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민주화 이후 등장한 4당 체제
3당 합당으로 양당 체제 다시 공고화
권위주의 시대와 단절하지 못한 정치구조
변화 기반 마련했지만 여전한 양당적 속성

국회 본회의장 ⓒ뉴시스
국회 본회의장 ⓒ뉴시스

“대한민국 정치사는 한 마디로 ‘3당 잔혹사’, ‘다당제 잔혹사’였다. 꼭 필요한데, 3당이 버티질 못한다…다당제는 없어지는 숙명을 갖고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2017년 12월, 바른정당과의 통합을 준비하던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대표는 ‘연대-통합 혁신을 위한 토론회 안철수 대표에게 듣는다’에 참석해 이같이 말했다.

그의 말처럼 한국 정치사에서 제3당은 고착화된 거대 양당체제에서 제대로 명맥을 이어가지 못한 채 사라져갔다.

이와 함께 오는 2020년 21대 총선을 수개월 앞둔 상황에서 지난 20대 총선에서 탄생한 제3당과 다당제 구조가 정착될 수 있을지에 대해 관심이 몰리고 있다.

<투데이신문>은 민주화 이후 제3당의 도전사와 함께 지난 30여년 넘게 이어져 온 거대양당 중심 정당구조의 원인과 한국 정당정치의 특징을 살펴보고, 중도층 공략에 나선 현 제3당들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에 대해 2회에 걸쳐 연재한다.

【투데이신문 남정호 기자】 지난 2016년 총선에서 국민의당은 38석을 얻어 제3당으로서의 입지를 구축했다. 총선에서 거대양당 이외 제3당이 단독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꾸린 것은 지난 1996년 15대 총선에서 자유민주연합(자민련, 50석) 이후 20여년 만이었다.

그간 한국 정치에서 여러 정당들이 거대양당의 틈바구니에서 제3당의 입지를 개척하기 위해 애썼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민주화 이후 치러진 1988년 13대 총선에서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가 꾸려진 가운데 4개당이 원내교섭단체로 이름을 올리며 다당제가 구축됐다. 하지만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과 김영삼 당시 총재가 이끌던 통일민주당, 김종필 당시 총재의 신민주공화당이 3당 합당에 나서면서 200석이 넘는 초거대여당 민주자유당이 탄생했고, 다당제 구조 역시 2년여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이후 고착화된 양당체제하에 한국 정치에서 제3당은 소멸과 탄생을 반복하고 있다.

1989년 12월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 귀빈식당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야 3당 총재 회담에 앞서 김대중 총재가 김영삼 총재와 악수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종필, 김대중, 김영삼 당시 총재 ⓒ뉴시스
1989년 12월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 귀빈식당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야 3당 총재 회담에 앞서 김대중 총재가 김영삼 총재와 악수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종필, 김대중, 김영삼 당시 총재 ⓒ뉴시스

양당 체제의 고착화 이룬 3당 합당

한국 정치에서 거대양당체제를 고착화시킨 데에는 1990년 3당 합당의 영향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민주화 이후 치러진 1988년 13대 총선에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민주정의당(125석), 김대중 당시 총재의 평화민주당(70석), 김영삼 당시 총재의 통일민주당(59석), 김종필 당시 총재의 신민주공화당(35석) 등 4당 체제가 구축됐다. 이들 정당들은 각각 TK(대구·경북), 호남, PK(부산·경남), 충청을 중심으로 한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당들이었다.

그러나 헌정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국운영에 어려움을 느낀 노태우 대통령은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추진,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여당을 탄생시켰고, 이후 거대 양당체제의 서막을 열었다. 3당 합당으로 인해 탄생한 거대여당인 민자당은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을 거쳐 현재 자유한국당까지 이어져 온 보수정당의 전신이 됐다.

이 3당 합당으로 인해 13대 국회에서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한 4당 체제는 기존 민주-반민주의 정당 구도에서 거대여당과 소수야당, 비호남 대 호남의 구도로 전환됐고, 지역주의 고착화라는 결과를 낳았다.

