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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쉽지 않은 걸음이었을 텐데 잘 오셨어요.”

공기가 제법 차가웠던 11월 마지막주 금요일, 보바스기념병원 호스피스 완화병동(이하 보바스 완화병동) 의료진들은 이른 시간부터 완화병동이 아닌 로비층에 마련된 홀에서 분주히 움직였다. 이날 있을 사별 가족 모임 준비를 위해서다.

매년 진행되는 사별 가족 모임 행사는 사별한 지 6개월~1년된 가족들끼리 모여 고인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같은 아픔을 가진 서로를 위로하는 자리다. 누구도 이 모임을 강요하진 않는다. 모임 참석에 대한 부담마저도 사별 가족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달 전 미리 문자를 통해 모임 소식을 알리고 참석에 응한 사별 가족만 모여 조용하게 진행된다.

이번 모임에는 총 아홉 가족이 참석하기로 했다. 의료진은 먼 길 오느라 고생했을 사별 가족들을 위한 간단한 다과를 준비했다. 새콤달콤한 키위와 제철 과일 귤, 갖가지 과일을 넣은 요거트와 쿠키까지 어느 하나 의료진의 정성이 닿지 않은 게 없었다. 음식이 남을 걸 알면서도 부족함 없이 푸짐하게 준비하고 싶은 게 의료진의 마음이다.

“사실 이거 다 못 드실 거예요. 모임 끝나고 나면 분명 남을 거 아는데 그래도 넉넉하게 준비하고 싶었어요. 과자 몇 개 놓고 하면 편하겠죠. 그렇지만 마음이 느껴지지 않잖아요. 사별 가족분들이 어렵게 발걸음하시는 거예요. 좋은 기억이 있는 곳도 아니고 아직 아픔도 깨끗하게 치유되지 않은 상황이고요. 이렇게라도 ‘기다리고 있었다’, ‘잘 오셨다’는 마음 전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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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시간인 11시가 다 돼가자 사별 가족들이 하나둘씩 문을 두드렸다. 의료진들은 사별 가족이 올 때마다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다가가 반가운 인사를 전했다. 의료진과 가족들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를 아무 말 없이 안았다. 가족들 중에는 힘든 시간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응원해 준 의료진을 보곤 만감이 교차하는 듯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의료진들은 이런 자리가 아직은 낯설고 불편할 가족들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다과와 점심 도시락을 들고 다가갔다. 점심 식사를 마칠 때까지는 별다른 행사를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통해 마음 깊숙이 남아있는 상처를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동안의 이야기들, 떠나간 이에 대한 추억이 사별 가족에게는 무엇보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의료진은 가족들의 손을 꼭 잡고 그간의 안부와 누구에게도 꺼내놓기 힘들었을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 줬다. 가족들도 투병 중일 때뿐만 아니라 사별 이후에도 잊지 않고 찾아준 의료진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남편 마지막 모습이 안 잊혀요. 나이가 들면 생각 안 날지 모르겠지만.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일요일에 나랑 아들 얼굴을 그렇게 빤히 쳐다봤어요. ‘왜 그렇게 쳐다봐’하고 씻고 잘 준비를 하자고 했는데 그날은 싫다고 하더라고요. 원래 아침저녁으로 씻겨줬는데... 그러고 다음날 가래로 힘들어하더니 화요일에 가셨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싶더라고요. 추석 얼마 안 남겨두고 그렇게... 명절이라도 지내고 갔으면 했는데 말이에요.”

“여기 선생님들은 꼭 아버님, 어머님 이렇게 불러요. 그게 참 좋았어요. 우리 남편은 아픈 걸 잘 티 내지 않고 참는 사람이었어요. 자꾸 부르는 게 미안하고 그래서였겠죠. 그런데 간호사 선생님들이 ‘아버님, 여기선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프면 아프다고 하셔도 돼요’ 해줬어요. 매번 귀찮아하지 않고 고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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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당신을 추억하며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별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그대는 왜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는 것인지. 왜 아무리 보고 싶어 해도 볼 수 없는 세계인지...”

오후 1시가 조금 안 된 시간, 완화병동의 맏언니 서윤희 간호사가 헌시를 낭독하면서 의료진이 이날을 위해 준비해 온 사별 가족 행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서 간호사는 정호승 시인의 시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를 일부 수정해 낭송했다. 비록 이제는 곁에 없지만 고통 없는 그곳에 편안히 잠든 이들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담았다.

