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끌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비록 미덕이 있더라도 이를 드러낼 수 없고, 뒤에서 밀어주지 않는다면 비록 성대한 업적이 있더라도 전해지지 않으니 이 두 부류의 사람은 서로 의존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한유(韓愈, 768-824>

자수성가(自手成家)의 오만함

남의 도움 없이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으로 재산을 모으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자수성가(自手成家)’라고 한다. 세상엔 이처럼 학연이나 지연을 따지는 세상 분위기 속에서 그런 것 없이 자수성가를 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학비가 없어서 밤에 일을 해 가며 공부를 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 자본이 부족하여 막일부터 시작을 해서 조금씩 돈을 모아 창업을 하고, 끝내는 큰 기업을 이룬 사람, 앞뒤에서 도와주는 사람 없이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성공한 사람이 바로 자수성가의 주인공이다. 이들의 고생담을 듣고 있으면 저절로 존경심이 일어나며, 현재의 게으른 나를 반성하면서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친 것과 미치지 못하는 것은 같다)이라고 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나처럼 노력하면 세상에 이루지 못할 것은 없다’고 하면서 노력을 강조하고, 자신의 경험이 세상살이의 전부인 것처럼 포장한다. 결과적으로 성공을 했으니 그 노력과 경험은 아직 성공하지 못한 사람에게 좋은 참고가 되기는 하나, 사람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고 각자 지니고 있는 기량이나 사고방식도 다르므로 자신의 생각을 지나치게 드러내서는 안 되고,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일을 판단해선 더더욱 안 되겠다. 지나치게 자신의 성공을 강조하는 사람은 실패의 원인을 모조리 노력의 부족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참으로 단순하고 독단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르긴 모르되 그 사람이 성공을 하게 된 바탕에는 우선 초인적인 노력이 있었겠지만, 그 노력과 그에 따르는 성실함을 믿어준 주변 사람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주변에서 돕지 않았더라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까이로는 부모, 배우자, 자식, 친구가 있고, 멀리로는 선생, 선배, 후배가 있다. 과연 이들이 음양으로 돕지 않았더라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 되도록 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고 혼자서 해결하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인정할 만 하지만,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남의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은근히 얕잡아 봐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조차 성공하기 위한 노력이고 방법이다. 물론 ‘과유불급’은 이 경우에도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중국 당(唐)나라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한유(韓愈, 768-824)는 이렇게 말했다.

“벼슬이 없는 선비는 삶이 곤궁하므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권세를 빌리지 않으면 뜻을 이룰 수 없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업적을 드러내려면 벼슬 없는 선비의 칭송을 빌리지 않고서는 명성을 널리 알릴 수 없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벼슬이 없는 선비는 비록 매우 천하더라도 아첨하지 않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비록 매우 귀하더라도 교만하지 않으니, 그 일의 형세가 서로 의존하고 일의 앞뒤가 서로 도와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 「여봉상형상서서(與鳳翔邢尙書書)」>

이 글은 한유가 봉상(鳳翔)이라는 지역을 유람하다가 이 곳의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던 형군아(邢君牙)라는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편지다. 쉽게 말해 자신을 좀 알아주십사 하는 글인데 어찌 보면 조금 궁한 것 같지만, 가만히 보면 크게 틀린 말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능력의 유무, 지위의 고하에 불구하고 도움이 없으면 일을 성취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 걸어온 길을 전부 알 수는 없지만, 이런 글에 비추어 보면 나는 자수성가했다고 단언해선 안 되고, 오늘이 있기까지 자신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준 사람 덕분에 이렇게 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큰소리를 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성공과 겸양의 덕을 바꿨다고 할 수 있겠다.

아버지의 눈물

언젠가 고향인 경북 봉화에 내려갔을 때 일이다. 봉화 옆의 큰 도시인 영주에 가려고 버스를 탔다. 시골이라 버스 안에는 승객이 많지 않았다. 백발에 몸집이 작고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 여중생 둘, , 이렇게 네 명이 전부였다. 영주에 도착해서 내리려고 하다가 할머니를 보니 큰 보자기 두 개를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계셨다. 하필 내 양손에도 짐이 있어서 도울 생각을 못하고 있는데, 여중생 한 명이 나섰다.

