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하루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스마트폰을 충전 케이블에 연결하는 일이다. 보조 배터리는 귀찮아서 가지고 다니지 않다 보니 저녁 즈음엔 배터리 잔량이 간당간당하다. 
 
아니다. 생각해 보니 집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거실 형광등을 켜는 일이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충전한다. 이어서 샤워를 한다. 뜨거운 물을 틀면 보일러가 가동되는 소리가 들린다. 샤워를 하고 나오면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뒤 전원을 연결하고 부팅 시킨다. 노트북은 와이파이를 잡아 인터넷과 연결된다. 인터넷 신문기사들과 SNS를 들여다 본다.
 
아니다. 생각해 보니 노트북을 켜기 전에 소파 옆 협탁 위에 있는 타블렛을 켠다. 집에 티브이가 없기 때문에 타블렛에서 티브이 앱을 열어 잠시 뉴스를 시청하다가 노트북을 켠다. 아니, 그것도 아니다. 사실은 그 전에 협탁 위에 있는 작은 등을 켜고 거실 불을 끄고 내 방 PC를 켜 둔다. 한 밤중엔 노트북을 닫고 PC앞에 앉는다. 갖가지 창을 띄운 여러 대의 모니터가 내는 빛을 받으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담근다.
 
견고하던 하루의 눈꺼풀이 내려앉는 틈에서 나는 그럭저럭 안락하다. 아마 전기가 없으면 나의 저녁은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형광등을 켜지 못하고, 스마트폰은 먹통이며, 샤워는 찬 물로 해야 한다. 노트북은 와이파이를 잡지 못할 것이다. 뉴스도 못 볼 것이다. 우리는 극대화된 관계와 극대화된 정보로 서로를 연결하는 도시에 산다. 시대는 최첨단의 정보사회로 진입한 지 오래됐고, 개인의 삶은 낮과 밤이 따로 없다. 언제나 밝은 불빛 아래에서 항상 세상과 연결된다. 도시 속의 사람들은 더 넓은 세상과 자신을 연결하기 위해 전기와 인터넷에 의지한다. 아니 도시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모든 사람들이 비슷하게 살 것이다. 21세기에 걸맞는 삶을 살기 위해 거대하고 정밀하게 구축 된 인프라 속에서 산다. 
 
사람이 죽었다. 나이 어린 청년이다. 태안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한국서부발전에서 일하던 외부 하청업체 직원이다. 야간에 홀로 컨베이어 벨트에서 작업을 하다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비정규직 하청업체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해 달라는 1인 시위에 나섰던 그의 생전 마지막 며칠과 교차하는 그의 죽음은 비통하리만치 황망해서 감당이 잘 안 된다. 
 
연일 관련 뉴스에선 하청업체 직원 이야기, 비정규직 이야기, 사측의 안이한 상황 인식 같은 것들이 쏟아진다. 가장 크게 부각된 말은 우리사회가 유지하는 ‘위험의 외주화’지만, 비극의 실체에 비해 순화된 이 표어가 가리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죽음의 외주화’다. 우리가 만든 사회는 저비용으로 현실의 누각을 지탱하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의 술래로 지목한다. 부조리의 구멍을 적당히 기워 운용하는 일은 도처에 널렸고 그 일에 자원하는 이들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다. 내게 올 수도 있었을 죽음을 타인에게 전가시키기 위한 돈이 전기요금이라는 이름으로 지불됐다. 나는 저녁의 안락함을 사기 위해 전기요금을 내고 인터넷 사용요금을 내건만, 그 돈들은 내 순번을 향해 다가오는 죽음을 저 뒤로 미루기 위해 투입하는 외주비용이 돼 버렸다. 
 
우리는 죽음의 외주비용을 대기 위해 가능한 악착같이 더 높은 학력을 쌓고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죽음을 전가하는 방식의 인프라가 사회구조의 본질이 됐다. 그저 자신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려던 노력들이, 실은 죽음을 떼어내려는 몸부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회로도는 환한 도시의 불빛 아래 없다. 그런 건 한밤의 발전소 컨베이어벨트 작업장에만 있다.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인식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없는 셈 치며 산다. 없는 것으로 대하기 때문에 무의식의 불안도 인터넷 뱅킹으로 함께 이체해 버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 나의 저녁은 안전하게 보호 받았다. 나는 나의 저녁을 위해 전기를 공급하는 어떠한 노동자와도 얼굴을 마주치지 않은 채, 은행 앱의 결제버튼을 누르며 무관심의 수수료를 내고 부끄러운 낯빛을 탕감한다. 
  
이 며칠, 흰색 형광등이 핏빛처럼 붉게 느껴진다. 
24살의 청년 고(故) 김용균씨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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