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마음은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고, 꾸중 듣는 것을 싫어한다. 이래서 친구가 서로 권면할 때, 확실히 나무랄 게 없다는 걸 알았다면 입 밖에 내려하지 않는다. 하물며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작으면 총애를 잃고, 크면 죽임을 당하니 진심으로 요구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자기를 해치는 일을 하려 하겠는가?” <이익(李瀷, 1681-1763>

높은 점수는 주기 어려워

첫째 딸 가진이는 모 대학 미디어영상 관련 학과에 재학하고 있다. 어느 날 저녁, 가진이가 노트북을 들고 식탁으로 왔다.  

“이거 내가 연출한 영상인데 한 번 봐줘.” 

“무슨 내용인데?” 

“서울대입구역에서 서울대 정문까지 가는데 몇 걸음이 필요한지 세어 봤어.”

“하하, 별걸 다 하네?”

“하하, 일단 한 번 보고 느낌을 말해줘.”

영상 속 출연자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는다. ‘만보기’라는 기계를 들고 걸었는데 모두 786걸음이 나왔다. 내가 말했다.

“어? 생각보다 많이 안 나왔네?”

“그렇지? 우리도 놀랐어. 천천히 걷긴 했지만, 20분 넘게 걸렸거든.”

“그런데 아빠는 좀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

“뭐가?”

“786걸음이 나온 거잖아. 그럼 출연자가 ‘786걸음이 나왔다’는 사실을 강조해 줘야 할 거 같은데, ‘어? 만보기가 고장 났나?’하잖아.”

“아, 그 말은 생각만큼 많이 나오지 않았다는 뜻인데?”

 “그래? 아빠는 출연자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걸 듣고 ‘왜 저런 이야기를 하지?’ 했거든. 출연자들이 진짜 만보기가 고장난 것처럼 이야기를 했잖아.”
 
듣고 있던 둘째 딸 서진이가 한 마디 한다.

“그건 아빠가 이해를 못 한 거 아냐? 나는 딱 보니까 이해되던데?”

“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도 누구나 영상을 보고 사실을 정확히 알아야 하잖아. 그 사실을 전달하는 방식이 아빠가 보기엔 어정쩡해 보여서 혼선이 생겼다는 거야.”

“저걸 왜 이해를 못하지?”

“하하, 그러니까 아빠 센스가 딸리는 거잖아. 그건 알겠는데 이 영상을 보는 사람이 백 명이라고 치면 그 중에 아빠 같은 사람도 있을 거 아냐.”
 
“그렇지.”

“그럼 영상을 만든 사람이 아빠처럼 이해를 못하는 사람을 보고 ‘당신 센스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하면 안 되는 거지?” 

가진이가 대답했다.

“그렇지. 전달한 우리한테 문제가 있는 거지.”

“그래. 그 이야기야.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순 없는 거지만, 모든 사람한테 정확한 정보를 줄 수는 있는 거잖아. 그 정보를 신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만보기인데, ‘만보기는 멀쩡하다’는 말을 생략하고 ‘어? 만보기가 고장 났나?’ 하면서 스스로 근거를 믿지 않는 것처럼 말을 하니까 아빠는 ‘어? 저게 뭐지?’ 한 거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나?”

“응.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네.”

“응. 그래서 아빠는 너희 팀이 고생을 많이 했다는 건 알겠지만, 높은 점수는 주기 어렵고, 좀 더 명확하게 전달하는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가진이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빠 잠시 내려가서 담배 좀 피우고 올게. 다녀와서 또 이야기하자.”

“응.”

사람의 마음

가만히 생각해 봤다.
 
‘가진이는 이제 대학 1학년이고, 휴일인데도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가서 열심히 했는데 내가 좀 심하게 뭐라고 했나? 괜히 미안하네. 뭐라고 해야 하지?’

