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사건으로 드러난 법원행정처의 재판개입 정황
재판부에 행정처 의견 전달과 재판부 배당조작 의혹도
국민 관심 돌리기 위한 내란선동사건 선고기일 조정
헌재 선고 내용 미리 안 靑, 헌재와 사전 교감 의혹

ⓒ투데이신문 이은지 인턴기자
ⓒ투데이신문 이은지 인턴기자

【투데이신문 남정호 기자】 지난해 5월 양승태 전 대법원장 당시 사법농단 의혹 사건 특별조사가 진행되면서 당시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문건들이 공개됐다. 이 문건들 가운데는 법원행정처가 통합진보당 재판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는 문건들도 다수 나왔다.

그중 하나가 2015년 1월 7일 작성된 ‘통진당 행정소송 검토보고’ 문건이다. 이날은 전 통합진보당 의원들이 지위확인소송을 제기한 바로 다음날이었고,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의원직 상실과 관련해 법적 대응 의사를 밝힌 지 이틀만이었다. 그만큼 행정처가 2014년 12월 19일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 전 통합진보당 측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 연말 국회 앞 농성장에서 만난 오병윤 전 통합진보당 원내대표도 이 문건을 언급하며 거듭 분통을 터트렸다.

“그 문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국회의원 지위확인소송에 대한 사법부의 대응문건이었다. 저희가 그달 6일 소를 제기했는데 바로 다음날 대응문건이 생산됐다. 소송이 제기될 걸 대비해 이미 사법부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논의하고 있었다는 거다.

ⓒ투데이신문 이은지 인턴기자
ⓒ투데이신문 이은지 인턴기자

사법농단 마수 뻗친 지위확인소송

행정처가 생산한 이 문건에는 지위확인소송과 관련해 검토배경, 헌재 결정의 개요 및 정당성 검토, 비판적 논의 가능성, 학계의 입장, 현 상황이 법원에 미치는 영향 분석 등과 함께 해당 소송에 대한 시나리오가 망라돼 있다.

문건에 따르면 행정처는 헌재의 의원직 상실결정에 대한 정당성 문제를 거론하면서 사법부에서 헌재의 결정을 받아들일 시 향후 유사한 사건에 대한 사법 심사 가능성이 차단되는 것을 우려하기도 했다. 때문에 헌재의 결정을 용인하는 ‘각하’는 부적절하다며 의원 지위확인 판단의 권한이 헌재가 아닌 법원에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법원이 직접 ‘기각’ 또는 ‘인용’ 판단을 내리는 방향을 제시했다.

사법농단 사건으로 기소된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의 공소장에도 이 같은 판단 방향이 행정처가 주문한 내용이 아닌 것처럼 변형돼 전 통합진보당 국회의원과 비례대표 지방의원들이 제기한 지위확인소송 재판부에 전달됐다.

뿐만 아니라 행정처는 통합진보당 소속 지역구 지방의원 31명에 대한 대책도 검토했다. ‘통진당 지역구 지방의원 대책 검토’ 문건에는 의원 지위를 박탈당한 비례대표 지방의원들이 각 지역 법원에 제기한 지위확인소송 현황을 정리하고 소송의 결론이 미칠 영향에 대한 분석이 담겼다.

그러면서 지역구 지방의원들의 의원직 박탈을 위해 지방자치단체장이 의원지위 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행정처는 보수적 색채가 강하고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이 지자체장을 맡고 있는 지역을 우선 검토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법원이 개입한 사실이 외부로 알려질 경우 감당하기 힘든 파장이 있을 수 있다.”

행정처는 해당 문건에서 이 같은 행위에 대한 문제점을 스스로 언급하기도 했다. 즉, 행정처는 재판 개입이 알려질 경우 상당한 파장이 일 것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 그럼에도 사법부는 위와 같은 문건을 만드는 등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의 숙원사업이었던 상고법원 추진이 그 이유였다.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추진을 위한 BH(청와대)와의 효과적 협상추진 전략’ 문건에는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 사례’로 내란선동사건과 함께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지위확인소송이 명기돼 있다. 이 사건들은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사회적 안정’이라는 대제로 묶였다.

행정처는 이를 ‘그동안 사법부가 대통령과 청와대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권한과 재량 범위 내에서 최대한 협조해 온 사례’라며 상고법원 추진을 위한 청와대와의 협상카드 중 하나로 언급했다.

그러면서 “국가적·사회적 파급력이 큰 사건이나 민감한 정치적 사건 등에서 BH와 사전 교감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물밑에서 예측불허의 돌출 판결이 선고되지 않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자평했다. 지위확인소송이나 내란선동사건에서도 행정처의 ‘조율’이 의심되는 이유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간접적인 방안 제시가 아닌 행정처가 적극적으로 재판 개입에 나선 정황이 나타났다. 지난해 12월 당시 2심 재판부에 대한 배당 조작 정황이 드러난 것. 검찰은 박병대 전 대법관의 구속영장에 이 같은 내용을 적시했다.

지위확인소송 1심 재판부가 내린 ‘각하’ 판결은 행정처가 앞서 작성한 ‘통진당 행정소송 검토보고’ 문건 내용과 배치되는 판결이었다. 이 문건에서 행정처는 ‘헌재의 결정을 법원이 다시 판단할 수 없다’는 각하 판결이 법원에 대한 헌재의 우위를 용인한 것으로 봤다.

