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구본신참(舊本新參). 옛 것은 바탕으로 삼고, 새로운 것은 참고한다는 뜻이다. 보통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말은 많이 사용되지만, 구본신참이라는 말은 동도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사용되는 것 같다. 이 두 가지 말은 모두 서양의 과학기술을 군사력 강화와 경제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이자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 두 말은 미묘한 차이점이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두 말의 차이점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구본신참과 동도서기는 모두 시대적 맥락 속에서 나온 말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일본의 무력 압박에 의해 「강화도조약」을 맺고 일본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일본과 조약을 맺은 이후 다른 나라도 동등한 관계를 요구했고, 조선 지배층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여기에는 다른 의도도 있었다. 일본만 문호를 개방할 경우 닥칠 수 있는 위험을 고려하였고, 특히 아편의 유입으로 나라가 피폐해지고 결국 문호까지 개방한 청(淸)의 모습을 보면서 조선에만큼은 아편을 유행시킬 수 없다는 위기감도 존재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보여줬던 서구의 압도적인 무력과 과학기술을 보고 조선의 지배층은 부국강병을 위해 서양의 과학기술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되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 기조를 잡을 필요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나온 말이 동도서기였다. 진선영은 “동양의 도덕, 윤리, 지배질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서양의 발달한 기술, 기계를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한다는 사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동도서기는 단순하기 “도덕·윤리·지배질서”와 “기술·기계”의 대비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동도서기의 도(道)라는 말과 기(器)라는 말은 유교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던 말이다. 그리고 동도서기의 기조를 되짚어 올라가면 그 기원을 실학자들의 이용후생(利用厚生, 편리한 것을 사용하여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뜻. 필자 주.) 사상과도 연결된다. 그래서 진선영은 실학자의 이용후생론이 등장한 이후 100년 만에 제도적 개혁의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라고 밝혔다.

동도서기는 상당부분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과 그 내용이 비슷하다. 중체서용 역시 아편전쟁으로 인해 청(淸)이 영국에 의해 강제로 개항된 이후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온 기조였다. 그리고 이 기조의 결과로 나온 것이 양무운동이었다. 그러나 양무운동은 청일전쟁에서 청(淸)이 일본에 패하면서 실패로 돌아갔고, 정치 체제 자체를 개혁하고자 했던 위로부터의 개혁인 변법자강운동이 발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도서기도 중국의 양무운동과 비슷하게 그 시행 과정에서 한계에 부딪혔다. 1894년 갑오개혁, 1895년 을미개혁은 모두 동도서기에서 비롯됐으나, 무작정 서양의 외피를 모방하는 것만으로는 조선이 개혁될 수 없었다. 오히려 급진적 개혁으로 인해 수구세력의 반발만 낳았다. 이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 구본신참이었다. 한영우는 구본신참을 “우리의 전통을 살리면서 서양식 모델을 절충하는 것”1)이라고 정의했다. 구본신참은 대한제국 건국 선포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기본적으로 동도서기와 구본신참이 표면적 정의는 비슷하지만, 정치 체제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되었고, 정치체제 개혁을 염두에 두었다는 점에서 그 내용은 조금 다르다.

그 결과 대한제국이 과감하게 포기한 것이 바로 사대(事大)였다. 지난 칼럼에서 언급했듯이, 대한제국은 “조선유일중화(朝鮮唯一中華)” 사상과 “조선정통론(朝鮮正統論)”을 그 핵심으로 삼았고, 구본의 핵심이기도 했다. 이것은 실제로 국가 의례와 양음력 병행 사용 등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사대가 외교의 측면이 있고, 중국과의 관계와 사대가 정치체제에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조선이라는 국호를 명(明)의 승인을 받았고, 조선의 왕이 명이나 청 황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그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그 예이다. 결국 동도서기는 조선이라는 왕조를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것이라면, 구본신참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중국의 제후국의 왕(王) 신분에서 제국의 황제로 최상위 지배자의 위치가 바뀌는 모습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러나 구본신참 역시 그 한계를 드러냈고, 결국 일제강점기를 맞이하게 됐다.


1)한영우, 「대한제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대한제국은 근대국가인가』, 한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6,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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