할매, 제가 이거 들어 드릴게요.”

아이고, 학생, 고맙데이.”

별 거 아닌 풍경인데 이상하게 흐뭇하기도 하고, 동시에 부끄럽기도 했다. 아버지한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네 이야기 들으니 우리 할매 장사 지낼 때가 생각난다.”

우리 할매? 증조할머니?”

그래.”

장사 지낼 때 다들 서로 돕고 그러지 않았나요? 옛날에는?”

우리 집이 가난했잖아. 할매가 돌아가셨는데 묘를 쓸 곳이 없는 거야. 아부지가 걱정을 많이 했어.”

증조 할매 묘소? 아부지 고향집 뒤에 있잖아요?”

거기가 원래 밭이었어.”

, 그렇구나. 왠지 묘소가 집 가까운 데 있다 했어요.”

하여튼 그 때 장사를 지내야 되는데, 우리 집이 가난해서 사람들 대접을 못했어. 일꾼하고 구경꾼한테 밥을 줘야 되는데, 밥이 없어서 일꾼들 줄 밥 열 그릇만 딱 마련을 해 놓은 거야.”

아이고.”

아부지가 나한테 열 명 일꾼 이름을 적어 주면서 어디어디 누구한테 가서 밥 먹으러 오라고 해라고 심부름을 시켰어.”

.”

그런데 열 집 전부 다 들렀는데, 미리 밥을 다 먹었더라. 우리 집 없이 사는 거 알고, 미리 밥을 다 먹은 거야.”

.”

내가 가셔서 밥 잡수소하니까 웃으면서 나는 하마 밥 다 먹었다. 가서 내 밥은 됐다고 말씀드려라하는 거야.”

.”

증조할머니 돌아가신 건 아버지가 십대였을 때니까 60년도 넘은 이야기인데 마치 어제 일처럼 이야기를 하셨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나는 멀거니 앉아 있고, 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셨다.

밥 열 그릇의 은혜

아버지는 1944년 생이다. 이 시기에 태어난 어른들은 대부분 많은 고초를 겪으며 살았고, 자수성가한 분들이 많다. 아버지도 이 유형에 속하는 사람이라서 여느 어른들처럼 자신의 고생담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자신의 경험을 중시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금껏 나한테 나는 자수성가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살면서 여러분의 도움을 받으셨기에 그 분들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유의 글을 읽어보겠다.

▲ 김재욱 칼럼니스트
▷저서 <군웅할거 대한민국 삼국지>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왜곡된 기억> 외 6권

선비로서 당대에 큰 명성을 누리며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 중에는 세상의 명성을 지닌 선배들이 그를 위해 앞에서 끌어주지 않은 경우가 없고, 선비로서 미덕이나 업적을 전하여 후세를 밝게 비추는 사람들 역시 세상의 명망을 지닌 후배들이 그를 위해 뒤에서 밀어주지 않은 경우가 없습니다. 앞에서 끌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비록 미덕이 있더라도 이를 드러낼 수 없고, 뒤에서 밀어주지 않는다면 비록 성대한 업적이 있더라도 전해지지 않으니 이 두 부류의 사람은 서로 의존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 「여우양양서(與于襄陽書)」>

거창해 보이지만, 나의 일상에 적용할만한 글이라고 하겠다. 이를 인맥이 전부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무슨 일이든 성취하기 위해서는 내 노력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주변에 돕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읽는다. 아버지가 세상에서 자신의 역할을 했던 것, 그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나 글을 쓰고 밥을 먹는 것, 이 바탕에는 그 때 아버지께 나는 하마 밥 다 먹었다. 가서 내 밥은 됐다고 말씀드려라고 하시며 웃음 지었던 이름 모를 어른들의 밥 열 그릇의 은혜가 있다고 믿는다.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일을 가르쳐 주신 그 어른들께 감사드리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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