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예교국가(禮敎國家), 예(禮)로 국가를 통치하다
[칼럼] 예교국가(禮敎國家), 예(禮)로 국가를 통치하다
  • 이종우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3.22 11:2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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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근대 이전 한국의 종교를 묘사하는 말은 다양하다. 대표적인 것이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불교국가였다.’, ‘조선은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사회였다’라는 표현이 그 사례이다. 그리고 조선의 경우 ‘성리학이 사상적 배경이었다’는 표현이 많이 쓰였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조선의 종교 상황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예교국가”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예교의 사전적 정의는 “예의에 관한 가르침”이다. 사전적 정의만을 비춰봤을 때 예의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다양하다. 아직까지도 아이들에게 ‘어른을 보면 인사해야지?’라고 말하면서 인사를 시키고, 이에 대해 아이들은 쑥스러워 하거나, 이른바 “배꼽인사”를 하는 모습도 보인다. 또한 공공장소, 특히 개인의 가게에서 아이들이 소란을 피우는 모습에 대해 가게의 주인이 ‘노키즈존(No Kids Zone)’을 만드는 모습, 그런 아이들을 제제하지 않는 어머니들에게 “맘충”이라고 표현하고, 거기에 대해 반발하면서 토론이 이뤄지는 모습이 보인다. 이것은 한국 사회에서 공공질서의 차원을 넘어서는 “예의”의 문제에 대해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개인적으로 “맘충”이라는 표현은 너무 과하다고 생각한다) 즉 이러한 모습은 우리 역사에서 오랫동안 뿌리박혀 있는 예의에 대한 강조가 오늘날까지 계승되는 것의 일면이라는 의미이다.

실제로 “우리 역사에서 오랫동안 뿌리박혀 있는 예의의 강조”는 그 유래가 깊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나라에 대해 자타 공히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고 부르는 것을 꼽을 수 있다. 금장태는 “한말 도학자인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는 일제의 강압에 의한 합방에 항거해 단식 자결하면서 절필(絶筆)로서 ‘예의조선(禮義朝鮮)’이라 큰 글자 넉 자를 썼던 사실에서도 ‘예의(禮義)’를 조선의 문화적 중심 개념으로 확인할 수 있다.”1) 는 예를 제시했다. 그리고 이 예를 근거로 “우리의 전통문화는 유교문화의 영향 아래 의례가 발달하고 광범하게 실천됨으로써 ‘동방예의지국’으로 일컬어졌으며, 그것은 우리의 문화적 자부심을 대표하는 호칭으로 받아들여져 왔다.”2) 고 주장했다. 즉 한국 사회는 예전부터 예의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평가 받았으며, 현재까지도 이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그런데 예교의 정의를 사전적 정의 차원에서 조금 확산하면 그 내용은 사뭇 종교적인 모습을 띈다는 주장도 있다. 장기근은 “예교(禮敎)는 만물의 근원이며 생성발전(生成發展)의 주재자(主宰者)인 천(天)의 절대 진리·절대선을 본성으로 좇아 행하고, 또한 남들도 천도(天道)를 따르고 행하게끔 교도(敎導)하는 것이다.”3) 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상당 부분 특정 종교 중심적인 종교의 정의를 전제로 한 것으로 보인다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막상 중요한 것은 “교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교”라는 단어와 “국가”라는 단어가 결합되었을 때 국가 차원에서 “예(禮)”를 통한 통치를 지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교사회는 대중을 통제하는 정치의 기본방법으로 예(禮)·악(樂)·형(刑)·정(政)을 들고 있다.”4) 는 금장태의 설명은 국가 차원에서 예가 기본적인 통치 방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뒷받침해준다. 

이러한 모습이 가장 극대화 된 시기는 조선시대였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을 것을 공식화했는데, 그 구체적 실천으로 고려 말부터 조선 개국의 기반이 된 세력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보급했다. 그리고 조선 개국 이후 『주자가례』는 본격적으로 확산됐는데, 이것은 국가의 차원에서 이뤄졌다. 특히 조선 개국 초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제작해서 국가 차원의 의례를 성리학의 예법에 맞게 정비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이르면 『주자가례』를 가정의 관혼상제(冠婚喪祭)와 마을공동체의 의례에 이르기까지 확산됐다.

이러한 모습은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남긴다. 우선, 예의 과도한 강조가 의례의 번잡함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허례허식(虛禮虛飾)”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쓰일 정도였다. 그 예로 가문에서 빈번하게 설행(設行)되는 각종 제사를 들 수 있다. 또한 국가의 의례에 대한 개입이 해방 이후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박정희 정권 때 제정되었던 “가정의례준칙”인데, 이것은 우리나라가 상당 기간 근대 이전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  금장태, 『한국 유학의 탐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2)  위의 글.
3)  장기근, 「예(禮)와 예교(禮敎)의 본질(本質)」, 『동아문화』, 1970, 77쪽.
4)  금장태, 위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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