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 그 마음의 정성을 쓰는 내용은 자식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찾아서 취하거나 버리는 데 있을 뿐이다. <박세당(朴世堂, 1629-1703)>

아내의 자책

가끔 아내가 자책한다. 남의 집 부모들은 자식한테 정성을 쏟는데 자기는 늘 부족하다고 한다. 아이들도 열심히 공부하며 자기 할 일을 잘 하는 것 같은데 성적이 그만큼 잘 나오지 않아 아쉽다고 한다. 아내가 한숨을 쉰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학원을 옮겨줘야 하나?”

“잘하고 말고가 어디 있겠어. 공부는 애들이 알아서 해야 하는 거잖아. 능력 있는 선생을 만나는 게 중요하긴 하지만, 결국은 자기가 달려들어야 하는 거잖아.”

“그래도 내가 학원을 잘못 택했나 싶어서…….”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당신이 애들하고 나하고 상의를 했고, 집 형편도 고려하면서 같이 결정한 거잖아. 만약 책임이 있다면 우리 둘이 함께 져야 한다고 봐. 그리고 애들을 탓하고 싶지도 않아.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은 걸 어떻게 할 거야.”

“그래도 애들한테 잘하라고 이야기를 해줘야 하지 않나? 애들도 속상할 거 아냐.”

“열심히 하라고 한마디 할 수는 있겠지. 그런데 열심히 하고 말고는 애들 마음에 달린 거라고 봐. 공부 잘하면 좋기야 하지만, 그게 일생을 좌우하진 않잖아. 애들 각자 장점도 있으니 너무 자책하거나 걱정하지 말자.”

“그래. 당신 말이 맞긴 한데, 지들도 기가 죽을 거잖아. 요즘은 애들이 공부 못하면 무시하고 그래. 학벌도 우리 때보다 더 따지고.”

“당신 말대로 상처를 받는 일이 있겠지. 그럼 그걸 막기 위해 우리 둘이 할 수 있는 게 뭘까. 돈 들여서 비싼 학원 보내고, 애들한테 성적 가지고 몰아치면서 ‘참고 공부해라, 세상 만만치 않다’고 가르쳐야 하는 건가? 상처를 받더라도 우리 둘이 괜찮다고 하면서 편을 들어 주면 그 힘으로 살아갈 거라고 봐. 가끔 잔소리를 해도, 그렇게 해왔잖아.”

“휴우, 가진이가 그러더라고. 고등학교 다닐 때 책상에 앉아 있긴 했는데, 공부가 재미없어서 잘 못했다고. 그걸 이제야 말을 하네.”

“그런 마음으로 앉아 있으려니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래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했어. 겪으며 이겨낸 거고.”

“그냥 해야 되니까 했던 거 같네. 조금만 적극적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걔가 그런 성격을 갖게 되는데 우리 둘이 영향을 줬겠지 아마. 그럼 그게 전적으로 우리 탓인가? 당신은 가진이한테 정성을 쏟았고, 최선을 다했잖아. 어찌 보면 당신 덕분에 가진이가 그나마 자기가 관심을 뒀던 걸 하는 거로 생각해. 사람들 보면 아이한테 적극적인 성격을 지니라고 강요를 하는데, 세상 사람이 어떻게 다 그럴 수 있어. 그리고 적극적인 게 무조건 다 좋고 옳은가? 자기 성격에 따라서 살아가면 된다고 봐.”

“반면에 서진이는 자기주장을 안 굽혀. 그래서 내가 잔소리를 덜 하려고 하는데 쉽지가 않네.”

“서진이는 불합리한 걸 못 참는 성격이잖아. 걔가 보기에 우리한테 답답한 면이 있으니 그런 거겠지. 입시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을 거고. 그러니까 집에서라도 편하게 있도록 해야지. 당신이 잔소리 안 하는 건 잘하고 있는 거라고 봐.”

“그래서 가만히 두는데 답답하지. 나는.”

“그럼 나는 안 답답할 거 같아? 당신이 예전에 나한테 그랬잖아. 자식 키우는 게 도 닦는 거하고 비슷한 거 같다고. 우리 둘이 같이 도 닦아야지 어쩌겠어. 지켜보고 도우면서 스스로 극복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봐.”

