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세월호 마지막 생존자 김성묵씨
세월호 참사 후 5년, 희망보단 분노 커져
사고 이후 삶, 희생자들 위해 살고자 다짐
文 정부서 진상규명 유의미한 변화 못 느껴
검찰 내 독립적 특별 수사단 설치돼야
세월호, 시민들에 촛불처럼 기억되길 바라

세월호 생존자 김성묵씨 ⓒ투데이신문
세월호 생존자 김성묵씨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올해도 어김없이 4월이 찾아왔습니다. 한껏 만개한 벚꽃이 바람에 흩날려 내리는 꽃비가 반가운 계절, 봄이지요. 그러나 4월의 봄은 누군가에게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슬프고도 잔인한 계절이기도 합니다.

2014년 4월 16일 수학여행길에 오른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부터 동창여행과 출장을 떠나는 일반 승객까지 476명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제주도로 향하는 세월호에 몸을 실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몰랐습니다. 이날의 항해가 어떤 참극을 만들어낼지 말입니다.

전남 진도 앞바다를 항해하던 세월호는 오른쪽으로 급격히 돌며 ‘쿵’ 소리와 함께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기울기 시작한 선체는 걷잡을 수 없었고, 바다는 끝내 세월호를 집어삼켰습니다.

이날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단 172명뿐입니다. 299명의 희생자들은 하늘의 별이 돼서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고 이마저도 허락되지 않은 5명은 미수습자로 남아있습니다.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고 책임자 처벌은커녕 그들이 왜 그렇게 희생됐어야 했는지 사고 원인조차도 밝혀지지 못한 채 속절없이 시간만 흐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이제는 나아지지 않았느냐고. 잘 해결되고 있지 않느냐고. 1800여일이라는 시간동안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요.

<투데이신문>은 지난 10일 5주기를 앞두고 서울 광화문 인근의 한 카페에서 세월호 마지막 생존자이자 수많은 학생들을 구해낸 세월호 의인 김성묵(43)씨를 만나 2014년 4월 16일 그날에 멈춰버린 그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봤습니다.

<사진 제공 = 김성묵씨>

Q. 본인에 대해 소개 부탁드릴게요.

4·16 세월호 가족협의회분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는 세월호참사 생존자 김성묵입니다.

Q. 사고가 발생한 지도 어느덧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매년 똑같은 거 같아요. 1주기, 2주기, 3주기 해가 바뀔 때마다 변화가 있길 바랐는데 그러지 못해 답답한 마음이 커요. 특히 그동안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면 지금은 사고 당시 책임이 있는 공직자들을 처벌할 수 없을 거라는 염려가 현실로 다가오면서 희망보다는 분노가 더 커진 상황입니다.

Q.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여전히 2014년 4월 16일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생생하실 텐데요.

당시 근무하던 회사에서 제주도에 있는 거래처에 간판을 달아야 하는 일이 생겨 세월호에 승선하게 됐어요. 사고 발생 시점에는 식사를 마치고 4층 난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방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배가 전복되기 시작했어요. 일단은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었어요. “움직이지 마라”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고 일단은 대기하는 게 옳다고 판단됐거든요. 그러다 핸드폰이라도 챙겨야겠다 싶어 방으로 들어갔어요. 배가 얼마나 기울었나 궁금해서 핸드폰 어플을 이용해 각도를 재보니까 45도를 막 넘어서고 있더라고요. 안에서 대기를 하다 답답하기도 하고 겁도 나서 밖으로 다시 나왔어요. 방으로 들어갈 때보다 나올 때 많이 힘들었어요. 선체가 생각보다 빠르게 기울어서 벽을 박차 점프를 해 문틀을 부여잡고서야 겨우 올라올 수 있었거든요. 대기하고 있으니까 구조대가 5층에서 저한테 손짓을 했어요. 5~6명 정도 더 태울 수 있으니 올려보내라고 하더라고요. 선내에 있던 분들께 학생들 먼저 올려보내자고 말씀드렸고 다들 동의해 학생들의 탈출을 도왔어요.

