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일제가 남긴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5년에 해체가 시작되었다. 해체 전까지 중앙청, 정부청사, 국립 중앙박물관 등으로 계속해서 이름과 쓸모가 바뀌었다. 

그 곳이 국립 중앙박물관이던 시절에 몇 차례 간 적이 있다. 묘한 상황이라 생각했다. 하필 점령국의 위세를 떨치려 지은 의도가 명백한 건물에서 피식민지였던 나라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문화재와 유물을 전시하는 모순은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서울에서도 가장 의미가 깊은 자리에 일제가 지은 건물을 그냥 두고 있다는 건 여러모로 당시 국민일반의 정서와 맞지 않았다. 너무 의미 있는 장소에, 너무 안 어울리는 크기의 건물을, 너무 상반되는 세력이 지었기에 그러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옛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 발표는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피지배 국가로서의 역사를 개인의 자존심과 동일시하도록 만드는 민족적 자긍심은 오랫동안 국가정책의 중요한 동력이었다. 때문에 옛 조선총독부 건물은 과거의 상처를 계속 곱씹게 만드는 것 외에도, 당대를 사는 사람들의 국가관이 가진 복잡한 내면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작용을 했다. 국가간 혹은 민족간 오래된 원한의 감정을 국가성장의 지배적 심리로 변환하면서도,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던 옛 과거를 여전히 품고 있는 나라의 심장에 조선 총독부 건물이 있었다. 아직 완전히 몰아내지 못한 적, 회복해 가는 자존심, 이념으로 갈린 민족, 어딘가를 향한 열등감 등은 여전히 90년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건물의 존재 자체가 지나온 역사적 과거와 어떤 방식으로 화해를 해야 하는지 늘 질문하고 있었다. 해체 결정은 성가신 질문의 답이었다.

당시 일었던 해체에 대한 찬반양론은 그 답이 맞느냐 하는 고민의 한 단면이었다. 건축사에서 중요한 건물이라 보는 관계 전문가들이 많았다. 역사적 관점에서도 쓰린 상처마저 역사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전해서 우리의 근대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독립기념일인 1995년 8월 15일에 맞춰 건물의 첨탑이 들어올려지던 날, 티브이 화면 속에서 불꽃분수와 오색 연무가 피어오르는 장면을 보며 환호했던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시각이었다. 결국 옛 조선총독부 건물은 잘게 바스라져 형체 없이 사라져 버렸다. 

손혜원 의원이 목포 구도심에 부동산을 매입하는 과정이 위법한 거 아니냐는 보도로 연일 시끄럽다. 의혹 주장과 손의원의 대응 과정에서 논란은 정치쟁점화 되어 점점 몸집을 불리고 있다. 손 의원이 목포 구도심에서 발견했다고 하는 어떤 정취는 일제 시대 때 당시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했던 적산가옥들로 이루어진 거리의 고유한 미감이었을 터다. 오늘날 적산가옥이 가진 고유한 미의식을 미의 관점 그대로 보고 살려 내자는 움직임은 어느새 다수에게 조금씩 납득되고 있다. 하루하루 고도성장을 해왔던 나라가 드디어 어느정도 안정을 되찾고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갖게 됐다는 의미기도 하다. 

무엇보다 일상의 고된 마음을 편히 쉬게 하고 싶은 현대인들의 욕구는 별 쓸모 없이 버려져 가는 옛 가옥들의 경제적 가치를 일깨워 주고 있다. 낡고 오래된 것들이 주는 정서적 안정감은 현대인들이 우선순위를 두는 환경의 구성요소 중 하나다. 이를 충족시켜주면 일대의 경기가 살아나곤 한다. 적이 남긴 가옥이라는 감정적 수사는 이제 도시재생이나 젠트리피케이션과 같은 복잡하고 현대적인 사안들에 의해 별 의미가 없게 됐다. 건축물에 더 이상 역사적 감정을 씌우지 않는 것은 중요한 전환이다. 적산가옥을 다룸에 있어 부동산 경제와 가계경제라는 경제적 가치가 중심에 자리잡고 있음을 의미한다. 화끈한 성미의 대통령이 건물에 감정을 쏟아내면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반기던 시절은 어느새 지나가 버렸다.

일제시대 때 적이 남긴 가옥이라는 뜻에서 적산가옥이라 하니, 조선총독부 건물은 규모나 위치 그리고 의의에서 적산 중의 가장 으뜸인 건축물이라 할 수 있었겠다. 그 조선총독부가 이전되지 않고 그냥 해체된 데에는 이전비용이 해체비용 보다 몇 십 배 많은 돈이 들기 때문인 것도 있었다. 만약 지금 결정을 내린다면 똑같은 결과를 보게 될까. 그 건물에 그렇게 많은 돈을 들이는 게 과연 합리적인가라는 의문의 답은, 당대의 경제/문화적 고려의 총체적 수준에 의해 결정됐을 것이다. 정책결정에 있어 민족감정의 표정 아래에 있던 경제현실의 민낯을 외면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과거의 적이 남기고 간 건물들에 새겨진 무의식적인 적대적 감정을 씻어내는 건, 지금을 사는 우리의 경제적 요구와 정서적 요구의 교차점이 만들어 내는 자본주의의 그래프이다. 불과 20여년만에, 국가의 역사를 민족적 자존감이라는 이름의 개인감정으로 치환하여 바라보는 게 현실의 삶과 유리돼 있음을 시장경제가 반영하고 있다.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는 경제의 이름을 걸고 정치 최전선에 놓여있다. 우리가 적폐라 일컫는 것들도 결국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이냐는 질문으로부터 솎아낸 것들이다. 넓게 보면 손의원을 향한 부동산 투기 의혹 보도와 이해충돌 주장도 그 아래에 존재한다. 잘 살고 싶다는 욕구는 그 욕구를 방해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끊임없이 소환한다. 각자의 욕망이 서로의 안녕을 침해할까봐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건 갈수록 정치와 경제분야에서 집중적으로 길어 올려진다. 우리는 적을 계속해서 발굴하고 있다. 우리 안에 우리의 적이 살고 있다는 생각. 그 적을 끝없이 찾아내려는 건, 어찌 보면 행복이 멀게만 느껴지는 우리의 불안과 슬픔을 계속해서 마주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진짜 적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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