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마드로 가지런히 매만진 머리 모양에 흰색 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검은색 가죽 재킷을 입은 남자가 섬세한 손길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린다. 비스듬히 뒤돌아선 모습도 예사롭지 않다.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본 듯한 이 남자를 머릿속에 곧바로 떠올린다면, 당신은 이미 ‘그리스’를 만난 것이다.   

뮤지컬계의 스테디셀러 ‘그리스’가 오디컴퍼니의 프로듀싱으로 또 한 번 새로운 옷을 입고 우리 곁을 찾았다. 1972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됐던 ‘그리스’는 변화의 시기에 새로운 자유를 갈망하던 1950년대 미국 청년들의 꿈과 희망, 열정과 사랑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이다. 존 트라볼타와 올리비아 뉴튼 존 주연의 동명 영화로도 제작된 적이 있을 만큼 전 세계적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고, 우리나라에서는 2003년 초연 이후 26번의 프로덕션으로 약 2500회가 넘는 공연을 하며 저력을 과시했다. 

미국 라이델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청춘들의 이야기는 풋풋하면서도 진지해서 더 재미있다. ‘그리스’는 전반적으로 줄거리가 단순한 데다, 국내 광고 배경음악으로 쓰였던 ‘Summer Nights’나 ‘We Go Together’, ‘You’re The One That I Want’ 등 흥겹고 친숙한 넘버들이 많아 뮤지컬에 입문하는 관객들이 가장 먼저 선택하는 작품 중 하나이기도 하다. 또 뮤지컬 배우들에게는 이선균, 김소현, 엄기준, 조정석 등 현재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선보이고 있는 선배들이 거쳐 간 무대이자 스타 등용문과도 같은 작품이어서 꼭 한 번 쯤 함께 해 보기를 꿈꾸는 작품이라고도 한다.  

특히 이번 시즌 공연은 기존의 ‘그리스’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내며 특유의 복고 감성만은 그대로 남겨두고 많은 것들을 바꿔놓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더욱 화려해진 의상과 소품, 세트 그리고 공들인 무대연출이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뒤로 보이는 색색의 LED 배경은 순간순간 관객들이 배우들과 함께 학교로, 수줍은 사랑의 추억이 담긴 여름 바다로, 때로는 소녀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오가는 아기자기한 침실로, 한밤에 펼쳐지는 위험천만 자동차 경주의 현장으로 곧장 옮겨갈 수 있도록 돕는다. 케니키와 친구들의 드림카 ‘그리스 라이트닝’이 멋지게 무대에 등장하는 모습 또한 마치 청춘들의 빛나는 꿈이 현실로 나타난 듯한 느낌이었다. 

대사나 넘버들도 상당 부분 변화한 모습이다. 세련된 편곡은 라이브 밴드의 연주로 더욱 두드러진다. 과거에 머물러있던 캐릭터들은 조금 더 현실적으로 변모했고,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이었던 느낌을 덜어냈다. 다만 극 초반 최신 유행어나 일본어 어원의 신조어 반복 사용 구간은 오히려 너무 가볍게 느껴져서 처음 들었을 때의 재미와 전체적인 작품의 가치를 반감시키는 것 같아 아쉬움이 컸다. 물론 요즘 트렌드를 현실감 있게 반영할 목적으로 넣어둔 장치겠지만 워낙 웃음 코드가 곳곳에 장착돼 있는 작품이라 공감대 형성을 위해서라면 굳이 그와 같은 방법이 아니더라도 이미 충분해 보였다. 

스타일리시한 쇼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지난 15일 공연장에서 만난 배우들의 연기와 춤, 노래는 마치 흥겨운 뉴트로 감성의 로큰롤 콘서트장에 온 듯한 느낌을 선사했다. 먼저 학창시절 뭇 여학생들의 마음을 설렘으로 가득 채웠을 ‘T-Bird’의 리더, 주인공 대니 역의 서경수는 힘이 넘치는 발성과 유연한 몸놀림으로 매력을 더했다. 그리고 그런 대니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린 모범생 샌디를 연기한 한재아의 순진무구한 표정 연기, 맑고 청아한 음색은 첫사랑의 이미지와 많이 닮았다. 가끔은 거칠기도 하지만 사랑을 책임질 줄도 아는 멋진 남자 임정모 케니키 역시 매우 인상적인 연기와 노래로 눈길을 끌었으며 겉으론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하지만 사랑할 땐 화끈하고, 내면에 섬세함을 품은 ‘핑크레이디’의 리더 리조 역의 허혜진도 정말 잘 어울렸다. 

또 최고의 인기 DJ로 등장해 여성 캐릭터들의 마음을 녹이며 관객들을 소통과 참여로 이끈 빈스 역의 김대종은 이번 공연의 독보적 신스틸러로서 역할 그 이상을 선보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관객들의 유쾌한 웃음소리와 호응은 배우에게도 그대로 전해지기에 충분했다. 잠시나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즐길 준비가 된 관객이라면 열광적인 분위기에 쉽게 녹아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도 각각의 캐릭터에 맞게 멋진 연기를 선사한 배우들 덕분에 마지막까지 즐거운 관람이 이어졌다. 밤늦은 시간 관람을 마치고 나서도 관객들의 열띤 반응은 계속됐다. 공연에서 배운 춤을 춰 보거나, 유명 넘버를 흥얼거리며 나오는 모습도 곧잘 눈에 띄었다.

▲ 최윤영(아나운서/공연 칼럼니스트)
▲ 최윤영(아나운서/공연 칼럼니스트)

그렇다면 과연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를 향해 꾸준히, 뜨거운 사랑을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구나 언젠가 한 번쯤은 겪어봤을 청춘의 성장통을 견딘 우리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있다. 다시 없을 것만 같던 사랑에 울고 웃고, 의리에 모든 것을 걸었던 패기 넘치는 소년 소녀는 여전히 우리 마음속 어디엔가 남아있다. 단지 어른이길 요구받는 세상에서 잠시나마 잊고 있을 뿐이다. 그런 우리에게 ‘그리스’는 꿈꾸던 과거를 현재형으로 선물해준다. 현실의 무게를 벗어둔 채 즐겁게 웃어도 보고 조금은 어색하지만 흘러나오는 리듬에 자연스레 몸을 맡기는 순간, 관객들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통해 푸르고 찬란했던 그때로 돌아가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여름 더위에 한껏 가까워진 요즘. 시원한 웃음으로 생활의 활력을 되찾아보고 싶다면 뮤지컬 ‘그리스’와 함께 싱그러운 추억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꿈 많았던 그 시절의 내 모습과 다시금 웃으며 마주하고 싶은 당신에게, ‘그리스’는 즐거움의 급행열차로 안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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