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유교 탈레반 국가

요즈음 팟캐스트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 성적인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을 비판하면서 그 결론으로 이렇게 말한다. 또한 오랫동안 노자와 장자를 연구한 모 교수도 사석에서 ‘유교는 그 등장부터 지배층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생긴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필자는 이러한 주장들에 일부 공감한다. 특히 유교가 처음 생기기 시작했을 때 그 논리가 기득권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상당부분 공감하며 향후 연구를 통해 논증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 여기에 필자가 조금 추가할 수 있는 이야기는 유교가 “유교 탈레반 국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유교가 보급된 것에 대한 것이다.

유교의 집대성은 공자(孔子)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처음 보급된 것은 위만조선, 즉 고조선이 생기고 난 뒤 한(漢)에 살던 위만이 사람들과 함께 고조선으로 귀화하면서 함께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공자의 경학사상, 즉 공자에 의해서 집대성된 각종 유교 경전과 그것에 대한 공부가 도입된 것은 삼국시대인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고구려 소수림왕 때 국가 교육기관인 대학(大學)이 유교의 각종 경전을 교육하는 기관이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적어도 이 시기에는 유교가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유교가 처음부터 당대에 지배적인 이념이 된 것은 아닌 것으로 예상된다. 고조선 때부터 우리나라에는 토착 사상이 있었다. 최치원의 난랑이라는 화랑(일각에서는 화랑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주장한다)에 대해 비석에 쓴 <난랑비서(鸞郎碑序)>에는 우리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며, 유(儒), 불(佛), 선(仙)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풍류도(風流道)라는 고유한 사상이 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당대 유행했던 각종 사상과 종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전통적인 사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이 말은 통일신라 당시 유교가 이미 상당부분 보급돼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유교가 하나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불교가 삼국시대에 전래되었고, 그 이후 불교가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이자 종교의 역할을 담당해왔기 때문에 유교가 사람들에게 많이 보급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고려 말까지 계속됐다. 고려 초 최승로가 새로운 왕조의 통치 방법을 제안한 시무책(時務策) 스물여덟 개의 조항에 따르면 불교의 폐단을 줄이고, 승려의 고리대금을 단속하며,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보급할 것, 그리고 미신을 타파할 것도 제안한다. 이것은 당시까지 불교가 폐단이 일어날 정도로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최승로가 “미신”이라고 말한 것도 당대에 존재했던 전통적인 신앙 형태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추측도 합리인 것으로 보인다.

성리학을 주로 한 유교 사상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등장하고 백성들에게까지 확산된 것은 고려 말부터다. 앞에서 언급한 최승로 역시 유교적 지식을 평가하는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올랐는데,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관료들이 유교 지식을 평가하는 과거를 통해 지배층이 되기 시작한 것은 유교의 확산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고려 말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삼았던 신진사대부가 무신인 이성계와 연대해서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세우면서 성리학은 본격적인 지배 이데올로기가 됐다. 그런데 1500여년동안 유교와 불교와 토착 사상이 공존해 온 상황에서 조선 왕조의 개창(開創)을 기점으로 성리학이 한 번에 백성들에게까지 보급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앞의 칼럼에서 언급했던 대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해서 국가 의례를 규정지었고, 각 지역의 지역 의례까지도 국가의 통제와 규정 아래 두려고 시도하였다. 또한 성리학의 시조인 주희가 가정에서의 유교식 의례에 대하여 기술한 『주자가례(朱子家禮)』도 보급했다. 이러한 노력은 16세기에나 그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그 결실이 조선 후기 상당기간 동안 유지됐지만, 국가의 문호가 개방되고, 새로운 사상이 보급되며, 근대화가 강제되면서, 조선 말과 일제 강점기, 그리고 오늘날까지 기독교를 비롯한 서양의 사상과 기존의 사상이 공존하고 경쟁했다. 그리고 기존의 사상들은 근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인식되면서 혁파되는 경우도 있었고, 전통의 한 형태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국가 차원에서 관리와 보호의 대상도 됐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교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지역의 의례는 “유교화됐다”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그 원형을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국가 차원의 인구 조사에서 자신이 특정한 신앙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종교를 ‘유교’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그리고 가부장제도를 비롯해서 성에 대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에게 유교는 모든 폐단의 원인으로 평가받는 현상도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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