아울러 3당 합당과 지역주의 고착화는 민주화 이전의 권위주의 체제와의 단절을 이루지 못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강원택 교수는 <한국정당정치 70년-한국민주주의 발전과 정당 정치의 전개(2018)>에서 3당 합당과 관련해 민주화 이전 적대적 세력이었던 노태우와 김영삼의 결합은 더 이상 민주-반민주의 구도가 현실적으로 의미를 갖지 않게 됐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지역주의 정당체계가 외형적으로는 그 이전과 큰 차이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이전의 정당정치와 사실상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할 만한 보수 정당체계가 지속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이 같은 지역주의 정당의 등장은 정당 정치와 관련해서는 정당의 폐쇄적 운영, 정당 내부 민주주의의 결여, 권위주의적 당 총재, 밀실 공천 등을, 의회 정치와 관련해서는 장외투쟁, 단식, 농성, 몸싸움 등 비의회적 관행, 법안 날치기 통과, 여당의 자율성 부재 등 권위주의 정당 정치, 의회 정치에서 형성된 부정적 관행이 민주화 이후에도 지속될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설명이다.

3당 합당 이후 제3당 도전사

1990년 3당 합당으로 4당 체제가 종식된 지 2년만인 1992년 14대 총선에서 다시 제3당이 등장했다. 같은해 12월 열릴 14대 대선에 출마를 결심한 현대그룹의 창업주 정주영 당시 회장이 통일국민당을 창당, 14대 총선에서 31석을 얻으며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민자당의 김영삼, 민주당의 김대중 당시 후보와 함께 3파전을 형성한 14대 대선에서 결국 정주영 후보가 16.3%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패배하자, 통일국민당도 쇠락을 이어간 끝에 1995년 자민련에 흡수됐다.

이렇게 정립된 거대 양당체제하에서 양당은 꾸준히 국회를 지배해왔다. 1995년 탄생한 김종필 전 총재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이 충청을 기반으로 11년간 명맥을 이어가긴 했지만, 2004년 17대 총선에서 4석을 얻는 등 민주노동당(10석)에 밀렸고, 결국 2006년 한나라당에 흡수합당 됐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이회창 당시 총재의 자유선진당이 다시 충청을 기반으로 18석을 얻어 3석의 창조한국당과 공동교섭단체를 구성, 제3원내교섭단체로 기능하기도 했지만, 2012년 18대 총선에서 5석을 얻는데 그치며 같은해 11월 새누리당에 흡수합당 되며 막을 내렸다.

자민련과 선진당은 그간 이어져 온 지역주의에 기대어 명맥을 이어오다가 한계를 맞이했다.

이와 함께 민주화 이후 대선에서 양당 이외에 제3후보들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들이 출마를 위해 만든 당들 역시 그 수명은 짧았다. 앞서 언급한 통일국민당 이후에도 국민신당(이인제), 국민통합21(정몽준), 자유선진당(이회창), 창조한국당(문국현) 등 매번 대선을 앞두고 인기를 얻은 제3당 대선후보가 등장했지만, 오랜 기간 지속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992년 6월 12일 민자당 김영삼, 민주당 김대중, 국민당 정주영 대표 등 3당 대통령 후보가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회담을 갖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1992년 6월 12일 민자당 김영삼, 민주당 김대중, 국민당 정주영 대표 등 3당 대통령 후보가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회담을 갖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무엇이 제3당을 주저앉혔나

이같이 전개돼온 그간 한국 정치에서 제3당과 다당제의 실패는 한국정치의 특징과 연관이 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한국정치의 특징으로 ▲국가형성기와 산업화 시기, 권위주의 체제가 남긴 정치구조 ▲민주화 이후 구축된 지역주의 정당체계로 형성된 거대 양당구조를 지적했다.

부산외대 외교학과 성병욱 교수는 <한국 정당정치의 위기와 변화방향(2015)>에서 한국 정당정치의 특징으로 국가형성기의 영향과 이후 산업화 시기 및 권위주의 체제가 남긴 정치구조를 언급했다.

성병욱 교수에 따르면 국가형성기의 분단반공체제는 정당체계 뿐 아니라 정당의 내부구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분단반공체제는 좌파의 대중조직정당 부재를 가져왔고, 이로 인해 밑으로부터의 참여가 배제되면서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괴리로 보수우파세력 간의 권력경쟁으로 구조화됐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분단반공체제의 영향은 그 후 이어진 산업화, 권위주의 시기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권위주의 시기의 정당체계는 민주-반민주의 대립구도를 형성했지만, 민주화 이후 구축된 지역주의 정당체계는 앞선 국가형성기와 산업화 시기, 권위주의 체제하에 구축된 정당정치 지형이 그대로 남아있는 가운데 정치적 경쟁의 공간만을 열어줬다.