선내 홀 쪽으로 가니까 사람들이 많았어요. 제가 있는 위치와 불과 3m 거리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걸 넘어갈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주변에 있던 소방호스 두개를 연결해 사람들 겨드랑이에 끼워 끌어서 구조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쉽지 않더라고요. 당시 각도가 90도 가까이 되는 상황이라 바닥도 밟을 수 없는, 꼭 낭떠러지 같았어요. 그때 어떤 아이가 ‘아저씨 이제 어쩌죠’라고 묻는데 아무 대답도 해줄 수가 없었어요. 주변에 아무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어요. 그 사이 선내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아이들이 물 위로 떠올랐고 손에 잡히는 대로 당겼어요. 흘러드는 물살에 저도 휩쓸려 나왔어요. 마지막에 손을 잡고 있던 꼬마 아이는 구조된 다른 분께 받아달라고 부탁하고, 저는 주변에 있던 어선 선장님에 의해 구조됐어요.

Q. 당시 해경의 구조상황은 어땠나요.

한 번도 해경의 도움을 받지 못했어요. 5명 정도 더 태울 수 있다고 손짓했던 구조대 중 한명이 내려왔는데 온몸을 떨더라고요. ‘왜 그러시냐’라고 물으니 힘들어서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보기엔 힘들어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떠는 사람 같았어요. 학생 한 명도 제대로 들지 못해 제가 어깨와 등을 빌려줬어요. 그 학생을 올리면서 본인도 따라 올라가더라고요. 만약 그분께서 장비를 주셨거나 어떤 방법이라도 이야기해줬다면 좀 더 많은 사람이 탈출을 용이하게 했을 텐데 그게 좀 아쉽고 화가 나요.

<사진 제공 = 김성묵씨>

Q. 사고 이후 많이 힘드셨을 텐데요.

병원에 8개월 정도 입원해 있었는데 죄책감 때문에 많이 힘들더라고요. 누군가를 만날 수도, 대화할 수도 없는 시간이었어요. 저는 내 손을 잡은 아이들이 보고 싶고 구하지 못한 아이들 영정사진 앞에서 사죄하고 싶었는데 병원에서는 못하게 했어요. 하루는 희생 학생의 장례식 날이었는데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새벽에 바람 쐬러 간다고 거짓말하고 장례식장에 갔어요. 근데 사진을 볼 수 없더라고요. 바깥에서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는데 아버님으로 보이시는 분이 나오셔서 누구냐고 물어보셨어요. 근데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어요. 결국 아무 말 못 하고 뛰쳐나와 밤새 울었어요. 무슨 면목으로 거길 찾아갔는지 죄송스럽더라고요. 며칠은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퇴원하고 사고 전 다니던 회사로 복귀했는데 일을 못하겠더라고요. 집중도 안 되고 자꾸 멍 때리고, 딴생각을 하니까 실수가 잦고 일이 진행이 안 됐어요.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 회사를 그만두고 일용직으로 일을 했어요. 그렇게 한 1년 정도 버티다 어느 날 희생자들이 살려준 삶을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뭐라도 해야겠다고 싶더라고요. 그렇게 2주기 무렵부터 세월호 진상규명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어요.

Q. 트라우마에 많이 시달렸다고 들었어요. 무엇이 가장 괴로웠나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아저씨 이제 어쩌죠’라고 물었던 학생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던 게 너무 힘들었어요. 도 어떤 학생이 구명조끼를 입지 않았길래 물어보니 친구한테 벗어줬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입고 있던 조끼를 벗어주려는데 매듭이 흘러내리지 않게 돌돌 말아서 집어넣은 터라 풀리지가 않는 거예요. 결국은 벗어주질 못했어요. 그게 너무 후회되고 미안해요. 지금도 그 학생이 구조됐는지 안 됐는지 소식을 몰라요. 구조됐으면 다행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제가 죽게 놔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고 당시에 있었던 여러 기억들이 가장 힘들게 하는 거 같아요.

