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를 가르칠 때 엄하게 단속해서는 안 된다. 엄하게 단속하면 기백이 약한 아이는 놀라거나 겁을 먹고 기가 성한 아이는 사나워지거나 침울해져서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이덕무(李德懋,1741-1793)>

혼날 때는 나야지

셋째 딸 하진이(고등학교 1학년)하고 동네 분식집에서 밥을 먹는다. 내가 말했다.

“아까 엄마가 둘째 언니한테 한소리 했는데, 언니가 말도 안 하고 휙 나가버렸어.”

“오늘? 저번에도 그랬는데, 그땐 엄마가 좀 심하게 뭐라고 한 거 같던데? 언니 이야기 들어 보니까.”

“그래?”

“상처를 좀 받았을 거 같아.”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런데 아빠가 보니깐 엄마는 네 명한테 똑같이 뭐라고 하는데, 너희들이 받아들이는 방식이 좀 다른 거 같은데?”

“그런가?”

“너는 엄마한테 혼나면 그걸 속에 담아 두거나 하지 않잖아? 아빠 보기에 뒤끝도 없는 성격인 거 같고….”

“그렇지. 나는 그래. 근데 언니는 말을 안 해 버리잖아. 그렇다고 해서 언니 성격이 나쁘다는 건 아냐. 언니 좋아. 스타일이 그럴 뿐이지.”

“아, 아빠도 그걸 나쁘다고 보지는 않아.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해. 어떤 성격을 지녔어도 다들 나름대로 생활하잖아. 그럼 되는 거지.”

“맞아.”

“그저 아빠는 엄마한테는 엄마 생각이 있고, 스타일이 있으니까 너희들이 좀 인정해 줬으면 좋겠다는 거야. 아빠도 너희들하고 같이 있지만, 엄마가 아빠보다 너희들하고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내잖아. 그러다 보면 자연히 하고 싶은 말도 많아질 거잖아. 사실 너희들 이것저것 챙겨주고 하는 게 당연한 거 같지만, 그거 정말 대단한 거야. 어찌 보면 그게 전부일 수도 있어.”

“흠, 알고 있어. 그래서 나는 엄마하고 안 싸우려고 해.”

“아빠는 되도록 잔소리를 안 하려고 하고, 혼을 안 내려고 한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빠 생각일 뿐이고, 엄마는 혼을 내야 할 땐 내야 한다고 생각하잖아.”

“혼날 때는 나야지. 시진이(초등학교 4학년) 봐봐. 오냐오냐 키워서 우리한테 막 하잖아. 호호호.”

“야, 하하, 뭘 시진이를 오냐오냐 키웠다고 그래. 그만하면 좋아. 언니들 틈에서 커서 배려심이 있어.”

“그건 좀 그렇긴 하지. 뭐 그래도 혼날 수도 있는 건데, 계속 혼내면 그 뭐지 반항심 같은 게 생겨서 좋지는 않은 거 같네.”

“그런데 혼을 내는 것도 엄연히 가르치는 방식 중의 하나야. 그걸 나쁘다고 보진 않아. 다만 혼날 준비가 된 사람한테 혼을 내야 한다고 봐.”

“혼날 준비?”

말이 쉬울 뿐 하려면 잘 안 되는 것

부모와 자식 간에 되도록 얼굴 붉히는 일이 없는 게 좋기는 한데 살다 보면 마음같이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은 그래선 안 된다고 하지만, 칼로 무 자르듯 냉정하게 자신을 다스리거나 주변을 살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되도록’이라는 말을 붙여 놓고 조심하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보며, 자식을 감정적으로 대했더라도 심한 자책감까지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부모는 사람이지 책에 나오는 성인군자가 아니고, 그런 여유를 가질 만큼 이 세상은 아름답지도 않다. 내 생각이 모두 옳지는 않겠지만, 다른 사람들 생각이 모두 옳다는 보장도 없다. 자신이 아는 만큼 생각하는 만큼 진심으로 아이를 대하면 그뿐이다.

