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를 가르칠 때에는 추측으로 출발점을 삼아야 한다. 한 가지 일을 겪어서 요점을 터득하면 두어 가지를 미루어 보는 것이 천백 가지에 이르게 된다.”<최한기(崔漢綺, 1803-1877), 『인정(人政)』,  「교추측(敎推測)」 중>

최한기의 멋진 말

나는 한자나 한문을 강의하는 선생으로서 늘 ‘어떻게 해야 학생들이 내용을 잘 받아들이고, 공부에 흥미를 느끼게 할까?’를 고민하고 있다. 내용을 받아들인 다음엔 기억을 하도록 해야 하는데 이건 또 어떻게 해야 할까. 수업할 내용을 공부해 놓는 것도 쉽지 않지만, 사실 이런 걸 생각하는 게 더 어렵다. 여러 선생님들이 말하는 방법을 주워 듣기도 했는데, 나하고 맞지 않았다. 그 분들 방법이 잘못되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 방법이라는 건 자기한테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강의 시작 전에 늘 ‘어떻게’를 고민하지만 쉽게 해답을 찾기 어려웠고, 실은 지금도 뭐가 좋은 거라고 단정하지 못하겠다.

전공이 전공이다 보니 옛 사람들 글에서 길을 찾아보려했다. 우연찮게 조선 후기 실학자 최한기(崔漢綺, 1803-1877)의 글을 읽게 됐다.

“초보를 가르칠 때에는 추측으로 출발점을 삼아야 한다. 한 가지 일을 겪어서 요점을 터득하면 두어 가지를 미루어 보는 것이 천백 가지에 이르게 된다. 그것이 정신과 기운에 쌓이면 저절로 헤아림이 생겨 앞뒤가 증험되고 피차가 발전한다. 공부에 단계가 생기고 공부 과정에 확실한 근거가 생겨서 배우는 사람에게 크고 작은 보탬이 있게 된다. 예전에 한 가지 일을 잘못 오해했다면 오늘 다른 연구를 함으로 인해 전의 잘못을 깨닫게 된다. 여러 차례 전에 알게 된 것의 착오를 깨달으면, 미루어 보는 것이 점점 정밀해지고, 헤아림도 점점 익숙해진다.”<최한기(崔漢綺, 1803-1877), 『인정(人政)』, 권 11 「교추측(敎推測)」 중>

나는 이 글을 ‘무조건 주입하지 말고, 학생들을 생각하도록 하는 게 좋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생각하는 버릇이 들면 점점 그 생각이 해답에 가까워지고, 무언가를 잘못 알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하면서 그 잘못을 바로잡게 된다. 선생은 학생의 생각을 돕고, 선생이 원하는 답을 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고 생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최한기는 ‘어떻게’에 대한 답까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이럴 땐 어쩔 수 없다. 최한기의 말대로 나도 추측을 해서 해답을 찾고 그 해답대로 하는 수밖에….

슬프다고 말하지 않아서 슬프다

예전에 초등학교 5학년 세 명, 3학년 세 명, 모두 여섯 명을 앉혀 놓고 한시(漢詩)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아, 젊은 아주머니 한 분도 오셨다.

“원래 제 딸이 신청했는데요. 오늘 못 왔고요. 어떤 수업인가 보고 싶어서 왔는데요. 들어도 될까요?”

그러시라고 하고, 곧바로 강의를 시작했다.

“당나라 맹호연(孟浩然, 689-740) 「봄날 아침에」 라는 시에요. 읽어볼게요. ‘봄날 잠에 날 새는 줄 몰랐는데, 곳곳에 새 소리 들리네. 간밤에 비바람 소리 들렸는데, 꽃은 얼마나 떨어졌을까.’.”

다 읽고 내가 물었다.

“이 시 어때요?”

“좋아요.”

“뭐가, 왜 좋아요?”

“봄 기분이 들어서요.”

“하하, 좋아요. 또 다른 사람.”

3학년 여학생이 손을 번쩍 든다.

“흠, 원래 시는요. 말을 빙빙 돌리잖아요. 그런데 이 시는 이해하기 쉬워서 좋아요.”

후대 비평가들은 이 시의 장점으로 ‘말이 쉽다’는 점을 꼽는다. 그래, 하나 잡아냈구나.

“맞아요. 이해하기 쉬워요. 그런데 그것만으로 좋을까요?”

“…”

“하하, 다 같이 다시 소리 내면서 한 번 읽어 봐요. 읽으면서 생각을 해 봐요.”

소리 내서 읽는다.

“자, 읽어보니깐 어때요?”

