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禍)와 복(福)의 이치에 대하여는 옛날 사람들도 의심해 온 지 오래되었다. 충(忠)과 효(孝)를 행한 사람이라 하여 반드시 화를 면하는 것도 아니고, 음란하고 방탕한 자라 하여 반드시 박복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선(善)을 행하는 것이 복을 받는 도(道)가 되므로 군자(君子)는 부지런히 선을 할 뿐이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굣길 교통사고

지금은 대학생인 딸아이 가진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있었던 일이다. 아침 등굣길에 학교 앞에서 교통사고가 났다. 가진이는 학생이 차에 치여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도로는 학부모 차량으로 붐비는데 학생이 도로에 쓰러져 있으니 막힐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119에 신고를 했고, 그 학생도 무사했다고 한다. 사고가 난 다음날 사연을 듣게 됐다. 가진이가 말했다.

“서진이(둘째)가 먼저 현장에 갔어. 나는 좀 천천히 가고 있었는데, 앞에서 서진이가 ‘어떡해! 어떡해!’ 하면서 학교에 전화를 하는 거야. 제일 먼저 본 아이는 울고 있고.”

“너도 어제 손까지 떨렸다며? 지금은 괜찮아?”

“응. 괜찮지.”

“만약 그 아이가 잘못 됐으면 너도 충격이 컸을 거야. 무사하니까 이렇게 웃고 있는 거지. 정말 다행이다.”

“맞아. 그랬을 거 같아. 학교에 있는데, 손발이 다 떨리고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 애들하고도 이런 이야기를 했어. 트라우마가 뭔 지 알 거 같다고.”

“그러게 얼마나 놀랐겠냐.”

“더구나 나는 그렇게 큰 사고는 이번에 처음 봤잖아. 눈앞에서 사람이 다쳐서 피를 흘리는 거.”

“그 학생이 무사하니 우선 그게 다행이고, 너는 살면서 이런 걸 다시는 안 보면 좋겠지만, 만약 보게 되면 그 때는 침착하게 대응하게 될 걸?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해라. 그런데 너 나중에 또 비슷한 일을 겪으면 어제처럼 교통정리 할 거냐?”

“하하하. 아마도? 근데 그거 하면서 참 어이가 없었어.”

“뭐가?”

“사고 현장 거의 바로 앞에 있는 차도 빵빵거리는 거야. 사람이 다친 걸 몰랐을 수도 있지만, 어떻게 계속 그럴 수가 있어? 나 같으면 내려서 상황이라도 보겠다. 그리고 차를 빼려면 맨 뒤에 있는 차부터 후진으로 빠져야 되는데, 다들 앉아서 빵빵대기만 해.”

“…”

“그래서 내가 뛰어다니면서 차 한 대 한 대 모두한테 사고가 났다고 말했어. 그 사람들 다들 학부형이잖아. 내가 교복을 입고 헐떡거리면서 다니는데, 어떤 사람은 신경질적으로 ‘사고요?’ 하면서 자기애한테 ‘내려서 걸어가라’고 하는 거야.”

“사람이 다쳤다고 그랬으면 반응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순간 그 생각이 안 나더라고. 그래도 사람이 다쳤다는 말은 안했지만, 사고가 났다는 말을 하는데 ‘사람은 다치지 않았냐?’고 물어보면 안 돼? 그걸 묻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

“네가 겪은 일 속에 우리나라 사회의 한 모습이 들어 있는 것 같네.”

“맞아. 자기 아이 지각 안 하는 게 먼저야."

“너는 지각 안 했냐? 하하.”

“안 했지. 다행히.”

“다행이네. 그런데 지각을 하게 돼도 계속 그렇게 했을까?”

“흠, 그래도 차 빼라고 말하고 다녔을 거 같아.”

“그럼 네가 손해를 보잖아.”

“하하. 그러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잘했어. 그저 아빠가 생각하는 건, 좋은 일을 하고도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는데, 최소한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하는 장치 정도는 필요하다는 거야. 만약 네가 지각을 했다면 선생님이 지각 처리를 안 해야 한다는 거지. 만약 지각을 하고 선생님께 사정을 말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지각 처리를 하는 사람도 있을 거라는 말이잖아. 지각하고 네 뿌듯함하고 바꾸는 거도 좋은데,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그렇게 개인이 다 책임지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닐까?”

