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전란이 끝난 뒤 의병장들은 대체로 공훈에 합당한 포상이나 예우를 받지 못했다. 선무(宣武)공신에 책봉되지 못했고, 이런저런 관직을 거치기도 했지만 끝내는 은둔하면서 “익힌 곡식을 끊고 솔잎만 먹다가(벽곡찬송(辟穀餐松)”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곽재우도 그런 사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죽고 죽이는 처절한 살육이 난무한 전장보다 현실의 정치적 여건은 의병장에게 좀 더 엄혹했는지도 모른다.1)

위의 글에서 드러나듯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하고자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의병장들은 대부분 당대에 그 전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전장에서, 혹은 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대부분의 이유는 당쟁에서 의병장들이 조정의 유신들과 다른 정파에 있었거나, 선조나 조정 중신들이 의병의 조직과 활약을 역모의 가능성과 무리하게 연결시켰기 때문이었다. 곽재우 역시 홍의장군으로 명성이 자자했고 몇 차례 관직에 등용되었지만, 결국 말년에는 자신의 근거지에서 은거한 끝에 죽음을 맞이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쩌면 곽재우의 말년은 다른 의병장보다는 조금 나은 모습이었을지도, 또는 다른 의병장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곽재우가 자신의 삶을 현명하게 선택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곽재우의 이러한 선택은 곽재우가 그 생애동안 “의병장”이면서도 조정과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켰던 것도 그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번 회차에서는 조선을 구한 의병장 곽재우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조정과 갈등했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곽재우와 조정 사이의 갈등의 시작은 그의 과거급제 취소였다. 곽재우는 32세였던 1585년(선조18)에 과거에 급제했다. 그것도 제2등이었다. 그러나 그의 과거급제는 취소됐다. 답안에서 선조의 눈에 거슬리는 내용이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과거제도가 공식적으로는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제도였고, 입신양명(立身揚名)이 당시 글공부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가진 포부였으며, 과거 합격이 지금의 고시와도 비교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곽재우가 가졌을 실망감과 조정에 대한 분노는 매우 컸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곽재우는 과거를 포기하고 낙향해서 농사를 지으면서 상당한 재력을 갖췄고, 이것이 임진왜란이 발발할 때 의병을 모을 수 있는 근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앞 칼럼에서 언급했듯이 곽재우의 활약은 경상도 지역 방어와, 왜군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로의 진출을 막아낸 중요한 원인이 됐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와중에도 곽재우의 강직한 모습이 조정의 선조나 중신들과의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김수(金睟, 1547-1615)와의 대립이었다.

곽재우와 김수 사이의 대립에 대하여 『선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선조가 이르기를,

"곽재우(郭再祐)가 김수(金睟)를 죽이려고 하는데, 혹 자신의 병세(兵勢)를 믿고 죽이려는 것이 아닌가?"

하니, 도승지 유근이 답하여 아뢰기를,

"곽재우가 김수의 편비(褊裨. 장군의 부하 장수)에게 통문(通文)을 보내어 ‘네가 김수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군사를 일으켜 죽이겠다.’고 하였다 합니다."

하였다.2)

이 기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592년에 작성된 것이다. 이것은 급박한 전란의 와중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곽재우는 김수를 죽이겠다고 할 정도로 강한 분노를 가지고 있었다. 그 원인은 김수가 임진왜란이 발발해서 동래성이 함락되었을 때 경상우감사(지금의 도지사)로서 왜군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도망쳤고, 한양의 최후 방어선이었던 용인 전투에서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김수가 당시 김성일에게도 질책을 받았음은 물론이고, 백성들에게도 비난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곽재우의 분노는 당연했다. 그러나 당시 경상우감사이자 근왕병을 이끌고 용인전투에 참여했던 김수와 대립했다는 것은 조정에게는 부담을 주는 일이었다. 실제로 위의 기록에는 선조가 곽재우도 김수도 벌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더 흥미로운 점은 선조가 곽재우가 분노할 수 있는 원인을 곽재우가 이끌던 강력한 군(軍)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훗날 선조가 임진왜란을 막아내지 못하면서 임진왜란에서 활약했던 장수나 의병장을 의심하고 역모를 의심했던 모습과도 연결된다. (다음편에 계속)  


1)  김범, 장선환, 「곽재우 [郭再祐] - 임진왜란의 대표적 의병장, 홍의장군」, 『인물한국사』.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4777&cid=59015&categoryId=59015

2)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1592) 8월 7일 갑오 1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8007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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