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필자가 어린 시절 역사와 관련된 책을 읽을 때 문득 궁금해진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역대 왕조를 이야기하면서, “대한제국기”라는 말은 왜 쓰지 않을까?’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인터넷에서 서비스되는 백과사전에서도 대한제국은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의 조선의 국명.(『두산백과사전』)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존속하였던 조선왕조의 국가.(『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과사전의 내용에서 필자가 주목한 표현은 “조선의 국명”이라는 말과 “조선왕조의 국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왕조의 왕이었던 고종(高宗)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등극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의 국명”이나 “조선왕조의 국가”라는 표현은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할 수 있게 만드는 표현이라는 생각도 든다. 

성인이 될 때까지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는 필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필자의 전공과 관련된 논문도 한 편 작성하면서 호기심을 해소하려고 했으나, 필자의 능력이 낮아서 그런지 몰라도 그 호기심을 완전히 해소하진 못했다. 이것은 역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가졌을지도 모르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특히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이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일제강점기 직전의 국가명이었던 대한제국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한제국의 개국(開國)은 많은 의미가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제국”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제국은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황제”라는 칭호가 가진 성격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황제는 단순히 제국의 통치자를 일컫지 않는다. 특히 근대 이전에 중국의 황제는 천자(天子), 즉, 하늘의 아들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당시 세계관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믿어졌다. 이것은 중국의 통치자 이외에는 황제의 지위를 얻을 수 없고, 모두 중화(中華) 문화권에 포함된 번방(蕃邦) 국가라는 생각을 가졌다는 의미이다. 결국 대한“제국”이라고 나라의 이름을 만든 것은 기존의 세계관인 중국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서 중국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세계 체제에서 여러 국가 중 하나로 편입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한영우의 연구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한영우는 대한제국의 건국 취지 중 조선유일중화(朝鮮唯一中華)’ 사상과 ‘조선정통론(朝鮮正統論)’에 주목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도덕적으로 서로 상부상조하던 동양문화의 전통이 청(淸)의 등장으로 깨지고, 명나라의 도덕문화를 계승한 조선이 명의 정통을 잇게 되었다는 자부심을 말한다. 그래서 대한제국이 도입한 각종 국가의례에서는 명나라 황제의 격식을 모델로 해 재정비 했다. 일본이 강요한 양력의 전적인 사용을 억제하고 음력을 병행한 것도 전통적인 제사와 명절을 그대로 유지해 황실의 역사적 정체성과 정통성을 계승하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1) 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모습에서 조선이 가진 중화에 대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중화 계승의 주체는 민족적으로는 한족(漢族)이 핵심이었다. 이것은 한족 이외의 민족이 중원 대륙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오랑캐가 중화를 침범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이 개국했을 때 비슷한 시기에 명(明)이 몽골 민족의 국가였던 원(元)을 멸망시키고 개국했기 때문에 중화는 명(明)에 있었다. 그런데 그 명이 만주족이 세운 국가인 청에 의해 멸망했기 때문에 명을 상국(上國)으로 섬겼던 조선에게 청은 중화를 침범한 오랑캐였다. 그러나 병자호란에서 굴욕적 강화를 맺은 조선은 청을 상국으로 섬겼고, 결국 청은 명을 멸망시켰다. 병자호란 이후에도 외교적으로는 조선은 청을 상국으로 섬겼지만, 내부적으로는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조선이 강화도조약 이후 다른 나라에게 문호를 개방하면서 조선과 청의 관계는 다시 재정립 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조선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던 러시아, 일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한제국의 개국에서 개국의 주체가 “제국”임을 선포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이러한 모습은 사상적으로는 조선이 유교, 특히 성리학이 국가사상의 근본이며, 유교를 서구의 기독교와 비슷한 모습으로 바꾸려는 노력에서도 엿볼 수 있다.

(대한제국이 그 정체성을 “제국”이라고 선포한 것에 대하여 학계의 평가는 다양하다. 자주 독립의 의지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고, 외세가 침략하는 과정에서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특히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 그 첫 조항이 “조선은 자주독립국가이다.”라고 썼다는 것과 연결될 수 있다. 대한제국의 위상에 대해서는 후속 칼럼에서 계속 논의할 예정이다.)


1)  한영우, 「대한제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대한제국은 근대국가인가』, 한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6, 43쪽.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