흐르고 할 일이 많은 나는 부아가 오르기 시작한다. 내가 내 돈 맡기는데 왜 내 계좌의 보안을 내가 책임지는 거지. 나와 같은 고객들의 돈을 예치하여 금융사업을 통해 수익을 챙기는 게 은행이다. 그런 회사와 자신의 자산을 안전하게 보호하고자 하는 개인간의 계약이 은행계좌 개설의 의미다. 즉, 내 계좌의 안전은 내 돈으로 은행이 사업을 영위하는 것에 동의해 준 나를 위해 은행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별별 보안 프로그램은 내 컴퓨터에 깔리고 보안의 책임은 나에게 있으며 제도는 개인에게 책임을 돌린다. 나는 내 돈 내고 내 돈의 보안을 책임지며 내 컴퓨터의 자원을 사용한다. 이런, 컴퓨터에 들어가는 전기세도 내가 내네. 이럴 바엔 왜 은행이 필요한 것인지 모를 지경이다. 차라리 내 컴퓨터에 은행을 설립하는 게 더 낫겠다.

은행계좌를 가졌다는 것은 일정 정도 개인의 신용이 사회에서 공인 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온라인 거래의 신속성 때문만이 아니라, 신용에 기반한 경제적 활동을 하기 위해서라도 은행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신용을 담보해주는 그 편리함에 신속성을 더한 온라인 뱅킹을 이용하다 보면 신용을 볼모로 보안 노동을 강제 당하는 형국이다. 질문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나는 우리사회 돈의 흐름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가. 돈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돈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나는 나를 운용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누군가를 위해 소모되고 있는가. 결국 이런 질문의 끝에서 나라는 사람과 나의 이익은 내가 직접 챙기고 보호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그로부터 하루 전인 11월 20일.

코레일의 KTX 열차가 전원공급 중단으로 멈췄다. 퇴근 시간 사람들이 몰리는 오송역에서 서버렸다. 열차의 객실은 불이 꺼지면서 암흑이 되었지만, 당시 열차에 타고 있던 승객들의 전언에 따르면 코레일 관계자들의 대처는 그들의 기대만큼 신속하지 못했다. 안내방송은 나왔다고 하는데 정확히 어떻게 처리 될지에 대해선 명확한 이야기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곤 해도 생명이 위급한 정도의 사건은 아니었다. 그런데 열차의 유리창이 깨졌다. 승객들은 곧 문제가 해결되고 정상화가 될 거라던 열차 안내방송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세월호 이후 우리의 안전에 대한 감각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각자도생.” 살려면, 규칙 이전에 본능대로 움직여야 한다. 그다지 위기감이 없는 안전한 순간에도 사람들은 알아서 생존해야 한다. 혼자서 헤쳐나가야 한다. 굳이 유리창까지 깨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혹시나 다가올 지 모를 위험에 대비한 그 승객들에게, 사람들은 구태여 비난하기 보단 공감의 뜻을 보냈다. 다들 같은 생각인 것이다.

혼자 알아서 잘 하라고 사회가 요구하고 있다. 그래요, 우리는 혼자서도 잘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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