이로 인해 권위주의 체제 하의 민주-반민주의 대립구도가 해체되자, 이합집산에 따른 정당체제의 유동성이 늘어났고,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계층이나 계급, 이념적 균열에 의한 정당 체계가 봉쇄됐다는 것이다.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장훈 교수는 <정책정당의 부침과 한국 민주주의 30년(2018)>에서 권위주의 시대 내내 지속된 개인화된 정당구조, 취약한 정부와의 연계, 시민사회와의 하향식의 허약한 연계구조는 민주화 이후에도 정당이 정부나 시민사회와 강한 정책적 연계를 형성하는 정책정당의 성장을 가로막는 중대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강조했다.

장훈 교수는 “(정당들은 조직이나 이념과 같은 안정적 기반을 갖추고 이를 통해 제도화되기보다는 정당지도자 개인이 지배하는 허약한 선거정당이었다”며 “민주화 세력과 권위주의 세력 간의 타협에 의해 이뤄진 제한적 민주화는 민주화 이후의 정치질서가 과거와의 단절보다는 더 많은 연속성을 보이는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하게 됐다”고 평했다.

강원택 교수는 앞선 논문에서 민주화 이전까지 보수 정당 체계 속에서 정치적 경쟁 규칙의 확립을 둘러싸고 민주-반민주의 구도로 경쟁해온 한국 정당 정치는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을 거치면서 정책적, 이념적, 내용적 측면에서 정당정치의 기반 변화가 발생했지만, 정당 체계 측면에서 여전히 양당적 속성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권위주의 시기뿐만 아니라 민주화 이후 3당 합당과 함께 양당적 경쟁의 틀은 지속됐고, 여기에는 단순다수제 중심의 선거제도와 대통령제의 정부 형태 특성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부연했다.

이와 관련해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이현우 교수는 “선거제도는 정당 제도를 규정짓는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다수결적 소선거구제가 양당제에 크게 기여한다는 것은 1940년대부터 계속 외국에서부터 나오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렇다”고 지적했다.

이어 거대양당 체제와 대통령제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선거는 대선인데, 대선 후보를 내지 못하는 정당은 불임정당이라고 얘기할 정도로 정당으로서 주목 받지 못한다”며 “때문에 거대정당들이 (당선) 가능성이 훨씬 크니까 그런 쪽에서 사람들의 관심이나 정책에 대한 지지 등이 거대정당으로 몰린다고 볼 수 있겠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총선 같은 경우는 어느 정당이 몇 석을 가져가느냐의 문제지만, 대선 같은 경우는 승자 하나만 뽑는 것”이라며 “국민들의 관심도 어느 정당이 그 가능성이 더 높으냐를 얘기하게 되고, 제3당의 경우는 거기에서 소외되다 보니까 실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선거에서 소외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그 여파가 총선까지 미치는 부분이 있겠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한국 정치는 민주화 이후에도 국가형성기의 분단반공체제, 산업화 시기와 권위주의 체제하에 구축된 정치구조와 단절하지 못한 채, 그 연속성을 이어왔다. 또한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구축된 정당 체제 역시 제도화된 정당이 아닌 정당지도자 개인이 지배하는 선거정당으로서의 역할을 계속해 왔다.

물론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에서 정책적, 이념적, 내용적 정당정치 변화의 기반이 마련됐지만, 3당 합당 이후 이어진 양당 체제는 단순다수제 중심의 소선구제와 대통령제하에 여전히 공고하게 작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자료

<한국정당정치 70년: 한국민주주의 발전과 정당 정치의 전개>(강원택, 한국정당학회보, 2018)
<한국 정당정치의 위기와 변화방향(2015)>(성병욱, 대한정치학회보, 2015)
<정책정당의 부침과 한국 민주주의 30년: 정책정당발전의 역사적, 이론적 제약과 한국 정당의 변동>(장훈, 한국정당학회보, 2018)
<다당제에서 합의형 입법정치를 위한 제도적 조건과 과제>(임유진, 한정택, 미래정치연구, 2018)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