헌시 낭송이 끝난 후 음악치료사 이경민씨는 가수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을 틀었다. 그는 지금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분들이 가족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 해주고 싶은 말이 이 노래와 같을 거라는 마음으로 이 노래를 선곡했다고 했다. 그리고는 답가를 통해 마음을 전하자고 제안했다.

답가로는 ‘사랑해 당신을’, ‘바람이 불어오는 곳’, ‘만남’, ‘아름다운 것들’, ‘동행’ 등 5곡이 선정됐다. 이 노래들은 평소 병동에서 음악치료사 선생님이 종종 들려주던 것으로, 일부는 추억에 잠긴 듯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노래를 마친 후 가족들에게는 검은 종이와 뾰족한 나무막대가 하나씩 나뉘어졌다. 보고 싶은 사람이나 생각나는 사람을 표현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머뭇거리던 가족들은 이내 나무막대를 들고 각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그리운 이의 이름을, 미처 다 전하지 못한 말을 적어 내려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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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치유 프로그램이 끝난 후 가족들에게는 특별한 봉투와 액자, 편지지가 하나 주어졌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자 가족들은 활짝 웃음꽃을 피웠다. 의료진이 행사에 앞서 가족들에게 미리 요청해 둔 떠난 환자들의 사진이었다.

가족들은 사진을 액자에 끼우고 떠난 남편, 혹은 아내, 부모님에게 한자 한자 정성스럽게 편지를 써 내려갔다. 의료진들도 이 자리에 온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누군가를 떠나보낸 아픈 경험이 있는 사별 가족으로서 이 시간에 동참했다.

다 쓴 편지와 액자는 앞에 마련된 테이블 위로 모았다. 그리고는 다 함께 헌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이충원 사회복지사가 가장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꽃 한 송이를 올렸다. 나머지 가족들과 의료진도 용기 내 앞으로 나와 꽃을 올리고 그리운 마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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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곳으로 가서 생전 좋아하던 노래 열심히 하면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것 같아요. 보고 싶어 여보.”

“생전에 남편은 자신보다 저를 더 아껴주고 가족밖에 몰랐던 그런 사람이었어요. 떠나기 전 4명의 아이라는 큰 선물을 주고 갔네요. 늦둥이가 5살이에요. 요즘은 그 아이 때문에 사는 거 같아요. 어떨 때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저만 두고 홀로 떠난 남편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더 커요. 제가 운전을 많이 하는 편인데, 항상 옆자리에 앉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항상 그립고 보고 싶고 그렇습니다.”

“지난해 8월 엄마가 떠나셨어요. 아직도 항상 엄마가 같이 있는 거 같아요.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 안 울고 잘 지내다 보니까 사람들이 독하다는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눈물이 많이 나네요. 하늘에 계신 엄마는 제가 씩씩하게 잘 살길 바라실 거라고 생각해요. 엄마도 아빠가 돌아가시고 그렇게 하셨고요. 앞으로 씩씩하게 잘 사는 게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인했던 엄마 모습 많이 닮으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갈 거예요.”

“사별 가족이 돼 위로를 받는 건 처음입니다. 기쁘기도, 먹먹하기도 하네요. 27살에 아빠가 돌아가시고, 30살에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씩씩하게 잘살고 있어서 하늘에서 보시면 굉장히 뿌듯해하지 않으실까 생각합니다. 정말 사랑하는 엄마가 보여주셨던 그 모습을 닮아 한 아이의 엄마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엄마가 일찍 떠나셔서 아쉬움도 크지만 그래도 위로가 되는 건 제 기억 속의 엄마는 늘 젊고 예쁜 모습이기 때문에 이것 또한 저에게 주어진 행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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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 묵묵히 손 한번 잡아주고, 아픈 얘기에 귀 기울여 주는 것이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주변에서는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며 잊으라는 말을 많이 해요. 그런데 사실 가족분들은 그러고 싶지 않거든요. 내 소중한 남편, 아내, 부모님, 자식인데 어떻게 잊고 싶겠어요. 그동안의 과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아픔을 꺼내기가 쉽지 않아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잖아요. 울고 싶을 때 울고,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드리는 거, 그게 사별 가족 모임을 준비하는 이유에요.”

*병원 내에서 진행된 모든 취재는 의료진 및 환자들의 동의하에 진행됐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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