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우리나라 대중은 연예인에게 엄격하다. 도덕적 잣대의 기준이 웬만한 장관급 인사 청문회 수준이다. 

아니, 언론에 항상 노출돼 있는 그들의 삶을 볼 때 어쩌면 연예인은 정치인보다 혹독한 환경에 놓여있는지도 모르겠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엄혹함은 주로 스타 연예인들에게 집중된다. 그들은 대중적인 명성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큰 성취를 이룬 사람들이다.

오늘날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들은 과거엔 왕족이나 하다못해 귀족 쯤은 돼야 누렸을 법한 이익들을 얻는다. 날 때부터 귀한 몸이거나 폭력으로 쟁취하지 않으면 결코 가질 수 없는 권력을 갖고 있어야 가능했던 것들이다. 현대의 대한민국에서 보통사람이 아무런 권력기반 없이 욕망을 실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돈을 크게 모으는 것이다. 게다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결합한 나라에 사는 우리는 자본주의가 계층 이동을 이끌어 권력의 분산에도 쓸모 있다고 믿는다. 우리사회에서 사회적 성공이란 사실상 경제적 성공을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는 개념이다.

이런 세상에서 돈을 잘 버는 사람은 긍정의 대상이다. 성공, 그로 말미암은 계층의 상승이 그 자체로 선이 된 지 오래다. 일단 어떻게든 부의 축적에 성공한 이들은 지지를 받는다. 대중이 자신들의 욕망을 긍정하기 때문에 욕망의 실현에 성공한 다른 이들을 긍정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더하여 성공 그 자체가 능력을 보여준 것이므로 그들에게 성공의 대가를 누릴 자격을 따로 묻지 않는다. 다소의 결함이 있더라도 용인 해 준다. 자본축적 과정에서의 허물들은 끝을 모르는 집념과 불굴의 의지 정도로 선해 해준다.

일단 성공하는 것에 성공하면 웬만한 잘못은 대부분 덮어진다. 원하는 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대를 갖게 된다. 이는 인간 대부분의 원초적인 바람이자 성공을 바라는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희망이다. 때문에 자본을 쌓아서 힘을 가지든, 누군가의 힘에 기대서 자본을 축적하든, 그들이 사회 상층부에 도달하여 권력을 나눠 갖는 것에도 매우 관대하다. 이 관대함에 대한 학습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꾸만 위로 올라가도록 부추긴다. 미친듯이 스펙을 쌓게 만들고 수단을 가리지 않는 돈벌이에 나서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지능, 뿌리깊은 가문, 선대의 경제력, 온 일가의 사회적 관계망 등 개인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이 총동원 된다. 그러나 자신만큼 쟁쟁한 경쟁자들은 성공의 길을 좁게 만들고 소수만이 목표를 성취할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쳐서 나가 떨어지거나, 아예 처음부터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런 환경에서 오로지 자신의 몸 하나에 깃든 재능과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분야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연예계다. 연예분야는 흔히들 말하는 ‘노오력’이란 걸 해서 그 만큼의 대가를 얻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시장 중 하나다.

스펙이나 배경이 좋으면 당연히 연예활동에도 더 많은 기회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결국엔 실력이 가장 중요하게 대접받는 직업이 연예인이다. 가진 게 없을 수록 출구가 좁아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례적일만큼 공평한 기회가 연예계에 있다. 노력도 재능의 일부라 생각할 때, 연예인으로서의 성공이란 거의 대부분 그들이 가진 보통 사람 이상의 재능 덕분이다. 이들의 재능은 평범한 사람들의 경제감각을 크게 뛰어넘는 수익과 연결된다.

그러나 대중이 연예인의 성공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양가적인 면이 있다. 사람들은 개인이 사회로부터 가져가는 이익의 규모가 합리적이길 바란다. 특정한 개인의 이익이 일반대중의 평균을 크게 웃돌 때엔 그걸 가질 자격이 있는지 따지게 된다. 내 몫일 수도 있던 것을 다른 사람이 부조리한 방법으로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대중문화의 소비자인 대중은 스타 연예인의 능력을 인정해 고액출연료와 천문학적인 수익을 가능케 해 주지만, 그들이 그런 부를 가질 자격이 있는지 계속 살피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스타 연예인에게 회초리를 드는 경우란, 평균 능력을 상회하는 게 이미 입증된 그들의 재능 바깥의 것들로 주로 한정된다. 평범한 사람들이 당연하게 실천하여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자신하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예의를 갖춰 행동하며 법을 지키는 것 등이다.