Q. 학생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마음의 짐이 있으신가봐요.

그게 가장 무겁고 힘겨운 부분이에요. 항상 그 상황이 떠오르고 꿈을 꾸기도 해요. 구조되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고 제가 미웠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죄책감을 떠나서 저 역시도 살인방조자라는 생각을 해요. 어른으로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힘들게 하네요.

<사진 제공 = 김성묵씨>

Q. 진상규명 활동을 하다 보면 사고 기억을 되새겨야 하잖아요.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것 같아요.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밖으로 나온 거잖아요. 힘겨운 걸 알지만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지금 힘들어도 참고 한마디라도 전달하면 사람들이 공감하고 이 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 움직여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가 있었어요.

또 한동안은 유가족도 못 뵙고 피하려고 했는데 힘내라고 북돋아주시고 안아주시고 하니까 감사하기도 하지만 죄스러운 마음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분들 곁에서 궂은일이라도 조금 덜어드려야겠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그 생각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어요.

Q. 생존자에 대해 ‘그래도 살아있기 때문에 잘 살지 않겠느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살아남은 게 후회되는 마음도 있어요. 저는 지금 이 삶이 제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른 분들이 밀어내 줘서 살고 있으니 이 삶은 내 것이 아닌 그들의 삶이고, 때문에 그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욕심이 들어요. 제 개인적인 욕심은 지금까지 결단코 내보지 않았어요.

Q. 사고 발생 1081일 만에 세월호 인양이 완료됐어요. 심경이 어떠셨나요.

배가 올라온 당일에는 목포에 가지 못했어요. 손발이 떨려서 도저히 움직이질 못하겠더라고요. 그러다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아이들을 맞이해야지, 미안하다고 해야지,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해야지’라고 생각이 들어서 다음날인가에 목포로 갔어요. 가서도 한참 들어가지 못했어요.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고 사고 당시 기억이 머릿속에 몰아치더라고요. 당시 감정은 표현을 못 하겠어요. 결국 뒤늦게 들어갔는데 무릎밖에 안 꿇어지더라고요. 세월호를 보는 건 지금도 힘들어요. 사진만 봐도 견디기 힘들 만큼 가슴이 뛰고 당시 기억들이 떠올라요.

세월호 생존자 김성묵씨 ⓒ투데이신문
세월호 생존자 김성묵씨 ⓒ투데이신문

Q.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세월호 진상규명에 대한 기대가 컸어요. 정권 교체 이후 유의미한 변화가 있었나요.

의미 있는 변화라...저는 솔직히 못 느끼겠어요.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저보다는 주변에서 기대하는 바가 컸어요. ‘이제 다 잘 될 거야’, ‘문 대통령이 됐으니까 믿어’라고 주변에서 얘기한 거지 제가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대선을 앞두고 열린 범국민대회에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박원순 서울시장이 참석했는데 제가 ‘방은 우리가 뺐으니 청소해주시라. 그럴 용기가 없으면 대통령이 되겠다는 욕심 내지 마라’는 말을 했어요. 사실 이 말은 문 대통령에게 꼭 하고 싶었어요. 차기 대통령으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으니까요.

어느 하나 바뀌지 않았어요. 이제까지 문 대통령이 뭐 했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바른 정치를 하고 계신 부분이 분명 있지만 세월호 문제는 건들지 않는다는 게 화나는 거죠. 문 대통령을 촛불 대통령이라고 하잖아요, 그 시작이 세월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세월호 문제는 건들지 않고 있다는 점, 정말 대통령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어떤 거대한 권력이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안이하게 대처하는 점이 좀 많이 답답하고 화가 나요.

Q. 정부의 어떤 점이 가장 실망스러운가요.

특별수사단 설치 부분이요. 저는 2기 특조위라고 알려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에 욕심이 없었어요. 사실 2기 특조위보다는 대통령의 권한으로 수사권을 가진 특검이나 특별수사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수사권이 없으면 세월호의 진실은 묻힐 수밖에 없어요. 자료 주지도 않을뿐더러 파기하고, 증언은 나오지 않고, 특조위의 조사만으로는 어려워요. 청원까지 제기하며 이 부분을 요구하고 있는데 대통령은 모르쇠에요. 나름대로 많은 일을 하고 계시지만 왜 세월호는 아닌지 의아하고 화가 나네요.