아이들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을 시작한다.

“시에 새소리, 비바람소리가 나오잖아요. 소리를 이용해서 좋은 건가요?”

“아주 좋네요. 그것도 좋은 답이 될 수 있겠네요.”

이번에는 조선의 시인 이달(李達, 1539-1612)의 「무덤에 제사지내고」를 함께 읽었다. 임진왜란의 아픔을 읊은 시다. 학생들한테는 배경을 이야기 해 주지 않고, 우선 함께 읽었다.

“흰둥이 앞서가고 누렁이 뒤따르는, 들밭 풀 사이 무덤이 즐비하다. 제사 마친 할아버지는 저물녘 들판 길을, 손자의 부축 받아 술에 취해 돌아가네.”

내가 말했다.

“이 시는 아까 것보다 좀 어렵죠? 무겁게 느껴지기도 할 거고요. 무슨 소린지도 모르겠고 어렵죠? 우선 이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세요.”

잠시 후에 물었다.

“자, 어떤 느낌이 들어요?”

이번에는 아이들이 주춤주춤 대답을 하지 못한다.

“하하, 어려운 거 아니니까 느낌만 말해 봐요.”

“슬퍼요.”

“왜 슬퍼요?”

“제사 지내는 거니까 슬프죠.”

“하하, 제사 지내는 게 왜 슬퍼요? 그냥 제사 지내는 건데?”

“사람이 죽은 거잖아요. 그러니 슬프죠.”

“그래요. 좋아요. 그럼 죽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흠, 할아버지의 아들, 아니면 딸?”

“좋아요. 그럼 손자한테는 뭐겠어요?”

“아! 그래서 손자를 등장시킨 거구나.”

“하하, 맞아요. 할아버지하고 손자만 있잖아요. 그게 핵심이에요.”

“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참 슬프구나.”

“슬프죠. 그럼 여기에서 슬픔을 더 깊게 해주는 게 있어요. 그게 뭘까요?”

“그게 시 안에 들어 있어요?”

“들어 있죠. 다시 읽어 볼까요?”

다시 읽더니 한 학생이 급히 말을 한다.

“아! ‘저물녘’이네요.”

“그래요? 저물녘인데 왜 슬퍼요?”

“해가 질 때까지 무덤에 있었다는 거잖아요. 집에 안 가고….”

“하하, 그러네요? 두 사람은 무덤에 오래 머물렀어요. 그 시간까지 다 들어 있는 겁니다. 마지막 질문 드릴게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게요. 이 시가 슬프다고 했잖아요? 왜 슬픈 거 같아요?”

“잘 모르겠는데요.”

“힌트하나 드릴게요. 여러분이 지금 시를 쓴다고 생각해 봐요. ‘교실이 조용하다’는 말을 어떻게 쓸래요?”

“시계 똑딱 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좋아요. 다른 사람.”

“종이에 연필 가는 소리만 들린다.”

“그렇죠. 그럼 답이 나왔네요. 이제 이 시가 왜 슬픈지 말해 봐요.”

“아! 슬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좋은 대답이네요. 슬프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림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독자한테 슬픈 마음을 들게 만든 겁니다.”

스스로 생각하게 하세요

이렇게 아이들과 두 시간을 함께 했다. 다행히 아이들이 즐거워했다. 수업이 끝나자 아까 들어와 있던 아주머니가 나한테 와서 한 마디 한다.

“어떻게 3학년이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그렇죠? 저도 신기하네요. 그런데 조금만 도와주면 누구나 저런 말을 할걸요 아마?”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가르치려고 하지 마시고, 아이 스스로 생각을 하도록 이끄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말은 저렇게 했는데, 나도 잘 되진 않는다. 욕심이 생겨서 빨리 외라고 학생을 닦달할 때도 있다. 일일이 다 이해시키는 게 힘이 들어서 일방적으로 설명을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최한기의 글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잡는다.

▲ 김재욱 칼럼니스트▷저서 군웅할거 대한민국 삼국지한시에 마음을 베이다왜곡된 기억 외 6권
▲ 김재욱 칼럼니스트
▷저서 <군웅할거 대한민국 삼국지>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왜곡된 기억 >외 6권

최한기의 말은 옳지만, 내 방식은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안다. 과목마다 특성이 있으므로 그에 맞는 방법이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다만 학생을 가르칠 때 일방적으로 강의를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도 나름의 효과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초보를 가르칠 땐 추측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이 말에서 ‘초보’ 딱지를 떼고 ‘학생’이라는 말을 넣어도 무방하겠다. 실력은 생각 속에서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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