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참 별명이 많은 달이다. 계절의 여왕, 신록의 계절 등, 계절로 인한 별명을 비롯하여, 5.16 쿠데타, 5.18 광주민주화운동,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일 등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사건이 많이 일어난 ‘역사의 달’이기도 하다. 그리고 올해처럼 음력 사월초파일이 양력 5월에 해당될 경우 석가탄신일이 5월에 있게 되고, 천주교에서는 5월을 ‘성모 성월’로 명명한다. 그리고 석가탄신일 덕분에 성당과 교회에서는 체육대회 등 단체 행사를 치르기도 한다. 결국 5월은 몇몇 종교에서도 중요한 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하며 누구나 인정하는 5월의 별명은 ‘가정의 달’이라는 별명일 것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등 가정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는 각종 기념일이 몰려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날들을 맞이하여 우리는 한 번쯤 ‘왜?’라는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즉 ‘당연히 ○○한다.’라는 것에서 ‘당연히’라는 말에 한 번쯤 의문을 가져보자는 뜻이다.  

어린이날 노래를 보면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라는 가사가 있다. 어린이를 아이나 학생으로 둔 부모나 교사가 어린이날 이외의 날에는 항상 당신들의 세상이라고 생각했을까?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을 올바로 키우기 위해 하루 종일 직장에서 일을 하고, 대부분의 교사들 역시 열악한 환경에서 학생들을 사랑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들에게 5월 5일 단 하루만 어린이날은 아닐 것이다. 5월 5일은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고민하기 전에, 일제강점기 소파 방정환 선생의 활동을 되새기고, 우리의 어린이를 생각하는 것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스승의 은혜’만을 생각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고마운 선생님이 있을 것이다. 반대로 생각하기조차 싫고, 지나가다 만나면 한 대 때려주고 싶은 교사(은사도 아니다.)도 있을 것이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전교생의 성적표가 매번 학교 게시판에 버젓이 게시되었다. 성적에 따른 서열화이며 인권침해의 소지가 충분이 있는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또한 필자는 문예부에 롤링페이퍼에 야간자율학습 폐지를 기념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본관 건물의 마대자루가 다 부러질 때까지 마대자루로 구타를 당하고, 구둣발로 얼굴을 걷어차인 적이 있다. 성인잡지도 아닌 영화잡지를 본다고 몽둥이로 20대 정도 맞은 적도 있다. 교칙을 어겼는지의 여부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런 구타를 당할 만큼 필자가 잘못했는가?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모르는 사람일 때 이런 일이 생겼다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되고, 그 교사는 민형사상의 책임을 물어야 했을 일이다.

기성세대에 대한 잘못을 비판할 때, 기성세대의 답은 거의 한결같다. ‘어디서 감히!’, ‘내가 너희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노력했는데!’, ‘너희들이 나이 들어보면 내 심정을 알 것이다.’ 등일 것이다. 20대 전후까지 어떤 사람이 태어나는 순서, 학교에 진학하는 것 등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다. 모두 상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결정되는 것이다. 설혹 중고등학교 진학에 약간의 선택의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중고등학생에게 교사를 선택할 권리는 없다. 학교에서 배정하는데로 담임과 교과 담당 교사가 결정될 뿐이다. 연장자의 경우 어느 쪽도 선택의 여지가 없고, 그저 누군가가 먼저 태어났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새 연장자나 교사가 원래 그 사람이 가진 권리인 것처럼 되어버린다. 그런데 ‘어디서 감히!’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가? 

또한 ‘내가 너희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노력했는데!’라는 말은 그 일을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자화자찬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평가는 그 노력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 할 때, 비로소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는다. ‘너희들이 나이 들어보면 내 심정을 알 것이다.’라는 말 역시 연장자나 부모, 교사가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하는 말일 뿐이다. 어린 사람, 자식, 학생이 그러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러한 심정을 이해할 일조차 없을 것이다. 

5월은 “‘윗사람’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해야 하는 일이 많은 달이다. 그런데 누군가와 상하관계가 맺어지는 것은 대부분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닌, 운명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은 ‘아랫사람’의 자발적 감동으로 실천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새 우리는 윗사람을 ‘당연히’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는 교육을 지속적으로 받으며 살고 있다. 

최근 남양유업 사태로 인해 ‘갑(甲)의 횡포’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또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은 인턴사원의 엉덩이를 만지고(grab), 알몸을 보여주었다는 의혹으로 곤욕을 치루고 있다. 대부분 “이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다.”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고, 피해자 측 역시 “이 정도는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일정 선을 넘고 나서야 문제를 공론화 시켰다. 즉 누구의 인정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위치에 오르면 ‘당연히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요즈음 많은 젊은이들이 ‘요새 젊은이들은 예의가 없다. 약해 빠졌다.’라는 얘기를 듣는다. 그렇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힘들게 일을 끝내고 집에 오는 버스와 지하철에서 “노약자석은 ‘당연히’ 비워두어야 하는 곳”이라는 생각에, 노약자석이 비었고, 노약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손잡이를 잡고 서 있다. 

대부분이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혹은 운명적으로 연장자, 선배, 고참, 부모, 교사, 그리고 갑의 위치에 오르게 될 것이다. 그 자리에 올랐을 때 자신의 노력을 칭찬하는 것은 자신이 자위(自慰)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이 행여 무슨 잘못을 하지 않았는지를 염려하면서, 평가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 때 나오는 ‘은혜’라는 말만이 진정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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