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는 세상일에 대해서 무조건 이것만 옳고, 저것은 그르다고 여기지 않고, 의로움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논어(論語)』 「이인(里仁)」>

두 가지 생각밖에 못해

딸아이 가진이는 논술전형을 통해 대학에 들어갔다. 날더러 ‘당신이 글을 쓰니까 직접 가르치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논술 문제나 서술 방식을 보니 나처럼 자유롭게 쓰면 안 되고, 그 방면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이 가르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원에서 가르치는 대로 잘 따라가라고 말해 주었다. 가끔 논술 답안지를 보면서 틀린 문장을 수정해 주는 선에서 그쳤으며, 학원에서 모두 다 챙기기 어려운 면을 살피려고 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럴 텐데, 가진이 역시 시험결과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고, 그러다보니 자신감이 좀 떨어져 있었다. 어느 날 마음을 먹고 가진이와 이야기를 했다.

“가진아, 너 며칠 전 아빠한테 ‘글 쓸 때 여러 각도로 생각을 못하는 게 문제’라고 했지?”

“응. 문제를 보면 옳고 그름 두 가지 밖에 생각을 못 하겠어. 여러 가지를 원하는 학교도 있는데….”

“괜찮아. 글은 우선 말이 되도록 써야 돼.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갖고 있어도 틀린 문장을 쓰고, 서술이 중구난방이면 소용없잖아. 다행히 너는 기본은 갖추고 있으니까 큰 걱정 안 한다. 그리고 지금 네가 네 문제를 알고 있잖아. 아빠는 그게 그렇게 큰 문제라고 보진 않지만, 네가 알고 있으니 고치려고 하면 된다고 봐.”

“응.”

“남들이 요구하는 답을 쓰는 법을 익히는 것도 좋은데, 그게 잘 안 된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야.”

“응. 알겠어.”

여기까지 말을 하고는 가진이가 등굣길에서 교통사고를 목격한 뒤, 사고 현장에 구급차가 빨리 진입할 수 있도록 교통정리를 했던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래도 선행을 하는 게 낫다」 참고 바람) 내가 말했다.

“어제 네가 교통정리 하고 있을 때, 그냥 지나간 아이들도 있었지?”

“응.”

“왜 그냥 갔을까? 지각할까봐? 사고 난 줄 몰라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왜 그런 거 같아?”

“사고 난 줄 몰랐을 수도 있고, 사고 난 걸 알고도 ‘그냥 별 거 아니겠지’ 생각하고 갔을 수도 있겠지.”

“그래. 그럼 너 혹시 사고 난 줄 알면서도 그냥 간 아이들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냐?”

“나쁘게는 안 보지. 근데 조금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은 했어.”

“네 생각이 옳아. 그래서 너는 그 자리에 있었던 거지. 그러니까 너는 네 가치관에 따라서 행동을 한 거야. 너는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으니까, 도로가 막힌다고 투덜거리는 학부모들이 싫었던 거고, 그냥 지나가 버린 학생들한테는 섭섭한 마음이 들었던 거 아닌가?”

“그래. 맞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고, 아빠는 전적으로 네가 옳다고 생각해. 다만 여기에서 그냥 지나간 친구들의 상황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을 거 같아. 걔들이 다친 아이를 직접 봤을 경우에 너처럼 돕거나, 아니면 무서워서 그 자리를 뜨거나, 그것도 아니면 자기하고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가 버렸을 수도 있겠지?”

“그렇겠지.”

“상관없다고 생각한 경우는 말할 가치도 없는데, 문제는 무서워서 그 자리를 뜬 학생들이라고 봐. 아빠가 보기에 네가 섭섭한 마음이 들 수는 있겠지만, 걔들을 탓할 수는 없다고 봐.”

“탓하지는 않는데? 당연히 그러면 안 되지. 무서워 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렇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일을 보고도 지나갈 수 있냐’고 하면서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무서워서 자리를 뜬 사람을 똑같이 취급하잖아.”