따라서 연예인에 대한 엄격함의 첫번째 의미는 단순하게 설명될 수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을 잘 지키는 나보다, 규범을 어기는 사람의 이익이 더 커서는 안된다.”

원래 이런 잣대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공인에게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규범을 어기는 사람은 공공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으로 사유화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치권력이 시민사회로 분산된 민주주의 사회, 특히 정보기술이 발달하여 대중을 상대로 자신의 목소리를 쉽게 전달 할 수 있는 오늘날엔 사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이들도 공인의 역할을 나눠 맡곤 한다. 정치인이나 법조인뿐 아니라, 대중의 신뢰를 받는 지식인이나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하여 목소리가 커진 이들도 넓은 의미에서 공인의 기준을 적용 받게 된다. 경제적 부를 크게 성취했으며 언행 하나하나가 문화권력이 되는 스타 연예인도 당연히 여기에 해당한다.

스타 연예인을 향한 엄격함의 두번째 의미는 “사회의제에 파급력이 높은 만큼 사회적 책무를 다하라”라는 요구로 볼 수 있다.

유독 스타 연예인들에게만 '공인으로서의 책임감'을 이유로 엄격한 여론 재판이 일어나는 건, 그들이 항상 대중의 깊은 관심 속에 노출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엔 그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다른 이들과 달리 고스펙 취득 등과 같은 고통스러운 과정없이 몸 하나로 성공했다고 여기는 측면도 있다. 대중은 그들의 성공을 인정하지만, 좀 더 엄격히 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다른 성공한 사람들에 비해 잘못을 덜 면죄한다. 즉 스타 연예인들은 공인으로서의 자격과 지나친 관대함을 누리는 면죄 자격의 중간 어딘가에 놓여 있다. 그들은 대중이 일으키는 분노의 출구를 담당하는 삶을 산다.

이런 현상은 권력을 가진 이들이 개입한 사건을 연예인의 문제로 바꾸는 일에 자주 활용된다. 아이돌 스타가 연루된 것으로 의심받는 클럽 버닝썬에서의 마약류를 이용한 성폭력 사건은 해당 연예인의 이름을 중심으로 유통됐다. 여자연예인에게 언론사 사주 성접대를 강요한 혐의를 받는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곤 주변의 다른 연예인 이름이 관련하여 계속 소환된다. 그 결과 강력히 의심되는 권력의 그림자는 주변부로 밀려난다. 같은 결에서 김학의 전 차관이 혐의를 받고 있는 ‘별장 성폭력 사건’도 권력의 이름을 지우며 ‘별장 성접대 사건’으로 명명됐었다. 

특히 클럽 버닝썬 사건은 이 모든 이야기들의 축소판이다. 스타가 되어 계층 상승을 원하는 젊은 청년, 경제적 성공으로 한발짝 꿈에 가까워진 스타 연예인, 그가 진입하고 싶어하는 면죄부를 획득한 권력 주변부의 부유층, 그들과 한 몸으로 섞인 것으로 의심되는 권력기관과 인물들,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스스로를 보호하는 구조적 카르텔. 여기에서 스타를 지망하는 청년의 욕망은 보통 사람들의 부를 향한 욕망으로 충분히 바꿔 읽을 수 있다. 

물론 이 와중에도 희망을 발견한다. 시민들의 여론은 자칫 연예인 이야기로만 흐를 뻔한 사건들을 권력의 문제로 계속해서 지목하여 시류를 이끌었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실감을 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마냥 반길 수만은 없다.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의 욕망을 이야기 할 뿐이다. 나는 이 글에서 어떤 사람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버닝썬 사건의 최초 제보자는 클럽에서 한 여성이 성추행을 당할 위기를 목격하고 이를 말리다가 폭행을 당했다. 그의 제보 이후 사건은 일파만파 퍼져 나가 현재에 이르렀다. 언론과 대중은 권력과 욕망이 일으킨 장면을 파헤친다. 이 글에서도 그런 이야기만 적었다.

그러나 제보자가 보았던 그 위기의 여성은 어떻게 됐을까. 언론에선 그 당시 일어난 사건 자체, 피해자일지 모를 그녀의 이후 행적을 파헤치지 않는다. 우리가 버닝썬을 둘러싼 욕망의 관련자들을 하나씩 끌어내는 동안, 그녀는 폐쇄되어 캄캄한 강남의 클럽 어딘가에 여전히 묻혀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재다. 

우리는 그녀가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아직도 그곳에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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