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공부에 얼마큼 힘쓰느냐가 중요할 뿐, 일찍 시작하느냐 늦게 시작하느냐는 논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유(張維, 1587-1638)>”

매점 아줌마

해마다 2월이 되면 학교에서 졸업식이 열린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땐 학생들이 줄지어 서서 교장의 훈화를 듣고, 우등상이나 개근상을 받으며, 송사와 답사를 한 뒤 교가나 졸업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졸업식이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요즘엔 행사 중간에 졸업생들이 만든 영상이나 선생님들의 인사가 담긴 영상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확실히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분위기도 예전에 비해 확실히 밝아졌다.

몇 년 전 첫째 아이 가진이의 고등학교 졸업식 구경을 갔을 때다. 여느 졸업식처럼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단상 위의 화면에 각 반 담임의 축하인사가 나오고 있다. 이러면서 졸업식이 마무리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잠시 후 졸업생들이 큰 소리로 환호하기 시작했다. 자막이 나온다.

“매점 아줌마.”

정말 기발하구나. 이 분은 뭐라고 하실까.

“대학에 가는 학생도 있고, 일 년 더 해야 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다들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고생 많으셨어요. 나는 학생들이 참 좋아요. 나는 창덕여고를 참 좋아해요. 좋은 학교에 있는 것도 고마운 일인데 올해 저한테 좋은 일이 있었어요.”

“여러분들이 교실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저는 책을 봤어요. 그렇게 공부해서 올해 평생교육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어요. 나이 들어서 공부하려니 참 힘이 들었어요. 눈도 잘 보이지 않고 머리도 잘 안 돌아가고…. 그래도 학생들 보면서 열심히 했어요. 학생들 보면 힘이 났어요. 학생들 기운이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고마워요. 나중에 놀러오면 매점 들르세요. 왔다가 휙 그냥 가지 말고….”

좀 전까지 환호를 하던 학생들, 같이 웃던 학부모들은 순간 말을 잊었다. 모두들 매점 아줌마의 말이 끝날 때까지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 짧은 순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식들과 나한테 배우는 학생들한테는 ‘늦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고 했으면서 정작 나는 이미 나이가 들어서 새로운 걸 배우기에는 늦었고, 노력을 해서 뭔가를 배워본들 이미 그 방면에 뛰어난 사람들이 많을 것이므로 배운 걸 써먹을 수도 없다고 생각해서,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매점 아줌마가 나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았다.

매일같이 만났던 아줌마의 말을 들은 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중에 가진이의 말을 들어보니 영상을 보며 눈물 짓는 아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나도 아이들과 같은 마음이었다. 아줌마의 진심이 담긴 축복, 자신의 성취를 학생들에게 돌리는 그 마음, 무엇보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해서 얻은 좋은 결과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늦은 나이에 공부하여 성취한 사람

아줌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늘 누군가에게 이야기해주었던 글을 떠올렸다.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중 한 명으로 명성이 높았던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의 「만학성취(晚學成就, 늦은 나이에 공부하여 성취하다)」라는 글이다.

“예로부터 문장가는 대부분 어린 시절에 출중한 재주를 이루었지만, 늦은 나이에 공부해서 성취한 사람도 있다. 황보밀(皇甫謐, 214-282)은 나이 이십 세일 때도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뒷날 느낀 바 있어 분발하여 사람을 찾아가 수업을 해서 마침내 백가의 설에 두루 통달하게 됐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현안선생(玄晏先生)이라 불렀다.

진자앙(陳子昻, 661-701)은 돈과 세력이 있는 집 아들이었는데 십칠팔 세에도 글을 몰랐다. 뒷날 개연(慨然)히 뜻을 세워 경전(經典)에 정신을 집중하여 마침내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냈다.

