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텔라데이지호, 2년의 기다림②] 놓을 수 없는 희망의 끈
[스텔라데이지호, 2년의 기다림②] 놓을 수 없는 희망의 끈
  • 김태규 기자
  • 승인 2019.03.26 14: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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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3월 31일은 스텔라데이지호가 남대서양에서 침몰한 지 2년이 되는 날이다. 그러나 2년이 다 되도록 침몰원인은 밝혀지지 않았고 실종자들의 행방 역시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투데이신문>은 지난 2년간 실종자 가족들의 진상규명을 위한 투쟁 활동을 돌아보고 스텔라데이지호의 선사 폴라리스 쉬핑과 정부의 대응을 되짚어봤다. 기사는 이야기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실종자 가족 인터뷰와 선사, 정부 부처 취재를 통해 쓰여졌다.
2편에서는 스텔라데이지호가 침몰한 2017년 3월 31일부터 가족들이 선사로부터 침몰 소식을 전해 듣고 폴라리스 쉬핑 부산지사로 모인 날인 4월 2일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지난 2017년 4월 2일 부산 중구 중앙동 폴라리스쉬핑 부산지사에 마련된 비상대책본부 모습. 사진 오른쪽 스텔라데이지호의 모습이 담겨있다. ⓒ뉴시스
지난 2017년 4월 2일 부산 중구 중앙동 폴라리스 쉬핑 부산지사에 마련된 비상대책본부 모습. 사진 오른쪽 스텔라데이지호의 모습이 담겨있다. ⓒ뉴시스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돼 구치소에 수감되던 2017년 3월 31일,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아있던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다. 촛불시민들은 ‘진실이 떠오르자 거짓 권력이 가라앉았다’며 기뻐했다.

모두가 세월호의 진실이 밝혀질 거라며 기뻐하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 남대서양을 항해 중이던 그리스 선박 엘피다(ELPIDA)호에 구조신호가 들어왔다.

“메이데이(Mayday)! 메이데이!”

브라질 구아이바 항만에서 철광석 26만톤을 싣고 중국 칭다오로 향하던 폴라리스 쉬핑사(社) 소속 스텔라데이지호가 보낸 구조 신호였다. 엘피다호는 구명벌을 타고 있던 필리핀인 선원 2명을 구조했다. 이후 엘피다호는 나머지 한국인 8명, 필리핀인 16명 등 총 22명의 선원을 구조하기 위해 엿새 동안 사고 해역을 수색했으나 선원들을 찾을 수 없었다. 이들 22명은 현재까지 실종 상태다.

2017년 4월 2일 부산 중구 중앙동 폴라리스쉬핑 부산지사에 마련된 비상대책본부에서 실종 선원 가족들이 모여 사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뉴시스
2017년 4월 2일 부산 중구 중앙동 폴라리스 쉬핑 부산지사에 마련된 비상대책본부에서 실종 선원 가족들이 모여 사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뉴시스

무너진 일상

스텔라데이지호의 박성백 1등 항해사(이하 1항사)는 근무하던 한진해운이 파산하면서 폴라리스 쉬핑으로 회사를 옮겼다.

박 1항사 역시 윤 3항사와 마찬가지로 회사를 옮긴 후 가장 먼저 탄 배가 바로 스텔라데이지호였다. 슬하에 딸을 둔 박 1항사는 딸아이의 돌이 지나고 배에 올랐다.

박 1항사는 도선사라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이왕 배를 타기 시작했으니 도선사가 되겠다는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다.

박 1항사는 배를 타고 멀리 다니는 어머니의 걱정에 “비행기사고보다 더 나기 힘든 게 배 사고예요. 이렇게 큰 배는 사고 없어요”라며 안심시켰다.

그는 부모님이 자신을 걱정할까봐 언제나 “괜찮다”고 말하는 아들이었다. 때문에 박 1항사의 어머니 윤미자씨는 항상 안부를 묻는 정도의 연락만 주고받았다. 스텔라데이지호가 침몰하기 전에도 ‘동생이 바쁜지 전화를 안 받는다’며 조카 소식을 묻는 등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평화로운 일상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큰 배는 안전하다’는 아들의 말을 굳게 믿고 있던 어머니는 아들이 탄 배가 침몰했다는 소식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윤씨는 사고 발생 16시간 만인 4월 1일 오후 4시경 연락을 받았다. 소식을 접한 가족들은 부랴부랴 부산으로 내려갔다.

