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전란의 와중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는 김수의 목을 베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을 비롯하여 이후에도 수차례 조정의 신료, 심지어 왕과 굵직굵직한 대립을 일으켰다. 물론 곽재우는 그가 세운 전공을 인정받아서 관직을 제수 받기도 했다. 처음으로 관직에 제수받은 시기는 거병 후 전과를 낸 직후인 것으로 보인다. 과거 급제가 취소된 후 의병 거병으로 입신양명한 것이다. 그런데 『선조실록』에 갑자기 이런 기록이 등장한다.

이덕형이 선조에게 아뢰기를,

"국가의 위급함이 이와 같은데 믿을 만한 장수의 재목이 전혀 없으니 의병장을 선발하여 특별히 등용하면 반드시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곽재우(郭再祐)는 심(心)과 기(氣)가 상하여 처사가 온당하지 못한 듯하나, 군법이 엄명(嚴明)하고 병졸을 사랑합니다. 처음 의병을 규합하여 적의 토벌에 공이 많았으나 강화(講和)를 좋게 여기지 아니하여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벼슬을 제수하여 불러와서 그가 하는 바를 보아 처리함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선조가 이르기를,

"나는 이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한다. 이처럼 쓸 만하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니 비변사에서 의논하여 하라. 또 우리나라에 장수 재목이 이처럼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였다.-(후략)-1)

위의 기록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확인된다. 첫째, 곽재우가 전공을 인정받아서 관직을 제수 받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곽재우는 선조 25년(1592) 유곡 찰방(幽谷察訪)을 제수 받은 것을 비롯하여, 신료들이 곽재우에게 정 5품 관직에 이어 당상관에 제수할 것을 건의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실제로 진주목사에 제수되었고, 경상도 관찰사, 경상우수사 제수가 건의되기도 하였다. 둘째, 첫째 사실과 연결되는 사안으로, 곽재우는 일본과의 강화에 반대하며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했다. 한음 이덕형이 “강화(講和)를 좋게 여기지 아니하여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고 언급한 것이 그 근거이다. 이것은 이전까지 곽재우가 관직을 제수받고 관리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선조가 곽재우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전에 수차례 전공을 세우고, 다양한 관직에 제수되었거나 제수가 건의된 곽재우를 선조가 몰랐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선조가 “나는 이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한다.”라고 언급한 것은 선조가 가졌던 곽재우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표현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선조는 곽재우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몇 차례 보여준 적이 있다. 선조 29년(1596)에 곽재우의 사람됨을 이유로 도체찰사로 임명할 수 없다는 뜻을 비변사에 전달2) 한 적도 있었고, 김수를 죽이려고 한 행동이 도적과 다름없다고 평가하면서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3) 등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김수의 목을 베려고 한 것이 병력을 믿고 그러는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선조가 이순신에 대하여 의심했던 것과 비교해도 매우 유사한 모습이었다.

이순신이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서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듯이, 정유재란의 조짐이 보이자 곽재우는 다시 등용되었다. 경상좌도 방어사(防禦使. 종2품)가 된 곽재우는 경상도 일대에 산성을 축조하고, 이미 지어진 산성에 주둔하며 왜군을 막아냈다. 그러나 곽재우는 계모가 작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 다시 낙향했다. 흥미로운 것은 곽재우가 상중일 때도 조정에서는 곽재우에게 관직을 맡을 것을 요구했고, 이에 대하여 곽재우가 상중이라는 것을 이유로 관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조선시대에 상을 당한 관리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지만, 임진왜란 막바지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곽재우와 조정 사이에 남아있는 미묘한 갈등이 남아있었을 가능성도 예상할 수 있다.

곽재우가 상을 치르는 동안 전란은 종료되었다. 그러나 곽재우는 외침이 끝난 후에는 내부의 싸움, 즉 당쟁 속에서 조정과 대립했다. 김범은 그의 연구에서 영의정 이원익의 파직에 항의하면서 선조의 허락을 얻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것을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았다. 이 사건으로 선조는 곽재우에게 장 100대를 치고 유배를 보내도 모자란다고 대노했고, 결국 상대 당파의 탄핵으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그의 공로는 선조와 조정에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곽재우가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은 것은 그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한 이후였다. 그러나 광해군 재위 기간에도 역관(譯官)과 원접사(遠接使)가 왕명을 무시했다고 비판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 낙향하는 등 계속해서 조정과 갈등을 빚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결국 광해군 재위 당시 가장 큰 사건이었던 영창대군(永昌大君) 사사 문제에서 영창대군을 옹호했다가 탄핵되어 죽음을 맞이할 위기를 맞이하였다.4)

이와 같이 나라를 구하고자 의병을 일으켰던 곽재우는 수차례 조정과 대립하면서 상경과 낙향을 반복했다. 여기에는 곽재우의 올곧은 성격, 외침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선조의 의심, 당쟁 등 다양한 원인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 속에서 곽재우는 그의 고향인 현풍에 은거하면서 도인의 풍모를 보이기 시작했고, 이것은 또다른 평가를 낳았다.(다음 편에 계속)


1)  『선조실록』 70권, 선조 28년(1595) 12월 5일 계묘 2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812005_002

2)  『선조실록』 72권, 선조 29년(1596)  2월 18일 을묘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902018_002

3)  『연려실기술』 권16, <선조조 고사본말> 임진의병 곽재우.

4)  김범, 장선환, 「곽재우 [郭再祐] - 임진왜란의 대표적 의병장, 홍의장군」, 『인물한국사』.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4777&cid=59015&categoryId=59015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