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인데 어째서 적게 하는 것을 취했는가. 말할 만한 것은 하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윤휴(尹鑴, 1617-1680>

정치색을 드러내는 선생

학교 수업 시간에 자신의 정치색과 가치관을 드러내면서 현실 정치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선생이 있다고 들었다. 무슨 과목이든 직간접적으로 현실과 연결이 되어 있으므로 해당 과목의 내용을 학생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이해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문제가 되는 법이다. 어떤 선생은 특정 인물을 지나치게 칭찬하거나 비판을 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학생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주입하려다가 학생들의 반감을 사기도 한다.

나는 선생이 적어도 수업 시간에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토론 수업이든 강의 위주의 수업이든 선생이 한 쪽에 서 버리면 결과적으로 학생이 자유롭게 생각하기 어렵고, 수업 내용 또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어렵다. 아울러 자신의 생각을 여과 없이 말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월권이며 직무유기에 가까운 일이라고 보고 있다.

이렇게 말을 하면서 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늘 ‘딴 소리’를 하더라도 학생이 불편을 느낄만한 말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고 강의실에 들어간다. 이런 마음을 먹고 들어갔음에도 강의 중에 실수를 한 적이 몇 번 있다. 수년 전 고려대에서 “생활한자”과목을 강의했을 때 일이다. 교재에 ‘○○일보’의 기사가 실려 있었는데, 이 글을 읽다가 이런 말을 했다.

“○○일보가 옳은 말을 할 때도 있네?”

스쳐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평소의 내 생각이 툭 튀어 나온 거였다.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서 그런지 학생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만의 생각이다. 이후 강의 시간에 더 말조심을 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학생 한 명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교수님, 제가 다음 시간에 입사 면접을 가야해서 결강할 것 같은데요. 선처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 네. 출석 인정을 해 달라는 말씀이죠?”

“네. 죄송합니다.”

“흠, 이걸 어째야 되나. 수업은 수업이고, 학생 일은 학생 일인데…. 좋습니다. 다음 시간 출석 인정 해 드릴게요. 대신 빠진 시간에 나간 진도는 학생이 알아서 공부하세요. 이 정도 페널티는 받아들여야 할 것 같네요.”

“네. 그건 제가 감수해야죠. 고맙습니다.”

이처럼 훈훈하게 마무리가 되어가던 중, 문득 이 학생이 지원한 회사가 어디인지 궁금해졌다.

“실례지만 어디로 면접을 보러 가세요?”

“아, 하하, 교수님 싫어하실 텐데….”

“네? 제가 왜요?”

“○○일보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구나. 진심을 담아 사과를 했다.  

“아이고, 미안해요. 그 때 제가 오버를 했어요. 학생들 생각이 다양한데, 제가 미처 그 생각을 못 하고….”

“하하, 다들 싫어하는 거 알아요. 괜찮습니다.”

“제가 말을 해버렸지만,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아닙니다.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 학생이 잘 넘어가 주었기 망정이지 혹시 내성적이면서 나와 생각이 다른 학생이 그런 말을 들었다면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 학생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내 잘못이다. 이 학생에게 묻지 않았더라면 계속해서 이런 실수를 반복했을 것이다. 늘 수업 시간엔 내 색깔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지만, 이 일을 겪은 이후 더 조심을 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 말한다

다시 생각해 봐도 그 날은 참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선생님, 그런 말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고 했다면 즉시 사과를 했겠지만, 수업 분위기가 이상해졌을 것이다. 그 피해는 학생들이 입었을 것이고…. 실수를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지만, 줄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래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세상사는 방식은 달라졌어도 말조심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옛 글을 보면 말에 관한 말이 무수히 많다. 중국 최초의 시집인 『시경(詩經)』에 이런 말이 있다.

