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권 당시 국가권력의 탄압 주장하는 이들
“내란선동사건 발생 시기, 기획된 사건임을 방증”

ⓒ투데이신문 이은지 인턴기자
ⓒ투데이신문 이은지 인턴기자

【투데이신문 남정호 기자】 “정권 뺏길까 노심초사했던 것 아니겠느냐.”

지난 12월 6일 민중당 당사에서 만난 이상규 대표는 통합진보당이 박근혜 정권의 타깃이 됐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묻자 이같이 운을 뗐다. 통합진보당 의원이었던 그는 내란선동사건과 당 해산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이 대표는 당시 통합진보당이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에서 박근혜 정권 당시 국가권력의 탄압을 말했다. 그가 말하는 ‘탄압의 시발점’은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야권연대에 참패했던 당시 정부·여당의 위기의식이었다.

“2010년 지방선거 당시 한나라당은 야권연대로 인해 처음으로 패배했다. 천안함 사건 북풍몰이로 안보가 엄청난 이슈가 됐는데도 말이다. 당시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의 야권연대가 총선까지 이어지면 필패국면이었다.”

통합진보당은 2012년 19대 총선에서 13석을 얻으며 약진했다. 당시 선거 자체에서는 새누리당(전 한나라당)이 152석을 얻으며 과반을 넘겼지만, 진보정당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둔 통합진보당에는 큰 의미가 있는 선거였다.

“2012년 18대 대선에서도 사실 겨우 이기지 않았느냐. 온갖 부정선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압승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복지공약도 내걸며 겨우 이긴 거다. 게다가 부정선거가 드러나는 상황 속에서 (통합진보당을 향한) 정치공작과 국가권력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경기 의정부시에 위치한 ‘인생서점’에서 만난 김재연 전 통합진보당 의원도 비슷한 진단을 내렸다. 2012년 19대 국회 등원 첫날 박근혜 당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입에서 시작된 ‘김재연, 이석기 국가관’ 논란이 통합진보당에 대한 탄압의 시작점이었다는 게 김 전 의원의 설명이다. 당시 김재연, 이석기 의원은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으로 거취 문제가 거론되던 상황이었다.

지난 2013년 8월 8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김기춘 신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 2013년 8월 8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김기춘 신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국가의 안위를 다루는 국회에서 기본적인 국가관을 의심받고 있고, 국민들도 불안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돼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당시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은 이같이 말하며 두 의원에 대한 거취문제를 ‘국가관 문제’로 프레임을 전환, 통합진보당과 관련된 종북 논란에 불을 지폈다.

김재연 전 의원은 “국가관을 갖고 국회의원을 제명시켜야 한다는 발상은 누구도 하지 않았을 때였다”면서 “이를 통해 당시 제1야당이었던 민주통합당을 압박하며 정국을 휩쓸었던 것이 2012년 대선이었다”고 말했다.

대선 직전 터진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이 당선 이후에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자, 박 전 대통령은 2013년 8월 5일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임명했다. 그리고 같은 달 28일 내란선동사건은 시작됐다.

“국정원 대선개입 논란이 한창이었을 때 박 전 대통령이 꺼내 들었던 칼이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었다. 그를 필두로 한 공안 공포정치가 불법 대선개입의 여론을 잠재웠다. 박근혜 정권으로서는 정권의 탄생부터 위기돌파 과정까지 과거 유신독재시대에 썼던 종북몰이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정권이 아니었나 싶다. 통합진보당을 빌미로 삼는 게 당시 북핵문제나 여러 국내외 정세에도 용이하다고 생각해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본다.”

“처음부터 철저하게 국정원에 의해 기획된 사건이다”

이상규 전 의원은 내란선동사건이 터진 시기 역시 이 사건이 당시 박근혜 정권과 국정원에 의해 기획된 사건임을 방증한다고 주장했다.

내란선동사건이 터진 2013년 8월은 국정원의 대선개입 의혹과 관련해 청문회가 열리는 등 여론의 관심이 집중됐던 때였다. 시청 앞에서는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규탄하는 시민들의 촛불집회가 이어지고 있었다.

내란선동사건에서 국정원이 내세운 증거인 회합 녹취록은 같은 해 5월 12일 진행된 강연을 녹취한 것이었다. 국정원은 이 녹취록을 근거로 이석기 의원이 서울 합정동에서 당원 130여명이 모인 가운데 비밀회합을 갖고, 경기남부지역 통신시설과 유류시설 파괴를 모의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녹취록은 이후 내란선동사건 1심 재판에서 450여곳이 수정됐다. 또한 논란이 된 KT혜화지사 습격 목표 발언, 기간시설 타격 발언 등도 남부권역분반 토론에서 한 당원의 개인적 발언이었고, 이에 대해 다른 당원들이 이견을 표시하기도 했다. 결국 해당 녹취록은 대법 판결에 의해 내란음모 혐의에 대한 증거로써 효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내란선동사건 관련 녹취록에서 검찰 측 주장과 실제 발언 ⓒ출처=‘이카로스의 감옥’(문영심 저), 재구성=투데이신문
내란선동사건 관련 녹취록에서 검찰 측 주장과 실제 발언 ⓒ출처=‘이카로스의 감옥’(문영심 저), 재구성=투데이신문

해당 녹취록은 국정원이 제보자라고 지칭한 이모씨가 녹취한 뒤 국정원에 전달한 것이었다. 이상규 전 의원이 지적하는 부분은 국정원이 그날 강연 녹취록을 보고 내란음모사건이라고 판단했다면 왜 세달 뒤인 8월 28일에야 수사에 돌입했느냐는 것이다. 이 같은 의문을 의식한 듯 당시 국정원은 이들의 내란예비음모 혐의에 대해 3년 전부터 내사를 벌여왔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걸 (이씨가) 녹취해 바로 넘겼다면 국정원이 바로 녹취를 풀었을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아무리 늦어도 7월에는 수사를 시작했어야 한다. 이걸 쥐고 있다가 정권이 위기에 몰릴 때 비로소 꺼내든 것이다.”

내란선동사건 피고인으로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김근래 전 통합진보당 경기도당 부위원장도 이 같은 주장에 힘을 실었다. 내란선동사건 발생 약 3주 전에 부임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사건 만들기에 주요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정말 내란사건으로 봤으면 강연 다음날 녹취를 풀자마자 조치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내란음모죄로 감청영장을 받아 도청하던지, 폭파한다는 기간시설에 테러 대비 조치를 하던지, 내란선동사건 관련 내부 비상회의를 해야 한다. 그런데 세 달간 아무 변화가 없었다. 국정원도 녹취록 갖고는 내란음모사건으로 보지 않았던 거다. 그해 8월 5일 김기춘 비서실장이 부임하고 어떤 정치적 필요에 의해 내란선동사건으로 바뀐 거다.

내란선동사건에서 통합진보당 해산까지 이어지는 흐름에 대해 전 통합진보당 관계자들은 박근혜 정권의 탄압을 주장하고 있다. 물론 당시에도 이 같은 주장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종북으로 낙인찍힌 그들의 주장에 힘이 실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국정농단사건 수사와 최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 수사가 진행되면서 고 김영한 청와대 정무수석의 업무일지와 양승태 대법원장 당시 법원행정처의 문건 등 이들이 주장해온 당시 정권의 탄압에 대한 정황들이 속속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통합진보당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받으며 관련 판결에 다시 한번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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