아이는 혼내는 것 자체에 반감을 품기도 하고, ‘이 만큼’ 혼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도 할 것이고, 이 순간을 넘기자는 마음을 지닐 수도 있겠고, 반성할 수도 있겠다. 무엇을 느끼든 그건 전적으로 아이의 문제다. 그러나 잘못을 하면 그만큼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불쾌감을 느끼는 것도 어찌 보면 잘못을 한 탓이다. 이래서 나는 가끔 아이들한테 소리를 지르거나 혼을 낸다. 자주 그러지는 않는다. 이런 글을 읽었기 때문에 그렇다. 조선 정조 시기의 유명한 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글이다.

어린아이를 가르칠 때 엄하게 단속해서는 안 된다. 엄하게 단속하면 기백이 약한 아이는 놀라거나 겁을 먹고 기가 성한 아이는 사나워지거나 침울해져서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너그럽게 풀어줘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의지가 무딘 아이는 게을러지고 기질이 강한 아이는 방종해져서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말을 몰고 매를 부리는 것처럼 채찍을 항상 손안에 두고 상황에 따라 알맞게 조정하는 것이 좋다. <이덕무(李德懋),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 28, 「사소절(士小節)」 >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일상에서 실천하기 쉽지 않다. 염두에 두고 아이들을 혼낼 일이 생길 때마다 떠올려 볼 뿐이다. 나는 이런 글을 봐서 그렇다고 치는데, 하진이는 보지도 않고 어떻게 이덕무 같은 생각을 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건 좀 그렇긴 하지. 뭐 그래도 혼날 수도 있는 건데, 계속 혼내면 그 뭐지 반항심 같은 게 생겨서 좋지는 않은 거 같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생각은 비슷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상대의 방식을 존중해야

하진이하고 대화를 이어간다.

“하진아, 너 공부 좋아서 해?”

“아니.”

“그래. 아니잖아. 좋아서 하면 잘하고 싶어지거든. 그럴 때 한두 번 혼을 내면 분발을 할 수 있어. 상황 봐 가면서 혼을 내기도 하고 용기도 주고 하는 거지.”

“흠, 그럴 거 같네. 혼나도 잘하고 싶을 거니까.”

“그래. 그게 준비야.”

“그렇구나.”

“그러니까 너는 아직 혼날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거지. 공부 자체를 어려워하는데 거기 대고 혼을 내면 더 안 돼. 그래서 그냥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렇다고 해서 네가 막 잘했으면 하고 바라는 거도 없어. 뭐든 네가 필요해서 해야 하고, 너 스스로 좋아지도록 노력하면 되는 거야.”

“알았어. 호호.”

“그게 그런 거더라. 아빠는 어릴 때 할아버지가 혼내면 정말 열 받았거든. 공부하기 싫어 죽겠는데 잘하라고 혼을 내니깐 싫더라고. 그런데 대학원에서 공부할 땐 선생님들이 혼내는 걸 받아들이겠더라.”

“왜?”

“혼나는 게 싫기도 하고, 혼을 낸 선생님 욕도 하고 그랬지만, 아빠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고 좋아서 하는 거니까. 아빠는 그런 방식을 정말 싫어하지만, 그것도 가르치는 방법 중 하나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어.”

“그랬을 수도 있겠네.”

▲ 김재욱 칼럼니스트
▷저서 <군웅할거 대한민국 삼국지>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왜곡된 기억 >외 6권

“뭐 하여튼 엄마가 언니 혼낸 거 이야기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아빠는 엄마 방식이 틀렸다고 보지는 않아. 어떤 면에서 보면 아빠가 하고 싶은 소리를 엄마가 대신 할 때도 있어. 그러니까 너도 그렇고 언니도 그렇고 부모 마음을 조금 알아줬으면 좋겠네.”

“알았어. 호호.”

혼을 내는 아내나 혼을 덜 내는 나나 똑같이 자식을 사랑하지만, 아내가 나보다 더 힘들고 마음 아플 것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휙 나가던 아이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혼나는 일에도 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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