“맞아.”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세상엔 분명 옳은 일이 있고, 그른 일이 있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늘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을 해야 하거나, 선택을 강요받기도 한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내용을 따져 보면 이 두 가지로 쉽게 재단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가진이의 일처럼 비교적 시비가 명확히 드러나는 경우를 두고서도 ‘그냥 지나가 버린 건 잘못이야.’고 일축할 수 없는데, 그렇지 않은 일에 있어서야 말할 나위가 없다.

이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이 생각에서 그치면 그만인데, 자신의 의견이나 가치관을 상대도 따르라고 강요하면서 갈등이 일어난다. 크게는 사상의 검증에서 작게는 일상의 일에 이르기까지 자신만 독야청청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일이라도 ‘이게 옳으니까 이렇게 해’, ‘이걸 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나쁜 놈이야’, ‘왜 이걸 안 해?’라고 소리치는 순간부터 일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나와 상관없다고 자리를 뜬 사람과 무서워서 자리를 뜬 사람 모두를 나쁜 사람으로 취급하는데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볼만한 옛 사람의 말이 있다.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세상일에 대해서 무조건 이것만 옳고, 저것은 그르다고 여기지 않고, 의로움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논어(論語)』 「이인(里仁)」>

말 그대로다.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며, 되도록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위에서 말한 의로움을 두고 이 역시 결국은 자기 생각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대체로 세상 사람들이 무리 없이 수긍할 만큼의 의로움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 한다. 다만 이 조차도 남에게 강요해선 안 될 것이다. 『논어(論語)』에 이런 말이 나온다.

“공자는 네 가지를 완전히 끊어버렸다. 공자에게는 사사로운 생각, 반드시 이러해야 한다는 생각, 하나를 고집하는 마음, 이기적인 마음이 없었다.”<『논어(論語)』 「자한(子罕)」>

이런 글을 가져다 쓰고 있으면서도 공자가 정말 저런 사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넓으니 저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을 수도 있겠다. 매사 저렇게 살기는 어렵고, 가끔 한두 번쯤 떠올려 보는 것 정도까지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위의 네 가지 중에서 ‘반드시 이러해야 한다는 생각’에 주목했다. 물론 때에 따라 ‘반드시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행해야 할 일이 있겠는데 역시 여기에 지나치게 집작하다가 일을 망치는 결과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다. 이와 같은 파국을 불러들이지 않는 현실적이면서도 쉬운 방법이 있다.

“묻기를 좋아하면 넉넉해지고, 내 생각대로만 하면 작아진다.”<『서경(書經)』 「중훼지고(仲虺之誥)」>

내 소신은 나만의 것일 수도 있다

가진이한테 이렇게 말했다.

▲ 김재욱 칼럼니스트
▲ 김재욱 칼럼니스트
▷저서 <군웅할거 대한민국 삼국지>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왜곡된 기억> 외 6권

“그러니까 너는 어떤 일을 이분법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아. 그 생각을 표현하지 못했을 뿐이지. 봐봐. 너는 무서워서 자리를 피한 사람을 이해했잖아. 너는 ‘봤으면 지나칠 수 없고, 그게 옳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자리를 피한 사람이 틀렸고, 나쁘다고 보지 않았잖아?”

“그러네?”

“너는 이미 두 가지 이상의 생각을 했고, 네 생각만 옳다고 고집하지 않잖아. 그러니까 굳이 너 스스로 두 가지 밖에 생각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 그저 쓰는 연습을 덜했을 뿐이라고 봐. 네 생각에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아.”

“응.”

어떤 때는 남들이 뭐라고 해도 내 고집을 세워야 할 때가 있고, 소리 높여 옳다고 외쳐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세상일에 칼로 무 베듯 시비가 명확히 갈리는 건 생각보다 많지 않다. 공자가 그랬던 것처럼 늘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겠다. 내 소신은 나만의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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