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기찻길에서 시작되었고 또한 그곳에서 끝났다.

무대 위에 펼쳐진 고전 명작,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가 화려하게 돌아왔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동명 작품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지금까지도 완벽한 작품이라 일컬어질 만큼 상당히 매혹적이면서도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지난해 국내 초연 당시 9만명의 관객을 이끌었던 화제작인 데다 원작 소설의 분량이 워낙 방대해서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 과연 어떻게 풀어냈을지 굉장히 궁금했다. ‘안나 카레니나’는 정략결혼으로 고관대작 ‘카레닌’의 부인이 된 ‘안나’가 대저택을 장식하는 미소 잃은 인형처럼 살아가다 우연한 기회에 운명처럼 만나게 된 젊고 매력적인 장교 ‘브론스키’와 세상에 허락받지 못할 사랑에 빠져들게 되며 결국 간절히 바라던 자유와 행복을 따라나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뮤지컬은 이 같은 중심 스토리를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무대 위로 깔끔하게 정돈해 옮겨놓았기 때문에 아직 원작을 읽지 못한 사람들도 편히 볼 수 있도록 제작됐다.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가장 먼저 시선을 이끈 것은 역시 무대 연출이다. 시작부터 귓가에 울리는 기차 바퀴의 마찰음과 기적의 울림소리가 뒤이어 긴박하게 전환되는 장면들에 생동감을 더하며 압도적인 스케일로 한순간에 마음까지 사로잡는다.

초대형 LED 세트는 19세기 러시아의 모습을 그대로 우리 눈앞에 펼쳐놓았다. 덕분에 어두움과 화려함이 공존하는 무대가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따뜻하고 익숙하다. 평화로운 푸른 빛의 스케이트장은 어느새 안나의 어두컴컴한 저택이 되어있고, 알맞게 익은 곡식이 춤추던 황금빛 물결은 잠시 후 위태로운 여인의 뒷모습을 비추는 기차 플랫폼으로 변해 있다. 이때 기차를 연상시키는 네 개의 철제 구조물과 두 개의 계단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장면의 전환마다 공간을 활용해 다양하게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상당한 볼거리였다. 앙상블은 각각의 장면 전환에 맞춰 빈틈이 느껴지지 않도록 무대를 꽉 채워내며 등장해 몰입도를 높인다. 다만 2막에 들어서면서 구조물을 수동으로 이동시키는 모습이 유독 눈에 띄는 경우가 몇 번 있었는데 이 부분만큼은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았다.

직선 형태의 하얀 빛으로 내리꽂히는 조명연출은 등장인물의 억눌린 감정과 그들을 통제하려 하는 힘을 표현하기에 탁월했고,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와 함께 검붉은 색으로 무대 위를 물들이는 배경 또한 위태로운 그들의 사랑이 다다를 결말을 예상하게 하는 것 같았다. 여러모로 연출에 세심하게 신경을 많이 썼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들인 무대 위에 선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도 좋았다.

삶의 태도에 누구보다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안나 카레니나’역으로는 김소현이 열연했다. 앞서 ‘열린 음악회’ 무대에서 먼저 선보인 공연곡으로 이미 감동적인 모습을 선사했기에 더 기대감이 컸는데 배역에 깊이 몰입되어있는 모습이 곧바로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곧 ‘안나’였다. 커다란 눈에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은 무대 위를 반짝이며 마지막까지 함께였다. 그리고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 ‘알렉세이 브론스키’로 분한 김우형은 힘이 넘치는 가창력과 섬세한 연기, 절도있는 무대 매너로 멋진 공연을 펼쳤으며, ‘알렉세이 카레닌’ 역의 서범석은 모든 것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감내하며 엄격한 세상의 규율 안에 갇혀 사는 일관적 캐릭터를 완벽하게 그려내 극의 중심을 잡아주었다. 사랑스러운 목소리의 정유지도 실연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 결국 진정한 사랑을 만나게 되는 ‘키티 세르바츠카야’를 잘 표현해 주었고, 묵묵히 키티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콘스탄틴 레빈’역의 최수형은 진심을 담아낸 연기와 따뜻한 음색을 통해 안나-브론스키 커플과 대립 구도를 이루며 순수한 사랑의 상징으로 함께 한다.

이렇게 주연 배우들의 열연이 펼쳐진 가운데 극 후반부에 등장하는 ‘패티’ 강혜정의 활약은 단연코 최고였다. 결정적인 순간, 안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그녀의 아리아는 뮤지컬 속 오페라를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자 이 작품의 핵심이기도 한 만큼 꼭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고, 느껴보기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넘버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감상 포인트이다. 각각의 장면에 서서히 스며들 듯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선율은 감상 후 더 강렬한 잔상으로 남는다.

갑작스럽게 빠져들고 만 사랑에 마치 하늘과 땅이 뒤섞여버린 듯 안나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표현한 ‘눈보라’는 서정적이면서도 애절한 멜로디에다 김소현 특유의 감성 연기가 더해져 관객들의 마음속에 잔잔한 파동을 그리며 휘몰아친다. 또 세상의 잣대와 구속을 떠나 진심이 이끄는 발걸음을 옮기겠다는 의지를 담은 ‘자유와 행복’도 인상적이다. 이 밖에 갓 시작된 사랑의 설렘을 담아낸 ‘그대 뜻대로 나의 여왕이여’, ‘당신 내 곁에 없다면’, ‘그때 그것을 알았더라면’, ‘오 나의 사랑하는 이여’도 집중해서 들어보면 더 좋을 곡들이다.

▲ 최윤영(아나운서/공연 칼럼니스트)
▲ 최윤영(아나운서/공연 칼럼니스트)

하지만 일부 조연 배우들이나 앙상블이 함께 부르는 넘버 가운데 번역이 어색하거나 대사와 완벽하게 어우러지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 약간의 불협화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장면을 설명하기 위한 부분이라 극에 저해되는 요소로 작용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관객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이기도 한 만큼 곡의 흐름에 맞춰 조금 덜어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또, 극 후반부 ‘안나’를 향해 거센 비난이 쏟아지는 장면에서 여과 없이 들리는 비속어도 다른 방법으로 표현한다면 더 편하게 관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선택을 과감히 실행한 안나. 어쩌면 안나를 완벽하게 이해하기란 어려울지도 모른다.

행복하지 않은 삶은 자신을 파괴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던 한 여인은 자신에게 그 무엇보다 소중했던 아들까지 두고 떠날 정도로 사랑만을 믿고 떠났지만 결국 또다시 찾아온 외로움에 파묻히고 말았다. 반복적인 경고에도 불구하고 가리어진 눈으로 오로지 앞만 보며 달리는 경주마처럼, 뜨겁게 불타오르는 사랑은 그만큼 식어버리기도 쉽다는 것을 너무도 늦게 알아버린 탓이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기차에 오른 그녀가 다다른 그 어딘가의 끝에서 신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면, 그땐 부디 모든 것을 지우고 그저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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