“하얀 옥돌의 티는 갈아서 없앨 수 있지만, 말의 티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시경(詩經)』 「대아(大雅)」 ‘억(抑)’>

입에서 나간 말은 다시 돌이킬 수 없으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논어(論語)』를 보면 공자(孔子)의 제자인 남용(南容)이라는 사람이 이 구절을 매일 세 번 외우자 공자는 이를 훌륭하다고 여겨 자신의 조카딸을 이 사람한테 시집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도 말과 관련한 일화가 나온다. 공자가 주(周)나라 왕실의 사당인 태묘(太廟)에 갔더니 사당의 계단에 쇠로 만들어진 사람이 서 있는데 입이 세 겹으로 봉해져 있었다. 그 동상의 등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옛날의 말을 삼가던 사람이다. 경계하여 말을 많이 하지 마라. 말이 많으면 실패가 많다.”<『공자가어(孔子家語)』 「관주(觀周)」>

이런 말을 보고 있으면 수긍이 가면서도 한편으론 좀 답답하기도 하다. 조심하라는 뜻이라는 건 알겠는데 이것저것 다 따지면 할 수 있는 말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일까. 맹자(孟子)는 이런 말을 남겼다.

“선비가 말하지 않아야 할 경우인데도 말을 하는 것은 말을 가지고 꾀는 것이고, 말해야 할 경우인데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으로 꾀는 것이다. 둘 모두 담에 구멍을 뚫거나 , 담을 넘어가서 도둑질을 하는 부류라고 할 수 있다.”<『맹자(孟子)』 「진심(盡心)」>

말을 해야 할 때는 하고 하지 않을 때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말은 사람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므로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그럼 어떤 경우에 말을 해야 하는가. 주자학(朱子學)이 조선을 석권했던 시절, 주자의 설에 반론을 제기 했다가 ‘유학을 어지럽히는 도적’으로 공격을 받아 죽은 백호(白湖) 윤휴(尹鑴, 1617-1680)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의 도는 말이 적은 것을 귀하게 여겼다. 말은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인데 어째서 적게 하는 것을 취했는가. 말할 만한 것은 하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를 자랑하는 말, 남을 헐뜯는 말, 실속이 없는 말, 바른 법이 아닌 말은 하지 않아야 하니, 이 네 가지를 염두에 두면 말을 적게 하려고 다짐하지 않아도 적어진다. 그러므로 “군자의 말은 어쩔 수 없는 일을 만나게 된 뒤에 말한다.”고 했고, 또 “옛 사람의 말이 적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을 만난 뒤에 말했기 때문이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왼지 오래되었지만, 늘 이 점에 부끄러운 점이 있었기에 글로 써서 남겨둔다.<윤휴(尹鑴), 『백호집(白湖集)』 「언설(言說)」>

평소 저런 글을 읽으면서 말조심을 하리라 마음먹었으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수업 시간뿐만이 아니었다. 일상 속에서 조금만 맘에 맞지 않는 일이 있어도 곧바로 말을 뱉어버려서 여러 사람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줬던 일이 많았다. 누군가가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처럼 ‘늦었다고 생각할 땐 진짜 늦은 것’ 일수도 있겠지만, 지금부터라도 실수를 줄여야겠다고 마음먹는다.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한 번 멈춘다

나를 포함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처럼 의도치 않은 실수를 한다.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지만, 이런 실수는 나중에라도 알고 고치면 된다. 실수를 하고 있으면서 그게 실수인 줄 모르는 게 더 큰 문제가 아닐까 한다. 이런 실수는 아무래도 부모, 선생, 연장자, 상급자, 선배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현재 한국의 사회에서 아무래도 이들은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 말할 기회가 많기 때문에 그만큼 실수가 나올 확률도 높다. 아울러 이들은 ‘이런 말은 그 위치에 있는 사람이 들어야 한다.’ 거나 ‘내 올바른 생각을 전해야 한다.’ 거나 ‘너희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말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생각이 바탕에 있으면 말의 내용이 일방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크다. 말하기 전에 이미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말조심에 남녀노소를 구분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 그래도 젊은 사람들보다 어른들이 더 조심을 해야 하겠다. 젊은 사람들한테는 실수를 만회할 시간이 있지만 어른은 그렇지 못하고, 살아온 시간만큼 실수의 대가도 클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책에 나온 격언대로만 살았다면 이 세상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살 수는 없다. 하루하루 실수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실수를 줄이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한 번 멈춰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일 분 뒤에 말했던 일을 후회할 수도 있다.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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