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남자고등학교를 다녔다. 혈기왕성한 오십여명의 남자 아이들이 한 반에 있었다. 그 시기의 또래들은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몰려다니며 작은 집단을 이루기를 즐긴다. 내게도 자주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이름보단 짓궂은 별명으로 자주 불렀다. 물론 상대에 대한 짓궂은 마음은 일종의 친밀감 표시이거나 동류의식을 공유하려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약점이나 주눅들어 하는 부분을 굳이 상기시키는 건 어떤 이유로든 불쾌한 일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짙은 쌍꺼풀과 두툼한 입술과 곱슬머리가 튀었기 때문에 주로 외모가 별명이 됐다. 좋게 말해서 별명인 거지, 실은 나의 생김새가 농담의 소재로 종종 사용됐다

당연히 여드름 숭숭 난 꼬맹이들은 외모에 민감한 나머지 생김새를 가지고 놀리는 이야기만으로도 싸우게 된다. 하루는 무리의 친구 하나가 수업시간 내내 나의 곱슬머리를 놀렸고, 나는 쉬는 시간이 되자 마자 녀석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재미난 건 녀석의 태도였는데, 나의 계속 이어진 발길질이 영 솜방망이 같았는지 녀석은 웃기만 할 뿐 별 대항을 안했다. 놀린 게 미안한 것도 있었겠지만 어지간히 타격이 없었나보다. 

남학생들만 있는 집단에서 일상을 지배하는 심리적 기반은 힘의 우열이다. 누가 더 폭력적인가, 누가 더 폭력에 두려움이 없는가에 따라 관계가 정리된다. 공부 잘하는 아이도, 착해서 칭찬받는 아이도, 반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는 흥겨운 아이도, 결국엔 힘의 논리를 따르는 계단 어딘가에 위치하게 된다. 그리고 각자의 위치값은 졸업할 때까지 거의 바뀌지 않은 채 그 자체가 질서로 기능한다. 자신의 위치와 상대의 위치를 잘 알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폭력질서의 상위에 있는 친구들 사이에선 서로의 말투와 표정 하나하나에 긴장이 깃든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고만고만한 친구들 사이에서야 굳이 상대의 계급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상위 그룹에 비해 상호협력적이어야 이익인 데다 우열구분이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 내 발길질에 웃은 그 녀석도 계급이동에 아무런 효과가 없기 때문에 싸울 의지가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힘의 질서는 위로 올라갈수록 매사에 긴장감을 유발하게 만드는데, 그것은 하위그룹에도 고스란히 작용한다. 하위그룹 학생들은 상위그룹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매사에 말과 표정을 신경 써야 한다. 그러지 않았다간 언제 폭력상황이 생길지 모르니까. 누가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될지 알 수 없다. 이런 긴장감은 한 반 혹은 한 학급, 나아가 한 학교 전체에 퍼지게 된다. 그런 예민한 환경에서 성미 급한 어린아이들의 특질은 중재와 협력 같은 우아한 방정식을 원하지 않는다. 폭력의 조짐을 유난히 살피는 하루들이 이어진다. 폭력질서의 공기가 지배하는 이 작은 세계의 피로감은 일상을 알게 모르게 장악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자신의 고유함을 바탕으로 친구사이에서 자유롭고 바른 태도를 갖추길 바라지만, 현실에선 폭력의 불씨를 예의주시하며 예민하고 피곤한 안테나를 세워야 하는 것부터 배운다. 

청소년 자살 원인 중 상단을 차지하는 것은 언제나 성적과 친구관계다.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미래를 생각하며 공부든 취미든 자기다운 자신을 추구할 시간이 하염없이 모자란 게 청소년기다. 그런데 폭력의 긴장 속에 있게 된다. 만약 학생들이 관계에서의 폭력에 덜 민감해하고 염려 안 해도 되는 환경 속에서 산다면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학생의 현재와 미래에 중요한 도움이 되리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짐작할만 하다. 걱정없이 지금을 살 수 있는 것, 걱정할 시간에 자신에게 충실 할 수 있는 것, 공부를 한자라도 더 하거나, 취미를 하나라도 더 깊이 파고 들 수 있는 것. 그런 것들은 폭력에 대비해야 하는 긴장감과 정반대에 있다. 일상에서 폭력의 긴장을 제거해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아이들은 싸우면서 크지 않는다. 싸우지 않을 수 있는 방법과 화해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자란다.

이 이상적인 바람에 비해 현실은 늘 녹록하지 않다. 학교를 둘러싼 현실적인 문제는 한 둘이 아니고 한번에 수정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폭력의 냄새가 배인 일상을 바꿔야 하는 것은 학생들의 현재와 미래에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의 문제다.

어제 베트남 하노이에서 있은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됐다. 우리나라 입장에선 비핵화나 종전선언 등의 주제는 한반도 평화에 직결된 것들이었다. 폭력의 극단이 전쟁이고 전쟁의 일상화가 긴장감이다. 그 긴장감에 할애해야 하는 사회적인 유무형의 노력들로 인해 개인의 삶은 피로해진다. 그런 점에서 이번 회담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했다. 비록 회담은 결렬됐지만, 앞으로도 우리가 꾸준히 평화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일상에 배인 긴장의 제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이 사실관계를 무시하고 종전선언의 주체 같은 걸 따지는 건 사람들의 삶에 아무런 관심이 없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거창하게 통일이나 경제적 효과 같은 것들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일상의 긴장을 해소하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한 이유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 집중하는 건 거대한 담론이 아니다. 일상을 위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어려운 현실을 뚫고 평화를 위해 꿋꿋이 나아가야 한다.

내 발에 맞았던 친구를 작년에 만난 적 있다. 오랜만이라 애들처럼 웃고 떠들었다. 녀석은 그 때 일을 잊고 있었다. 싸울 생각이 없었으니까 잊은 모양인데, 나도 싸운다는 생각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사이엔 긴장감 같은 게 있지 않았다. 아이들은 싸우면서 크지 않는다. 싸우지 않을 수 있는 방법과 화해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자란다. 아니면 아예 싸울 이유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친해지는 방법을 배우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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