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행동주의 펀드 주총 적극 개입
배당확대 요구 등 ‘주주 행동주의’ 본격화
전자투표 확대 불구 주총 집중개최 반복
“주주 목소리 전달 위한 제도 개선 필요”

지난달 27일 열린 대한항공 주주총회 모습ⓒ뉴시스
지난달 27일 열린 대한항공 주주총회 모습ⓒ뉴시스

【투데이신문 최병춘 기자】 올해 상장사 주총 풍경은 과거와 사뭇 달랐다. 주주의 기업 의사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른바 ‘주주 행동주의’ 성향이 뚜렷이 나타났다. 배당확대 등 기업들의 주주 친화 기조가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주주총회 과정에서 주주의 반발로 사상 처음으로 재벌 총수를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제안 등도 활발해 지면서 강화된 주주 영향력이 그 어느때보다 두드러졌다. 하지만 주총이 한날 몰려 개최되는 ‘슈퍼주총데이’가 반복되는 등 여전히 적극적인 주주 참여에는 한계를 보였다는 평가도 나온다.

‘주주의 이름으로...’ 주주 행동주의 강화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이 주주들의 반발로 대한항공 사내이사직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사건이었다.

지난달 27일 열린 대한항공 정기 주주총회에서 주주의 동의를 얻지 못해 조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 안건이 부결됐다. 당시 정기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은 73.8%의 출석률을 기록했으며 출석 주식의 64.1%가 조 회장의 재선임 안에 찬성했고 35.9%가 반대했다. 대한항공 정관상 사내이사 선임 규정에 따라 주총 참석 주주의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지 못한 조 회장은 사내이사직을 잃게 됐다.

이 결과로 조 회장은 주주 손에 물러난 최초의 재벌총수가 됐다. 동시에 국내 주주 행동주의가 보여준 대표적인 성과로도 꼽힌다.

조 회장의 퇴진에는 국민연금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동안 소극적인 주주권 행사로 ‘주총 거수기’라는 오명을 썼던 국민연금은 지난해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 의결권행사 지침)를 도입, 적극적으로 의사결정 참여로 태도를 전환했다.

대한항공의 경우 주총 전날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가 격론 끝에 조 회장의 연임을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횡령‧배임’, ‘땅콩회항’, ‘물컵갑질’ 등 조 회장과 총수 일가가 사회적 물의를 빚은 것과 관련해 국민연금이 ‘기업가치의 훼손 내지 주주 권익의 침해 이력이 있는 이사 후보에 대해서는 반대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본격적으로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용한 것이다. 같은 이유로 국민연금에 앞서 시민사회 단체가 조 회장 연임 반대를 위한 의결권 위임 운동을 벌이고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 ISS 등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도 반대 투표를 권고했다.

결국 이 같은 분위기 속에 국민연금의 반대표에 소수(소액)주주와 일부 기관, 외국인투자자까지 동참하면서 조 회장 퇴진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기존 주요 대기업 주주총회에서 소수주주와 기관투자자가 대주주 손을 들어주는 이른바 ‘거수기’ 역할을 했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다. 이에 시장에서는 조 회장의 퇴진 사건으로 ‘주주 행동주의’가 더욱 힘을 받을 수 있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간 국내는 재벌 총수의 강력한 지배력으로 소수주주의 권리는 무시돼왔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사 선임 등 주총 안건은 사실상 확정안에 가까울 만큼 표결에 의미를 두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행동 이전부터 주총을 앞두고 분위기는 변하고 있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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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의 등장 이전에 주목받은 것은 행동주의 사모펀드의 행보였다.

토종 행동주의 사모펀드 KCGI, 일명 강성부 펀드는 한진그룹을 대상으로 지난해 11월 한진그룹 지수사격인 한진칼의 2대 주주로 등극하면서 총수일가 경영권을 위협해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주총에서 주주들의 반대로 부결됐지만 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의 배당 제안 사외이사 추천 제안을 현대자동차와 현대모비스가 의안으로 상정한 것도 이례적인 사례다. 이 밖에도 미국계 펀드인 SC펀더멘털의 감사 선임 등 주주 제안을 무학이 받아들여 주총 의안으로 상정하기도 했다.

이 같은 행동주의 펀드의 제안이 주총에서 승인되는 결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대주주가 아닌 소수주주의 영향력을 강화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KCGI의 적극적인 개입에 한진그룹은 배당 확대 등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혁신안인 ‘한진그룹 비전 2020’를 내놓게 했다.

주요 상장사들이 적극적으로 배당 확대에 나선 것도 과거보다 커진 주주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상장사들은 지난해 결산에 대해 30조원이 넘는 사상 최대 배당을 추진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가 지난 2월 17일 내놓은 자료를 보면, 배당을 공시한 499개 코스피·코스닥 상장사(14일 기준)가 밝힌 배당금은 26조2676억원으로, 이들 기업의 전년도 배당액(20조8593억원)보다 26%나 증가했다. 지난해 총배당액이 25조5020억원으로 올해 배당액은 30조원을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특히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국민연금이 지난해 주주총회에서 저배당을 지적한 현대그린푸드, 남양유업, 휴온스 등 상당수(10개 상장사 중 7개사) 상장사가 전년대비 배당을 크게 늘리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과거에 비해 주주의 목소리가 커지는 변화가 온 것은 분명하지만 대부분이 성과를 본 것은 아니다.

실제로 조 회장 사내이사 연임 부결 결과를 제외하고 대부분 주주 제안 안건이 부결됐다. 지난 29일 진행된 한진그룹 지주회사인 한진칼 주총에서 국민연금이 주주제안으로 내놓은 ‘횡령‧배임 등의 혐의로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된 이사는 결원으로 본다’는 이사 자격을 강화하는 내용의 정관변경 안건이 부결됐다.