“그게 옳은 걸까?”

“모르지 나도. 어떻게 옳다고 단정할 수 있겠어. 서진이는 누가 잔소리를 한다고 그 말을 듣는 성격이 아냐. 자기가 마음을 먹어야 움직이잖아. 지금 자기 성격대로 살고 있으니, 우리 맘에 맞지 않는 면이 있더라도 놔두는 게 좋을 거 같네.”

“그래. 알겠어. 휴우.”

“우리가 힘이 있을 때까진 쟤들을 책임져야 하겠지만, 언젠가 우리가 죽으면 쟤들은 쟤들대로 살아야 하잖아. 애들한테는 우리가 모르는 자기 생각이 있을 거거든. 그러니까 우리 눈에는 안 차 보여도 애들 나름대로 버티며 사는 거잖아. 부모라고 해서 우리 생각대로 애들을 관리하려고 들면 안 된다고 봐.”

“하진이는 성격이 좋기는 한데 공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거 같아. 겉보기엔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지만, 우리한테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속이 얼마나 상할 거야.”

“속상하겠지. 그래서 우리 둘 다 걔한테 공부 스트레스를 안 주려고 하잖아. 하진이는 정말 속이 깊고 넓은 아이잖아. 걔는 어딜 가도 환영받으며 살 거야. 아이들이 살아가는 힘은 당신하고 내 믿음에서 나온다고 생각해. 쟤들이 어디서 꺾이더라도 우리가 편을 들어주면 그 힘을 얻어서 살게 될 거야. 우리도 그렇게 살아왔잖아.”

 “그런가? 그래도 나는 내가 부모노릇 못 하고 있는 거 같네. 남들처럼 열심히 살고 있는 거 같지도 않고.”

여보, 당신은 좋은 엄마야

이야기를 하는 내내 아내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 어두운 표정에 내 책임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아내는 공부 문제 뿐 아니라, 아이들의 거의 모든 일상을 걱정한다. 아이들이 아파도, 심지어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교우관계 때문에 아이들이 힘들어 해도, 자신이 마음을 덜 기울여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마음 아파한다. 『논어(論語)』에 이런 말이 나온다.

맹무백(孟武伯)이라는 사람이 효도에 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부모는 다만 자식이 병 들까봐 걱정하실 뿐이다.”<『논어(論語)』「위정(爲政)」>

이제 엄마가 된 아내도, 내 어머니도 아내의 어머니도 그러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노심초사 덕분에 이렇게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말에도 귀 기울여 볼만하다.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 그 마음의 정성을 쓰는 내용은 자식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찾아서 취하거나 버리는 데 있을 뿐이다. <박세당(朴世堂), 『사변록(思辨錄)』 「전십장(傳十章)」>

그 옛날과 달리 신경을 써야 할 일이 많아진 오늘의 눈으로 보면 무척 비현실적이고, 구체적이지도 못한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부모의 역할은 저 말 안에 다 들어 있지 않은가 한다. 자식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찾으려면, 자식의 성정과 일거수일투족에 온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 뒤에 자식이 성정에 맞는 길을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하겠다.

▲ 김재욱 칼럼니스트
▷저서 <군웅할거 대한민국 삼국지>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왜곡된 기억 >외 6권

그러니까 아내는 자식이 아플까봐 걱정하고, 자식의 성정과 행동거지를 살피면서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이것만으로도 차고 넘치는데 늘 부족하다고 자책을 할 만큼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하고 아내가 이 세상에 없을 때, 자식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알 수 없다. 잘 살아주기를 바라며 이렇게 하루하루 걱정하고 지켜보며 도울 수 있을 뿐이다. 한숨을 쉬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해. 애들 교육엔 정답이 없어. 당신의 방법이 최선이야. 다른 사람들 말에 흔들릴 필요 없고, 다른 집 부모하고 비교할 것도 없어. 우리가 꼭 애들 모든 걸 다 챙겨줘야 해? 애들도 스스로 하는 게 있어야지. 하루하루 우리 할 도리 잘하고 있고, 애들도 애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어. 다 열심히 살고 있어.”

여보, 당신은 좋은 엄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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