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 칼럼에서 조선을 구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가 조정과 대립하는 모순된 모습을 소개했다. 이 과정에서 곽재우는 의병장으로서의 전공(戰功)과 그의 강직한 성격을 인정 받아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관직을 제수 받았다. 조정에 가서도 곽재우는 자신의 소신을 주장했고, 이로 인해 관직을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또한 소신을 주장해서 귀양을 가거나, 조정의 부름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조정의 중신들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이 탄핵 과정에서 놀라운 이야기가 등장한다.

곽재우(郭再祐)는 행실이 괴이하여 벽곡(辟穀) 하고 밥을 먹지 않으면서 도인(導引)·토납(吐納)의 방술(方術)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전하의 덕이 밝은 세상에 어찌 감히 오활하고 괴이한 일을 자행하여 명교(名敎-성리학을 말함)의 죄인이 되는 것을 달게 여긴단 말입니까.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아 인심을 바로잡으소서.1)

위의 인용문은 사헌부에서 올린 곽재우를 탄핵하는 내용의 상소문이다. 여기에 벽곡, 도인, 토납, 방술 등 무협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나 알만한 단어들이 등장한다. 용어를 설명하면, 벽곡은 곡식을 안 먹고 솔잎, 대추, 밤 등만 날로 조금씩 먹는 것을 말하고, 도인은 호흡과 바른 자세로 앉기, 마찰 등으로 아픈 곳을 치료하는 것을 말하며, 토납은 몸 안의 묵은 기운을 빼내고 새로운 기운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도교의 방술, 즉 도술로 평가받고 있다. 한 마디로 사헌부는 곽재우가 성리학의 이단인 도교에 심취해 있기 때문에 파직을 건의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선조는 “포용하여 그대로 두어야지 죄를 줄 필요가 없다.”고 전교하였고, 여기에 반발하여 사헌부는 이틀 뒤에 비슷한 내용으로 다시 곽재우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사건은 “곽재우가 정말 도술을 익혔을까?”라는 의문을 갖게끔 만든다. 곽재우는 유학자의 가문이자 충(忠)의 심정으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아닌가! 이 의문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큰 이의를 달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곽재우는 어릴 때부터 도가적 교양을 배우고 불교와 도교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임진왜란의 와중에 각종 도술을 체득했고, 만년에 양생술, 즉 도교의 도술을 통해 몸을 건강하게 만들고, 신선의 경지에 오르게 만든다는 술법에 전념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곽재우가 만년에 썼던 시들 속에서 도술을 익혔을 것으로 예상되는 기록들이 많이 등장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수련했던 양생술 가운데 방중술, 즉 성관계를 통한 수련을 제외하고 골고루 수련했다는 것이다.2)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모습이 곽재우의 의병 활동과도 관련된다는 점이다. 구전설화 등 곽재우에 관한 각종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곽재우가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에게 같은 복장을 입히고 백마를 태웠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작전은 적진에 혼란을 일으킨 동시에 곽재우가 둔갑술을 쓰는 소위 “도사급”의 장수라는 소문을 돌게 만들었다. 이것은 곽재우가 입었던 붉은 옷과 타고 다녔던 백마와 함께 곽재우의 카리스마를 더욱 불러일으키고, 왜군으로 하여금 곽재우의 의병 부대를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곽재우가 도술을 익혔다는 것이 사실은 “왜 도술을 익혔을까?”라는 질문과 “곽재우가 유학자가 아닌 도교 술사였을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곽재우가 도술을 익혔던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그의 가풍과 관련된다는 것이 학계의 주된 의견이다. 이전 칼럼에서 소개했듯이 곽재우는 남명 조식(曺植, 1501~1571)의 외손주사위였다. 성리학 학맥을 고려하면 그는 남명 조식의 학풍을 이었다. 남명 조식이 다른 성리학자들에 비하여 이단의 학(學)에 대하여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그가 남명 조식과 인척 관계였다는 것은 그의 모습에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565년(13세)부터 숙부 곽규(郭赳)에게서 『춘추(春秋)』를 배우면서 학문을 닦기 시작했고, 이듬해부터는 성여신(成汝信) 등과 함께 제자백가의 책을 널리 읽었다. 그가 나중에 도교와 깊은 친연성을 갖게 된 것은 이런 배경이 작용했다고 판단된다.3)

곽재우가 도교의 술법과 수련법을 배우고 익혔지만, 곽재우가 유학자로서의 면모를 포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곽재우의 정신세계는 『춘추』에 입각한 절의(節義), 즉 절개와 의리와 같은 성리학적 사상에 연원을 두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남명 조식 역시 절의를 가장 강조했다. 곽재우는 의병을 일으켰고, 낙향해서 도술을 수련하는 와중에도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永昌大君)에게 사형을 내리는 문제와 같이 큰 사건이 있을 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거침없이 표현했다. 이러한 점은 곽재우가 절의라는 성리학적 사고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을 보여준다. 곽재우가 도교의 술법을 익힌 것은 도교에 심취한 것이 아니라 여러 학문을 두루 익힌 결과이거나 당쟁으로 혼란했던 조정에 절의를 몸으로 모여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4)

우리가 위대한 의병장이자 홍의장군으로 알고 있는 곽재우. 그것이 곽재우의 모든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의 절의를 중요하게 여긴 유학자의 모습, 그러면서도 다른 학문에 대하여 유연한 자세를 가지고, 실제로 도술을 익힌 종교인의 모습도 흥미롭다.


1)  『선조실록』 211권, 선조 40년(1607) 5월 4일 병인 2번째 기사.

2)  양은용, 「망우당 곽재우의 의생사상」, 『도교문화연구』5, 한국도교문화학회, 1991, 235-236쪽.

3)  김범, 장선환, 「곽재우 [郭再祐] - 임진왜란의 대표적 의병장, 홍의장군」, 『인물한국사』.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4777&cid=59015&categoryId=59015

4)  최석기, 「망우당 곽재우의 절의정신」, 『남명학연구』6,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1996, 141-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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