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모름지기 원대하고 고요한 기상이 있어야 많은 도리(道理)를 실을 수 있다. 조급하고 가벼운 사람은 비록 한때 생각이 있더라도 쉽게 소진되어 일을 맡을 수가 없다.”<이상정(李象靖, 1711-1781)>

너는 이번에 될 거니까 걱정마라

1학년 때부터 알고 지내던 학생이 4학년이 되어 우연히 내 강의를 듣게 됐다. 군대에 갔다 오고, 중간에 휴학도 해서 어느덧 20대 후반이 되어있었다. 이 학생에 대해 다 알지는 못하지만, 무척 차분한 성정과 성실한 태도를 지닌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취업이 되지 않아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다. 팔이 안으로 굽어서 그런 것일 텐데, 나는 이 학생이 뭐가 되어도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차분하고 성실한 친구가 안 되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이래서 가끔 나한테 힘들다고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잘 될 거니까 마음 편하게 준비하라고 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잠시 마주 앉았다.

선생님, 말씀대로 마음 비우고 준비를 하는데요. 두어 군데 최종까지 올라가니까 욕심이 생겨요. 더 좋은 데 가고 싶기도 하고. 그런데 같이 준비하는 친구들한테 미안해서 그런 말을 못 하겠어요. 살짝 던져봤는데 눈을 낮추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겠지. 자기네들은 올라가지 못했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겠네.”

제가 초심을 잃고 들뜨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막상 최종까지 가니까 욕심이 생기네요.”

하하. 우리가 수행하는 사람도 아닌데 뭘 그런 거 갖고 자책을 하냐. 더 좋은 데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맙긴. 나 같아도 욕심이 날 거 같으니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뭐. 너 지금은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으니깐 초조하지?”

. 조금.”

나중에 어디에 합격을 하면 어깨에 힘도 주고, 후배들한테 큰소리도 좀 치고 그래. 한 번 그러는 건 괜찮아.”

하하, 마음이 편해지네요.”

내가 너였다면 지금 엄청 떨고 있을 거야. 남의 일이니깐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고 있네. 하하. 잘은 모르겠지만, 무슨 일을 앞두고 생각을 많이 하면 정작 그 일을 할 때 힘이 빠져서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더라. 그러지만 않으면 될 것 같네. 너는 차분하니까 다 잘 될 거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내 보기에 지금 너한테 필요한 건 눈을 낮추는 게 아닌 거 같아. 쉽지 않겠지만, 두어 군데 올라갔다는 생각을 버리고 한 곳 한 곳 집중해야 할 거 같다. 욕심은 된 다음에 부릴 수 있잖아. 그리고 네가 합격하면 다른 사람들은 떨어지는 거잖아?”

. 그렇죠.”

그 친구들한테 어떤 맘이 들 거 같아?”

미안하죠.”

그게 큰 장점이야. 진 사람한테 미안해하는 그 마음이. 차분하니까 네가 힘든 상태인데도 남까지 보잖아. 너는 이번에 될 거니까 걱정마라. 네가 되고 나서 고생했을 때를 잊고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초심을 잃는 일이 아닐까 싶어.”

선생님은 저를 너무 잘 봐 주시는 거 같아요. 하하.”

잘 보는 게 어디 있냐. 나보다 나으니 낫다고 하는 거지. 나중에 합격하면 밥이나 사라.”

차분해야 성취한다

말은 저렇게 해 놨지만 속으론 불안했다. 그저 조금이라도 힘을 얻어서 잘 해 주기를 바랐다. 이 친구 말고도 세상엔 차분한 사람이 많겠지만, 그래도 차분하니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들뜨는 것 보다는 차분한 게 낫다. 아무래도 실수가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옛 사람들도 대부분 차분하려고 했고, 차분해야 한다고 했다.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으로 널리 알려진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넷째 아들이자 대사헌대제학 등 주요관직을 역임한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 1582-1650)은 이런 말을 남겼다.