Q. 수사권이 있는 검찰 내 특별수사단 설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네요.

그렇죠. 다만 특조위와 협업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협업도 좋지만 그렇게 되면 특조위에서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수사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건데 이런 방식으로는 부족해요. 특별수사단이 직접 증거와 자료를 확보해 수사하는 게 필요해요. 그리고 수사 기간도 제한을 둬선 안 돼요.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하나의 의혹도 묻혀선 안 되니까요.

Q. 문 대통령의 임기가 절반가량 남았어요. 임기 말에 가까워질수록 대통 령의 레임덕 가 능성이 높아지는 만큼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해선 지금이 어느 때보다 정부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인 듯한데요.

맞아요. 제가 바라는 건 단 한 가지에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대통령령으로 수사권을 발동하는 특별수사단을 만들어 주시길 바라요.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임기 때까지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움직임은 어려우실 거예요. 그렇게 되면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나 제주 4·3 사건처럼 수십년 후에 증거가 발견되는 상황이 오지 않으면 세월호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을 거예요.

<사진 제공 = 김성묵씨><br>
<사진 제공 = 김성묵씨>

Q. 진상규명을 위한 싸움이 이렇게 길어질 거라고 예상하셨나요.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 몰랐죠. 이 정도로 정부가 침묵하고 방해할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이런 상황을 막으려고 문재인 정부를 믿고 힘을 실어 준건데, 문재인 정부마저도 비슷한 상황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 안타까워요. 예전에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연구모임을 가졌었는데 거기서 한 아버님이 ‘이게 해결될 것 같냐’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제가 무슨 말이냐고 묻자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권력이 아니다. 우리가 오래 싸우더라도 아마 끝이 없을 거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이제 와서 보니 아버님 말씀이 맞는 거 같기도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가 없는 건 아이들 때문이죠.

Q. 세월호참사 이후에도 스텔라데이지호 등 비슷한 비극이 되풀이됐어요.

이유는 단 하나에요. 제대로 처벌하지도, 제대로 밝혀지지도, 제대로 고쳐지지도 않았기 때문이에요. 세월호 이전의 참사도 책임자 처벌이나 피해자 보상, 제대로 된 행정절차 없이 묻어뒀잖아요. 최소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반드시 이뤄져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참사가 발생했을 때 비슷한 상황이 올 겁니다.

Q. 세월호참사 이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인생 전체가 바뀌었죠. 이전에는 친구도 많았고 모임도 자주 다니고 여행도 좋아했어요. 일 욕심도 컸고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걸 다 놓고 살고 있어요. 지금 제 삶이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 것들이 아쉽지는 않아요.

Q. 여전히 많은 시민분들이 세월호를 기억해주고 있지만 사고 초기보다 관심이 멀어지긴 했어요.

많이 안타깝죠.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는데 많은 분들이 ‘다 됐잖아’, ‘잘 될 거야’라고 끝내버리니까 아쉽고 안타깝고 희생자들한테 미안해요. 우리가 뭘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닐까 싶어서요. 세월호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안전한 사회는 한걸음 더 멀어지고,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게 될 거예요.

Q. 세월호참사가 우리 사회에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나요.

촛불처럼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든 촛불로 아름다운 불빛을 내고, 무서운 함성으로 탄핵이라는 어마어마한 일을 해낸 기억을 간직하고 있잖아요. 세월호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결국은 또 진상규명 얘기네요. 언젠가 진상규명이 된 이후에 ‘예전보다는 정말 안전한 세상이야’, ‘그렇게 다치는 일은 더는 없을 거야’, ‘다치더라도 책임자들은 엄청난 처벌을 받게 될 거야’, ‘피해자들도 살아갈 수 있도록 정부가 만들어 줄 거야’라는 얘기를 할 수 있길 바라요. 이게 마냥 희망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현실로 다가왔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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