“사람 마음은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고, 꾸중 듣는 것을 싫어한다. 이래서 친구가 서로 권면할 때, 확실히 나무랄 게 없다는 걸 알았다면 입 밖에 내려 하지 않는다. 하물며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작으면 총애를 잃고, 크면 죽임을 당하니 진심으로 요구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자기를 해치는 일을 하려 하겠는가?”<이익(李瀷, 1681-1763), 『성호사설(星湖僿說)』, 권16 「인사문(人事門)」>

옛날과 지금은 모든 면에서 다르지만, 칭찬을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잘하지 못하는데도 칭찬만 한다면 그 사람은 발전하기 어렵다. 이래서 예나 지금이나 어딜 가든 충고를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친구끼리 반드시 충고를 주고받아야 하고, 아래든 위든 충고할 일이 있으면 기탄없이 하라고 가르쳤다.

다만 그러기 위해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충고할 일이 없으면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하고, 상대가 충고해 주기를 바랄 때 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상대의 의사와 상관없이 충고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으면 요즘엔 임금과 신하 관계는 없으나,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 부모 자식 사이는 벌어지고, 친구 관계는 소원해 진다. 공자도 이렇게 말했다.

제자인 자공(子貢)이 벗을 사귀는 방법에 대하여 질문하니 공자가 대답했다. “진심으로 말해주고 잘 이끌어 주되, 되지 않으면 그만두어서 스스로 욕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논어(論語)』, 「안연(顏淵)」>

내가 가진이한테 해 준 말은 충고라기보다는 의견에 가깝고, 가진이가 먼저 말을 해 보라고 해서 했을 뿐이지만, 이건 내 생각일 뿐이고, 가진이가 내 말을 듣고 마음이 상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이건 나의 얕은 생각일 뿐이다. 가진이는 ‘느낌’을 말해 달라고 했는데 나는 ‘평가’를 했으니, 동문서답을 한 셈이고, 가진이가 바라는 것 이상의 말을 해 버린 것이다. 더 문제인 것은 ‘얘는 자식이고 나는 부모니까 이 정도의 충고는 해 줄 수 있다’고 멋대로 생각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나한테는 가진이의 전공에 대한 지식도 없다. 이건 내 잘못이다.

부끄러움

다시 마주 앉았다.

“가진아, 아빠는 아빠 글을 쓰지만, 비평도 하거든. 이게 버릇이 돼서 너한테 뭐도 모르면서 몇 마디 한 거 같네? 혹시 마음 상했냐?”

“아니? 그런 거로 왜 마음이 상해?”

“아, 그렇다면 다행인데, 너 고생했는데 아빠가 칭찬은 안 해주고 비판만 한 거 같아서 그러지.”

“하하, 괜찮아. 선배들이 지적하는 거에 비하면 아빠 말은 아무 것도 아냐.”

“선배들이 많이 지적 하냐?”

“그럼. 엄청나게 뭐라고 하지.”

“기분 안 나쁘냐? 겨우 한두 살 차이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건데?”

“기분 나쁘면 안 되지. 우리한테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만든 영상의 문제점을 짚는 거잖아. 한두 살 차이가 나도 우리보다 경험이 많잖아. 지적해 주면 수긍을 하게 되고, 정말 많은 도움이 돼. 그 지적을 기억하고 문제점을 줄여나가야지.”

“아이고, 아빠가 도로 부끄럽다.”

“하하, 아냐.”

▲ 김재욱 칼럼니스트
▷저서 <군웅할거 대한민국 삼국지>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왜곡된 기억 >외 6권

처음부터 가진이는 나한테 ‘의견’을 구했을 뿐, 지적이나 충고를 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부모 자식 지간에 이 정도는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한 것도 잘못인데, 그 방면에 지식도 없으면서 당당하게 ‘의견’을 빙자한 평가를 하고도 뭐가 문제인 줄 몰랐던 것도 잘못이다. 입장을 바꿔서 가진이한테 내 글을 읽은 느낌을 말해달라고 했는데, 얘가 문체나 주제를 문제 삼으며 고치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나는 뭔 소리 하는 거냐고 하면서 눌러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심한 경우 화를 냈을 수도 있겠다.

이익이나 공자의 말처럼 충고는 ‘들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 해야 한다. ‘충고해 달라’고 하면 해 주면 된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내게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또 그 이전에 ‘할 자격’을 갖추어야 하겠다. ‘부모’는 그 자격의 일부가 될 수는 있겠지만 전부가 될 수 없다. 내가 느낀 부끄러움 안에는 이 모두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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