“하하. 그건 그러네?”

“여하튼 잘 했다. 어제 정말 수고 많았어.”

머리 둘 달린 뱀을 죽인 손숙오(孫叔敖)

가진이는 좋은 일을 하고 손해도 보지 않았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남한테 도움을 주고 오히려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 길 잃은 아이의 엄마를 찾아주다 중요한 약속 시간을 놓치기도 하고, 다친 사람을 돌봐 주다 지각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선행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거나 ‘내 문제보다 사고를 당한 분의 일이 더 급하다’고 말한다. 이와 비슷한 옛날이야기 하나가 있다. 중국 한(漢)나라 가의(賈誼, BC200- BC168)가 쓴 『신서(新書)』 에 손숙오(孫叔敖)라는 사람의 일화가 실려 있다. 손숙오는 중국 춘추시대 초(楚)나라의 명재상이다.

손숙오가 어린 아이였을 때, 나가서 놀다가 돌아와서는 근심을 하면서 밥을 먹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묻자 울면서 대답했다.

“제가 오늘 머리가 둘 달린 뱀을 봤는데요. 언제 죽게 될지 모르겠어요.”

“그 뱀이 지금 어디 있어?”

“머리 둘 달린 뱀을 본 사람은 죽는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또 보게 될까봐 뱀을 죽여서 땅에 묻었어요.”

“걱정 마라. 너는 죽지 않을 거야. 남몰래 덕을 베풀면 하늘이 복을 준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 사연을 듣고 손숙오가 어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중에 손숙오는 초나라의 영윤(令尹, 재상)이 되었을 때, 그 자리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를 신뢰했다고 한다. <가의(賈誼), 『신서(新書)』 권6>

이 이야기는 ‘음덕양보(陰德陽報, 남 몰래 덕을 베풀면 드러나는 보답을 받음)’ 라는 성어를 소개할 때 자주 소개되는 일화다. 손숙오의 명성을 빌려 선행을 권장하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이런 교훈을 빼고 보더라도 어린아이가 참 기지가 있고, 마음이 무척 따뜻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손숙오는 하늘이 내려준 복을 진짜로 받았을까?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커서 초나라의 재상이 되었으니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반드시 보답을 받기 위해 선행을 한 건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받기는 했으니 음덕양보라는 말이 실현된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선행을 한 사람이 모두 손숙오와 같은 보답을 받고 있기는 한 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앞서 가진이처럼 가벼운 손해를 감수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치자. 물론 그 조차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현실에선 보답은 고사하고 선행을 하지 않는 것을 넘어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일이 많다. 약삭빠르게 자기 것만 챙기는 사람이 성공가도를 달리는 경우도 있다. 굳이 예를 들지 않더라도 현실은 이렇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부지런히 선을 행할 뿐이다.

▲ 김재욱 칼럼니스트
▷저서 <군웅할거 대한민국 삼국지>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왜곡된 기억> 외 6권

길게 늘어선 차량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일일이 ‘앞에 사고가 났으니 유턴하세요.’라고 하면서 구급차의 진로를 확보하려고 애를 썼던 가진이한테 ‘수고했다’는 칭찬을 하면서 동시에 ‘너 지각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이처럼 나는 혹시 생길 지도 모를 불이익까지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손숙오인데 아빠는 손숙오의 어머니가 아니었던 셈이다.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이런 것까지 생각해야 하는 현실에 속이 상하기도 하다.

“화(禍)와 복(福)의 이치에 대하여는 옛날 사람들도 의심해 온 지 오래되었다. 충(忠)과 효(孝)를 행한 사람이라 하여 반드시 화를 면하는 것도 아니고, 음란하고 방탕한 자라 하여 반드시 박복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선(善)을 행하는 것이 복을 받는 도(道)가 되므로 군자(君子)는 부지런히 선을 할 뿐이다.” <정약용(丁若鏞),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18권, 「가계(家戒)」 >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정약용다운 말이다. 자신처럼 충효를 행한 사람도 화를 면하지 못했으니 이런 말을 할 법하다. 정약용처럼 어렵게 살았던 사람도 ‘그래도 선을 행해야 한다.’고 하는 걸 보면서 위안을 얻으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살면서 복을 받을지 화를 입을지 알 수 없지만, 선행을 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 믿고 사는 게 낫지 않겠나. 그래도 선행을 하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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