소노천(蘇老泉, 1009-1066)은 나이가 이미 장년(壯年)이 되었는데도 글을 몰랐다. 이십칠 세에 비로소 분발하여 글을 읽었는데 5, 6년이 지나 크게 문학의 업적을 이루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이 공부에 얼마큼 힘쓰느냐가 중요할 뿐, 일찍 시작하느냐 늦게 시작하느냐는 논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유(張維), 『계곡만필(谿谷漫筆)』 권 1, 「만학성취(晩學成就)」>

황보밀은 『삼국지연의』의 초반에 잠시 등장하는 인물인 황보숭(皇甫嵩)의 증손자다. 장유의 말처럼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매우 방탕했는데 숙모가 눈물을 흘리며 꾸짖자 크게 뉘우치고 공부해서 큰 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황보밀은 좌사(左思)라는 사람이 쓴 「삼도부(三都賦)」라는 글의 작품성을 알아보고 그 글에 서문을 써 주었는데 이 글 덕분에 「삼도부(三都賦)」가 유명해졌다.  ‘낙양지가귀(洛陽紙價貴)’라는 성어는 이처럼 사람들이 너도나도 「삼도부(三都賦)」를 베끼는 바람에 낙양의 종이 값이 폭등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진자앙은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이다. 어렸을 적에 말 타고 활쏘기를 좋아했으며, 도박까지 즐겼는데 어느 날 향교에 갔다가 지난날을 뉘우치며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소노천은 송나라의 유명한 문장가인 소식(蘇軾)과 소철(蘇轍)의 아버지인 소순(蘇洵)이다. 부자 세 명이 모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당나라 송나라의 여덟 명의 대가)’에 이름을 올렸다.

장유가 전하려는 말은 분명하다. 공부를 늦게 시작해도 위에 나열한 세 사람처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자극을 받든 스스로 무언가를 느끼든 공부를 해야겠다는 의지와 이후의 실천이 중요할 뿐 공부를 시작하는 시기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특히 위에 거론한 세 사람 중 황보밀의 경우는 풍을 앓아서 반신불수가 되었는데도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의지만큼 실천을 했다는 말이다.

시작을 해야 결과를 얻는다

그래도 무언가 뒷맛이 개운치가 않다. 매점 아줌마의 말에 감동을 하고, 반성을 하며, 옛 사람의 글을 보며 주위를 환기하고 의지도 불살라 보지만, 현실은 생각처럼 낭만적이지 않고, 옛날과 지금은 다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옛날엔 공부를 늦게 시작하든 말든 과거에 합격만 하면 됐지만, 지금은 주어진 시간 내에 시작을 하고 끝을 봐야 한다. 한두 번 때를 놓치면 크고 작은 일을 이루기 어렵다.

이런 세태 속에서 여전히 성공한 누군가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른 때’라고 하면서 격려를 하거나 노력하라고 종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장 무언가를 해야 하고 결과를 내야 하는 사람들, 특히 각종 시험을 앞둔 학생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화살처럼 가는 시간 동안 경쟁을 해서 이겨야 하는 현실을 살면서 남들보다 늦게 시작하거나, 진보가 느리면 아무래도 성공할 가능성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진짜 늦은 것이다.”

어떤 개그맨이 유행을 시킨 말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른 때’라고 하는 오래된 교훈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뜻이고, 그만큼 현대인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현실을 비유하지 않았는가 한다. 시간을 들여서 노력을 해도 어려울 테니 애초에 시작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는 것 같다. 여전히 이 말은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사람들마다 저 말을 받아들이는 양이 다를 뿐, 저렇게 말을 하면서 체념하고 있는 건 분명한 듯하다.

▲ 김재욱 칼럼니스트▷저서 군웅할거 대한민국 삼국지한시에 마음을 베이다삼국지인물전 외 5권
▲ 김재욱 칼럼니스트
▷저서 <군웅할거 대한민국 삼국지>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왜곡된 기억> 외 6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누구나 알고 있는, 하나 마나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해보지도 않고 체념하는 것과 하다가 그만두는 것은 결과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일단 시작을 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그래야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눈에 보이는 결과를 얻는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면 이미 시작의 빠르고 느림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매점 아줌마는 늦게 시작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고, 책 속의 옛 사람들도 그러했다. 이 사람들이 공부를 시작할 때 좋은 결과를 얻을 것으로 확신을 했다고 보지 않는다. 어떻게 될 값에 일단 마음먹고 시작을 하고 봤을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르다고 의지를 불사르든,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늦었다고 체념을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시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렇게 시작해서 이렇게 글 한 편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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