이 밖에도 국민연금이 올해 들어 반대 의결권을 행사한 상장사 11곳의 주주총회에서 대주주와 표 대결을 벌였지만 대부분 졌다. 국민연금은 신세계·한미약품·현대건설·농심 등의 주총에서 사측의 사외이사 또는 감사 승인 안건에 반대표를 던졌지만 부결로 이어지진 않았다. 또 아세아에선 정당한 사유 없이 집중투표제를 배제한다는 이유로 정관 변경에 반대 의사를 밝혔지만 다른 주주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서 회사 측 안건이 원안대로 통과됐다.

행동주의 펀드가 내놓은 주주제안 안건도 대부분 부결됐다. 지난달 22일 열린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의 정기주총에서는 엘리엇이 제안한 총 8조3000억원 규모의 현금배당 및 사외이사 후보 추천 등 안건이 모두 부결됐고 강남제비스코에 현금배당과 사외이사 선임을 제안한 미국 헤지펀드 SC아시안오퍼튜니티 역시 고배를 마셨다. 게다가 지난달 29일 주총에서 한진칼과 표 대결을 벌일 계획이던 국내 행동주의 펀드 KCGI는 상법상 주주제안 자격을 인정받지 못해 아예 주총에 안건조차 상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주주 행동주의 측면에서 소수주주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처럼 주주 행동주의는 올해 주총 시즌에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지만 과거에 비해 주주제안이 활성화 됐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강서구 아시아나항공 본사에서 정기 주주총회 모습ⓒ뉴시스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강서구 아시아나항공 본사에서 정기 주주총회 모습ⓒ뉴시스

되풀이 된 ‘슈퍼주총데이’ 아직까지 높은 참여의 벽

다만 주주의 목소리가 커졌지만 주주총회에 주주의 적극적인 의사 참여를 위해서는 여전히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주들의 주총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기업들이 전자투표제도 도입이 확대되는 등 변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주주 참여가 제한되는 것을 막고자 주주총회 분산정책을 실시했지만 여전히 특정일에 주총이 쏠리는 ‘슈퍼주총데이’ 현상이 올해도 반복됐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하루에만 한진칼, 아시아나항공 등 상장사 597곳(유가증권시장 173개사, 코스닥 364개사, 코넥스 60개사)의 정기 주주총회가 열렸다. 전체 상장사가 2265개사임을 감안 하면 사실상 전체 상장사 중 3분의 1 가까이가 이날 주총을 연 것이다. 이에 앞서 지난달 22일에도 361개사, 28일에도 192개사가 주주총회를 열었다.

주총이 몰린 지난달 22일, 28일, 29일은 모두 금융당국 등이 ‘주주집중 예상일’로 예고하고 가급적 주총 개최를 피하도록 권고했던 날이다.

지난해 금융당국은 ‘주총분산 자율준수 프로그램’ 등을 실시하는 등 기업들에게 주총 분산 개최를 독려했다. 주총 쏠림 현상이 주주 참여를 제한한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기업이 한꺼번에 주총을 열면 다수 기업에 투자한 소수주주들은 자신이 주주로 있는 기업의 주총에 모두 참석하는 것이 어려워 주주로서 권리를 제대로 행사할 수 없게된다.

그간 기업들이 결산이나 이사‧감사 선임 등 민감한 안건이 있을 경우 주주의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를 방해하기 위해 일부러 집중일에 주총을 개최한다는 비판도 제기돼 왔다.

이에 금융당국의 주총 분산 유도 정책에 따라 지난해부터 상장사협의회와 코스닥협회는 주총 일정을 미리 신고하고 집중일을 피해 주총을 개최할 경우 불성실공시 벌점 감경 등 인세티브를 제공하며 주총 분산개최를 유도했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총 집중 개최 관행은 크게 개선되지 못했다. 이에 일각에서는 강제력이 없는 금융당국의 주총 분산 정책의 실효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최근 확대되고 있는 전자투표제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전자투표제는 주주가 주총에 직접 참석하지 않아도 전자적인 방법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소수주주의 의사참여를 높이기 위한 제도다.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 3월까지 정기주총에서 예탁결제원의 전자투표‧전자위임장 서비스를 이용한 12월 결산법인은 총 564개사로, 지난해보다 15.3% 증가했다.

전자투표를 도입한 기업이 늘어나고 있는 이면에 도로 철회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코스피 상장사인 KISCO홀딩스, 한국철강, 한솔홀딩스, 한국주강, 이수페타시스, 코스닥 상자사인 대창스틸 등은 지난해 도입했던 전자투표를 올해 정기주총에서는 도입하지 않기로 했다. 주총이 열리는 본사가 지방도시에 있는 제조 업체를 중심으로 전자투표 철회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해당업체들이 소수주주 의결권 행사와 주주행동주의를 막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행동주의 펀드를 표방하고 있는 밸류파트너스 김봉기 대표는 “작년에 전자투표제를 도입했다가 올해는 시행하지 않는 곳도 많다”라며 “아직까지 주총 등 의사결정 과정에서 대주주가 유리한 게 사실이다. 소수주주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해질 수 있도록 관련 제도의 개선이 더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기업의 주주총회에서 주주권 행사를 강화하기 위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지난달 4일 낸 논평을 통해 “그 동안 우리나라는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사외이사, 이사회내 위원회, 임원보수 공시 등 여러 제도를 도입하여 운영해왔으나 기업들의 변화는 더디기만 하고 우리나라 주식시장은 여전히 취약하다”며 “정부와 여당은 더 늦기 전에 지배구조 개선 상법 개정안을 처리하고, 주주권 행사에 장애가 되는 요인을 면밀하게 점검해 추가 제도개선에 착수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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