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낮으로 가르쳐 중도에 포기하게 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 성취가 많은가 적은가하는 것은 자제에게 달린 문제일 뿐, 부형에게 달려 있지 않다” <최한기(崔漢綺, 1803-1879)>

죄송합니다 아버님

셋째 딸 하진이는 네 자매 중에 가장 밝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다른 사람 배려도 잘 하는 편인 것 같다. 언니들 말을 들어 보니 하진이 교우관계가 매우 좋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집에서 하는 행동을 봐도 그렇다. 온 식구를 시야에 넣고 있으면서 잘 맞춰준다. 여행을 다녀오면 꼭 식구들 모두에게 줄 작은 선물을 챙겨온다.  

그러나 사람이 다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진이는 수학을 어려워한다. 또래보다 습득이 늦다. 하진이 자신도 답답해한다. 열심히 하는데 잘 안 되니까 그럴 테지. 이런 하진이를 보며 아내는 한숨을 쉬지만, 나는 괜찮다고 한다. 조금 느린 건 사실이지만, 꾀를 부리지 않고, 핑계를 대지 않으며, 남 탓도 하지 않는다.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큰 성과를 얻을 수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태도를 지니고 있으면 분명히 성취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언제 어느 날인가 우연히 하진이 수학학원 선생님한테서 온 전화를 내가 받았다. 아내 전화기로 연락이 왔는데, 이 때 아내는 집 전화로 다른 사람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 들리는 남자 선생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아, 선생님이세요? 저 하진이 아빠입니다.”

“네. 아버님. 이번에 하진이 수학 성적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아, 예. 저도 성적 봤습니다. 성적 낮은 거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하하, 선생님이 왜 죄송하세요? 선생님은 열심히 가르쳤는데 아이가 못 따라 간 거도 있으니, 그건 선생님 잘못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선생님은 학원에 계시니 또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겠는데요.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더 잘 가르치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계시면 부담이 돼서 선생님도 힘들고 하진이도 힘들 것 같습니다. 가르쳐보시니 하진이가 조금 느리죠?”

“예…. 조금….”

“선생님께서는 그래도 성적을 올려야 하니 열심히 가르쳤을 거고, 하진이도 의욕은 있는데 따라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더 몰아치면 아이가 포기할 수 있으니, 선생님께서 조금 참아 주시고, 차근차근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따끔하게 뭐라고 해야 할 때는 또 그렇게 해 주시면 좋겠고요. 아무래도 아이는 부모보다 선생님을 더 따르잖아요.”

“예.”

“제 말씀만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진이가 포기를 하는 아이는 아니니 조금 신경 써 주십시오. 성적은 낮아도 괜찮습니다. 선생님 믿고 보냈으니 앞으로도 믿겠습니다. 멀리 보고 가르쳐 주십시오. 저도 하진이한테 한 마디 해 놓겠습니다.”

“예. 아버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밤늦게 전화하신 거 보니 마음을 많이 쓰신 거 같은데 마음 놓으시고 편히 쉬세요.”

“예. 아버님. 안녕히 계셔요. 고맙습니다.”

선생님을 탓하지 않은 까닭

둘 모두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으니 전화를 하셨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낮에 하진이 표정을 보니 어두워서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다.

“사람 가르치는 방법은 먼저 그가 어떤 사람인지 헤아린 뒤에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그를 모두 헤아리면 가르침을 행하기 쉽고, 헤아림이 알맞지 못하면 가르침이 수고롭기만 해서 효과를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최한기(崔漢綺, 1803-1879), 『인정(人政)』, 권13, 「측지후교(測之後敎)」>

내가 잘못 봤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하진이는 끈기가 있고 성실한 아이다. 번쩍번쩍하는 기민함을 지닌 아이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기민해 지도록 가르칠 수도 있겠지만 강제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고, 안 되는 걸 갖고 되게 하라고 몰아치면 원래 가지고 있던 성실함도 잃어버릴 염려가 있을 것으로 봐서 뭐라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해야 하니 결과 생각하지 말고 잡고 있으라.’, ‘모르는 게 있으면 선생님께 질문해라. 모르는 건 잘못이 아니다’고 말해 주었다.

학원에선 아이들 성적을 올려 주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수강생을 모집하므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학원 선생님을 탓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미 결과는 나와 버린 데다 그 결과를 두고 죄송하다고 하는 사람한테 뭐라고 할 것인가. 좀 아쉬운 게 있기는 하다. 낮은 성적은 문제가 될 게 없다. 선생님이 방법을 찾고, 아이가 잘 따르면 성적은 올라간다. 선생님도 아이를 나처럼 헤아린 것 같은데, 왜 그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이해는 한다. 선생님이 선뜻 말을 꺼내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생각을 전한 것으로 만족했다.

“부형이 자제에게 배움을 권하는 내용은 어릴 적에는 사람을 응대하고, 나가고 물러나는 일, 부모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일, 문자, 옛 글을 외고 익히는 일인데, 밤낮으로 가르쳐  중도에 포기하게 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 성취가 많은가 적은가하는 것은 자제에게 달려있는 문제일 뿐, 부형에게 달려 있지 않다.”<최한기(崔漢綺, 1803-1879), 『인정(人政)』, 권11, 「부형권면(父兄勸勉)」>

어릴 적에 배우는 내용에 대해선 일부 동의하지 않는 면도 있지만, 나머지 최한기의 말에 동의한다. 아이가 공부를 잘 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것, 결과를 내느냐 내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부모인 내 소관이 아니다. 그건 자식한테 달린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럼 부모는 가만히 있으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되는가? 북돋아 주고, 때로는 야단을 치기도 하면서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느려도 괜찮아

다음날 낮에 첫째 딸 가진이하고 점심을 먹으면서 이 이야기를 했다. 가진이가 한참 듣더니 이런다.

“하진이가 지금은 저래도 나중에 공부 잘 하게 될 걸 아마.”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걔는 못해도 포기를 안 해. 끝까지 물고 늘어져. 몰라도 앉아서 버티거든. 끈기가 있어. 게임 같은 거 하는 거 봐도 성격이 나와.”

“그게 뭔 소리야?”

“게임 하나를 해도 꾸준히 오래해. 거기에 빠져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조금씩 해서 늘 탑을 찍어.”

▲ 김재욱 칼럼니스트
▷저서 <군웅할거 대한민국 삼국지>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왜곡된 기억 >외 6권

“아빠가 제대로 보고 있는 셈인가?”

“그런 거 같은데?”

그날 저녁, 하진이한테 학원선생님하고 통화했던 이야기를 해 줬다. 표정이 살짝 굳는다.

“하진아, 성적 안 올라도 되니까 포기는 하면 안 돼.”

고개를 끄덕인다. 얼마 동안 조용히 있더니 다시 웃고 떠든다. 나한테 말하지 못하는, 자신 만의 고민이 있겠지. 그래도 얘는 이렇게 털어 버린다. 공부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늦게까지 책상에 앉아 있다. 좀 느리면 어떤가. 느려도 괜찮다. 가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얘는 뭘 하든 잘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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