지난 1월 3일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맞은편에서 스텔라데이지호 침몰사고 실종 3등항해사 문원준씨의 아버지 문승용씨가 1인시위를 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지난 1월 3일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맞은편에서 스텔라데이지호 침몰사고 실종 3등항해사 문원준씨의 아버지 문승용씨가 1인시위를 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목숨보다 귀한 아들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한 문원준 3등 기관사(이하 3기사)는 2017년 2월 승선근무예비역으로 스텔라데이지호에 승선한 대체복무자였다.

해양대학교 명예사관장(학생회장)이었던 문 3기사는 2016년 68기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하던 중 세월호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는 누구보다 오랫동안 세월호 사고를 기억했으면 합니다.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무책임하게 회피하거나 봐주기 대응을 하지 않는 용기와 힘을 기르고 늘 약자 편에 서서 생각하고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는 따뜻한 해양대 68기가 됐으면 합니다.”

당시 졸업식 자리에는 스텔라데이지호의 선사인 폴라리스 쉬핑 한희승 회장이 총동문회 회장 자격으로 참석해 문 3기사의 답사를 듣기도 했다.

졸업 이후 문 3기사는 2016년 폴라리스 쉬핑에서 승선근무예비역 대체복무를 시작했다. 승선근무예비역으로 대체복무를 시작한 이듬해인 2017년, 선사는 문 3기사에게 브라질과 중국을 오가는 철광석 운반선을 탑승하라고 지시했다. 이 배가 바로 건조된 지 24년이 지난 노후선, 스텔라데이지호였다.

문 3기사의 아버지 문승용씨는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다음날인 2017년 4월 1일에야 소식을 듣게 됐다. 당시 선사는 문씨에게 ‘구조선을 급파해 선원들을 구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로부터 30분 정도 흘렀을까. 청천벽력 같은 연락이 왔다. 구조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문씨는 이튿날인 2일 선사가 있는 부산으로 향했다.

문 3항사는 배를 타는 아들의 안전을 걱정하는 아버지에게 항상 “제가 타는 배는 축구장 3배 크기예요. 이렇게 큰 배는 웬만해서는 가라앉지도 않고, 가라앉는다고 해도 순식간에 가라앉지는 않아서 탈출할 수 있는 시간도 충분해요. 너무 걱정마세요”라며 안심시켰다.

부산행 기차에 오른 문씨는 아들의 말을 떠올리며 ‘그래도 생존훈련을 받은 전문가니까 제 몸은 잘 챙길 수 있겠지’하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문씨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만일 구조되지 못하면 어떡하나.’ 사고 당시 사랑하는 아들이 겪었을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이 떠올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지금도 아들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빠”하고 부르며 어디선가 내 품으로 돌아 올 것만 같았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잃는다는 것은 세상을 다 잃은 것이다. 자신의 생명과 바꿔서라도 자식을 살리고 싶은 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지난 8일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대책위원회·시민대책위원회가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에서 심해수색 완수와 유해수습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투데이신문
지난 8일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대책위원회·시민대책위원회가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에서 심해수색 완수와 유해수습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투데이신문

긴 투쟁의 시작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3일째인 4월 2일, 실종자 가족들은 스텔라데이지호의 선사인 폴라리스 쉬핑 부산지사에 모였다. 가족들은 선사 측에 “제대로 된 상황설명을 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선사의 직원들은 우왕좌왕할 뿐 누구 하나 명확한 설명을 해주는 이가 없었다. 폴라리스 쉬핑의 상무, 부장, 팀장이 돌아가며 상황을 설명했으나 저마다 말이 달랐다.

“모두 구명벌을 탔을 겁니다. 브라질 공군도 수색에 나섰으니 기다려보시죠.”

브라질 공군은 4월 2일 오후 4시 30분경 수색에 나섰다. 가족들은 수색에 나선 브라질 공군의 연락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고 인접해역을 수색한 브라질 공군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실종자 가족들은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가족들은 선사 측에 수색 선박 투입 등 적극적인 구조활동을 요구했다. 그러나 선사 측은 수색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어쩌면 상황이 바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가족들은 희망을 놓지 못하면서도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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