안정된 사람은 조급하고 경솔한 마음을 제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에 이루는 것이 있다. 허황하고 실제가 없는 사람은 분쟁만을 일삼는다. 그러므로 끝내는 실효가 없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청정함을 유지하며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을 싫어하여 사람에게 일을 맡길 때 안정된 사람을 버리고 허황된 사람을 취하고는, 끝내 나라를 잘못되게 하고 일을 그르치는 자가 앞뒤에 서로 이어져도 뉘우칠 줄 모른다. 오늘날에도 이런 부류가 많다.<『대동야승(大東野乘)』 「기옹만필(畸翁漫筆)」>

차분한 사람이라고 모든 일을 다 성취하는 건 아니다. 이래서 이루는 것이 있다고 한 것이겠는데, 바꿔 말하면 그 반대의 사람은 이루는 게 없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차분한 사람보다는 외향적이고 말을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 중에도 차분한 성정을 지닌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확률 상 많지는 않을 것으로 짐작한다. 정홍명은 차분하지 못한 사람은 작은 일을 그르칠 뿐 아니라 나라까지 망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만큼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좋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한편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많은 저서를 남긴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 1803-1877)는 이렇게 말했다.

총명하고 통달한 사람은 지나치게 살피는 일을 경계해야 하고, 견문이 넓지 못하고 적은 사람은 막히는 것을 경계해야 하며, 용감하고 강한 사람은 지나친 난폭함을 경계해야 하고, 어질고 따뜻한 사람은 결단력이 없는 것을 경계해야 하고, 고요하고 편안한 사람은 시기를 잃어버리는 일을 경계해야 하고, 마음이 넓고 도량이 큰 사람은 깜빡 잊어버리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최한기(崔漢綺), 『기측체의(氣測體義)』 「추측록(推測錄)」 권3 ‘양성(陽性)’>

좋은 성정을 지니고 있어도 거기에 지나치게 갇혀 있으면 이와 같은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으니 조절을 잘해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 한다. 이런 말까지 염두에 두고 있어야 비로소 생각의 균형이 잡힐 듯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찰을 하기 위해서는 역시 차분한 마음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너의 실력과 인품 덕이지

며칠 뒤에 이 친구하고 또 마주 앉았다.

오늘 한 군데 발표 나는데, 일찍 난다고 하더니 소식이 없네요.”

초조하지?”

.”

어휴. 그 맘 알거 같아. 나는 먹고 사는 게 걸린 거도 아닌 대학원 시험 볼 때도 초조했는데, 너는 오죽하겠냐.”

마음 편히 먹으려고 하는데 잘 안 되네요.”

안 되는 게 정상인데 뭘. 하하. 네가 잘 난 걸 너만 모르고 있네? 될 거니까 걱정 말고 기다려 보자. 좀 있다 발표나면 문자 보내줘.”

.”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문자 메시지가 왔다.

선생님 조언 덕분에 최종 합격했어요. 고맙습니다. 수업시간에 뵐게요.”

거 봐. 될 거라고 했잖아. 나는 조언한 적 없어요. 네 실력과 인품 덕으로 된 거야. 이제 기말고사 준비해야지 응? 하하. 축하드려요.”

? 크크. 알겠습니다.”

▲ 김재욱 칼럼니스트
▷저서 <군웅할거 대한민국 삼국지>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왜곡된 기억> 외 6권

정작 이런 말을 해 준 나는 차분한가? 그렇지 못하다. 무슨 일만 닥치면 잡생각을 더 하고, 결과를 앞두고 지나치게 초조해한다. 그러다가 일을 그르친 적이 많아서 이 친구는 그러지 않기를 바랐고, 옛 사람의 글을 읽으면서 노력이라도 하려고 할 뿐이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급한 것 보다는 차분한 게 낫다. 조선 후기, 영남에 살면서 퇴계 이황의 정통 학맥을 이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짧지만 강력한 한 마디를 읽어 본다

“사람은 모름지기 원대하고 고요한 기상이 있어야 많은 도리(道理)를 실을 수 있다. 조급하고 가벼운 사람은 비록 한때 생각이 있더라도 쉽게 소진되어 일을 맡을 수가 없다.”<이상정(李象靖), 『대산집(大山集)』 권38 「잡저(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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