실제로 1심 판결을 보고받은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대법관은 ‘어떻게 이런 판결이 있을 수 있느냐, 행정처의 입장이 재판부에 제대로 전달된 게 맞느냐’고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행정처는 당사자들의 항소 여부 및 항소심 재판부 배당 등을 더욱 예의주시했고, 이 과정에서 2심 재판부 배당에 개입했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사법농단 의혹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2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대기장소인 서울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뉴시스
사법농단 의혹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2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대기장소인 서울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뉴시스

선고 앞당겨진 내란선동사건

내란선동사건 상고심이 진행 중이던 2015년 1월 당시 행정처가 법관의 비리수사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해 재판 선고시기를 앞당겼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의 공소장에 따르면 행정처는 2015년 1월 20일경 금품수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법관이 현직 법관 신분으로 최초로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내부적으로는 사회적 이목이 집중될 수 있는 내란선동사건의 상고심 판결 선고시기를 앞당겨 국민들의 관심을 전환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후 행정처는 이러한 조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향후 유사한 사법부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면밀한 수사 상황 점검 및 상황 발생 시 신속한 대응 전략 수립’, ‘언론의 관심을 돌릴 수 있는 기삿거리 제공’ 등의 방법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매뉴얼도 마련했다.

내란선동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 지위확인소송에서 전 통합진보당 측 변호인단으로 활동한 조지훈 변호사는 내란선동사건 상고심 선고시기 조정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직접적으로 재판 개입에 나선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짚었다.

“행정처의 지위와 역할이라는 게 재판에 개입하거나 선고기일을 앞당기거나 사건을 분석할 순 없다. 명확히 대법 전원합의체 사건, 내란선동사건에 명확히 개입하는 문건이 작성되고 실제 현실화됐다. 때문에 전원합의체 재판장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직접적으로 이 같은 재판 개입의 정범, 범죄행위를 직접 수행한 사람이라는 게 그 사건에서 명확히 드러나는 것 같다.”

지난 2016년 12월 19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청와대-헌법재판소 커넥션 규탄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 2016년 12월 19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청와대-헌법재판소 커넥션 규탄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뉴시스

당 해산에서 나타난 청와대-헌재 간 사전교감 의혹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한 2014년 12월 19일은 박근혜 전 대통령 당선 이후 꼭 2년째 되던 날이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의 당선 2주년 기념 선물이라는 말도 나왔다.

또 박한철 당시 헌재소장은 사건이 접수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2014년 10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 오찬장에서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사건의 연내 선고 가능성을 언급, 청와대와의 교감설이 돌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의 당선 2주년 선물. 비아냥 정도에 머물던 이 말은 이후 국정농단 사태를 지나며 고 김영한 전 정무수석의 업무일지가 공개되면서 청와대와 헌재 간의 사전 교감 의혹으로 구체화됐다.

“정당 해산 확정. 비례대표 의원직 상실, 지역구 의원 상실 이견, 소장 의견 조율 중 (금일). 조정 끝나면 19일, 22일 초반”

김영한 전 수석의 업무일지에는 헌재 선고가 있기 이틀 전인 2014년 12월 17일, 이미 청와대가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결과를 인지한 정황이 나타나 있다.

“박한철 헌법재판소 소장은 그해 국감에서 해당 심판 선고를 연내에 할 거라고 얘기했고, 김영한 수석의 업무일지를 보면 김기춘 비서실장도 동일한 내용을 언급한 것으로 기재돼 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박근혜 정부에서 기획해 선고기일을 지정한 것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김 전 수석의 업무일지를 바탕으로 조지훈 변호사는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에서 박근혜 정권이 선고기일 지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추론을 내놨다.

이외에도 김 전 수석의 업무일지에는 청와대가 통합진보당 관련 사건을 유심히 살펴본 사실이 드러나 있다.

“‘RO 사건 항소심 결심 7/28’. ‘RO 제보자 이OO 8/5 증인신문 예정’. ‘RO 사건 공판 기록 등사 후 7/8 이후 송부’. ‘8월 중순경 서증조사 완료 등 절차 사실상 마무리 예정’” - 2014년 6월 25일, ‘헌재, 통진당 사건’이라는 제목 아래 적힌 내용

김 전 수석이 취임한 2014년 6월부터 사임한 2015년 1월까지 7개월여간 통합진보당에 대한 언급이 45번에 달할 정도로 청와대는 관련 사건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법원행정처도 내란선동사건 항소심 판결이 향후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에 미칠 영향에 대해 분석했다.

2014년 8월 13일 행정처는 내란선동사건 항소심 판결 관련 문건 2개를 생산했다. ‘내란음모 사건 항소심 판결의 내용과 의미분석’ 문건에서 행정처는 “1심 판결에 비해 상대적으로 통합진보당 측에 유리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정당해산심판에서 정부 측에 유리한 판시내용이 많다”고 평가했다. 행정처는 그 이유로 △내란선동에 대해 유죄를 인정한 점 △RO의 실체는 인정되지 않았지만, 이석기 전 의원을 정점으로 한 상명하복에 의한 조직적인 구성을 인정한 점 등을 들었다.

같은 날 작성된 ‘이석기 내란음모사건 항소심 선고 결과 분석’에서는 정치권과 언론 보도 분위기 등 여론의 동향과 함께 국회와 헌재에 대한 대응 방향을 분석했다. 행정처는 항소심 결과가 위헌정당해산심판에 미칠 영향을 검토하면서 ‘헌재에 대한 언론과 국민의 주목을 끌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평가했다.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에서 헌재의 판결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행정처도 내란선동사건에 대한 자신들의 판단을 설명하며 그 영향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지금까지 알려진 검찰의 수사 결과는 그간 통합진보당 측이 주장해온 ‘정권의 탄압’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또 제기된 의혹들은 당시 재판과정에서 통합진보당 측이 느꼈던 의구심들과도 연결된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