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배우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한 공부를 했는데, 오늘날의 배우는 사람들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부를 한다.”『논어(論語)』 「헌문(憲問)」

선생님 계신 병실에서

2017년, 봄의 어느 날. 대학 은사이신 배상현 선생님께 안부전화를 드렸다. 사모님께서 “선생님이 편찮으셔서 석 달 째 병원에 계시다.”고 하셨다. 죄송하고 마음 아팠다. 다음날 선생님 계신 병원으로 찾아갔다.

선생님은 네 명이 함께 쓰는 병실에 계신다고 했다. 심호흡을 하고 들어갔는데, 침대 하나는 완전히 비어 있고, 두 분을 보니 우리 선생님이 아니다. 그럼 아마 저 커튼 뒤에 계시겠구나. 커튼을 열었는데,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할아버지가 누워계셨다.

‘이상하네? 입구에 분명히 선생님 성함이 붙어 있었는데 왜 안 계시지?’

다시 그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할아버지도 무덤덤하게 나를 쳐다본다. 순간, 눈물이 왈칵 나왔다.

“선생님, 저 재욱입니다. 저 알아보시겠어요?”

아, 어떻게 일 년 만에 이렇게 되실 수가 있지. 울면 안 되는데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그러나  선생님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바쁠 텐데 왜 왔는가.”

“선생님,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인사드리러 왔어요.”

“뭐라고 하는 지 안 들리네. 이어폰 켜달라고 하게.”

다행히 선생님 눈빛은 예전 그대로고, 목소리에도 힘이 있었다. 안도하며 정신을 차렸다. 예전처럼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선생님이 너무 야위셔서 몰라봤잖아요. 하하하.”

“나도 첨에 자넨 줄 몰랐잖아. 자네는 살이 좀 졌구먼.”

“선생님한테서 빠진 살이 저한테 다 와서 그렇잖아요. 왜 그러셨어요. 하하하.”

“허허, 허리가 아프더니 그게 욕창이 됐네. 석 달째 누워있네.”

 “어서 일어나셔서 선생님 좋아하시는 책 보셔야죠.”

“글쎄. 그래야지. 시간이 좀 걸리겠지. 그런데 자네 바쁠 텐데 왜 왔나.”

“선생님 편찮으신데 제가 어떻게 안 와요?”

“부담될까봐 알리지 않았잖아. 이제 가 보게.”

“네? 아이고. 하하. 저 금방 왔잖아요. 어째 바로 가라고 하실 수가 있어요?”

“그래. 자네 밥은 먹고 사나?”

“그럼요. 돈을 잘 못 벌어서 그렇지….”

“밥 먹고 살면 되는 거야. 이렇게 살아 주니 고맙네."

“선생님 기대에 부응을 못해서 늘 죄송해요. 공부는 안 하고 잡문이나 쓰고 있습니다.”

“아냐. 글 쓰는 일 쉽지 않네. 자네 책이 다 말해주는 거야. 저술 열심히 하게.”

“…….”

편찮으신 선생님 앞에서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이기적이고 못난 나는 또 나 아픈 이야기를 해버렸다.

“선생님, 저 지금 공부 안 하고 다른 글 쓰고 있어요. 어려워서 공부를 못 하겠어요. 솔직히 뭘 해야 될 지도 모르겠어요. 하루하루가 힘들어요.”

“시간이 해결해 주네. 시간만큼 위대한 건 없는 거야. 다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아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뭔가를 하려고, 바꾸려고 노력해야 되잖아요.”

그간의 소식을 전할 때 그 내용이 조금 다를 뿐, 몇 년을 만났어도 선생님과 내 대화는 늘 이렇게 끝난다. 신기한 것은 선생님의 저 말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착 가라앉고 인정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뭐가 되려고 애쓰지 말게

선생님은 대학시절 『사서(四書)』를 가르치셨다. 예전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자가 말했다. “옛날의 배우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한 공부를 했는데, 오늘날의 배우는 사람들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부를 한다.”『논어(論語)』 「헌문(憲問)」

자신을 위한 공부를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고 하는데, 내 인격을 높이기 위해서 하는 공부를 뜻한다. 반면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공부를 ‘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고 부르는데, 지식을 습득해서 남에게 인정을 받은 뒤에 부귀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하는 공부를 뜻한다. 저런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부귀를 추구하다가 몸을 망친 사람들도 많지만, 위기지학을 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현재 학교에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사회생활을 하는 분들에게 저런 이야기를 하면 대번 ‘뜬구름 잡는 소리’라는 말을 들을 게 뻔하다. 맞는 말이다. 사실 요즘엔 위기지학과 위인지학의 경계가 모호하기도 하다. 다만 선생님은 저 말을 통해 ‘너를 위해 공부하고 있으니, 무언가를 얻기 위해 너무 애쓰진 마라’고 하신 것이다. 이런 말씀도 하셨다.

“부귀한 처지가 되면 그에 맞게 행동하고, 빈천한 처지가 되면 그에 맞게 행동하고, 오랑캐의 입장이 되면 그에 맞게 행동하고, 환란에 직면하면 그에 맞게 행동하니, 군자는 어디를 가더라도 스스로 얻지 못할 것이 없다.”『중용(中庸)』

말이 쉽지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 상황에 다 맞춰서 살 수 있겠나. 그러나 가만히 생각을 해 보면 살아가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고, 행하기 힘들면 이런 마음이라도 먹어야 살아갈 수 있다. 선생님이 나한테 ‘밥 먹고 살면 되는 거다’고 하신 것, 전공 분야 공부를 등한시 하고 잡문을 쓴다고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한테 ‘글쓰기 쉽지 않다. 저술 열심히 하라’고 하셨던 것 모두 저 말 속에 들어 있는 것 같다.

오늘,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뭐가 되려고 애쓰지 말게. 그렇게 어떻게 사나. 힘들어서 못 사네. ‘가다보니 여기까지 왔구나.’ 하면서 살면 되는 거야.”

“네.”

“이제 가 보게. 자네 잘하고 있네. 다 살게 되어 있네.”

“선생님 퇴원하시면 댁으로 찾아뵐게요. 일어나셔야 돼요.”

“그러세.”

▲ 김재욱 칼럼니스트
▷저서 <군웅할거 대한민국 삼국지>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왜곡된 기억 >외 6권

지금껏 선생님의 말씀은 옳았으니 앞으로도 옳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틀린 말씀이 있다. ‘시간만큼 위대한 것은 없다’ 시간은 위대하지 않다. 우리 선생님을 이처럼 야위도록 만든 시간이 도대체 뭐가 위대한가.

“뭐가 되려고 하지 말게. 자네 잘 하고 있네. 다 살게 되어 있네.”

저 말씀이 나한테 남긴 유언이 되어버렸다.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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