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학연구원에서 개발한 음이온 교환형 바인더(왼쪽)와 분리 <사진 제공 = 한국화학연구원><br>
한국화학연구원에서 개발한 음이온 교환형 바인더(왼쪽)와 분리 <사진 제공 = 한국화학연구원>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일본의 경제보복 사태 이후 기업들은 연일 앓는 소리를 하고 있다.

정부는 수출 규제 대안으로 환경·산업안전보건에 관한 인허가 기간 단축 등을 제시했다.

그러나 기업들은 소재·부품 국산화 필요성이 커졌고 이에 따라 소재·부품 산업 육성을 위해서는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이하 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이하 화관법) 등 환경 규제를 대폭 완화돼야 한다고 성토한다.

그러나 시민단체에서는 외교 갈등으로 발생한 문제는 해결 또한 외교적 방법으로 풀어내야지 엉뚱하게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 개념인 환경 규제를 완화해달라는 것은 얼토당토않는 요구라며 적극 반발하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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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법·화관법이 뭐길래

화평법과 화관법은 ‘2011년 가습기살균제 참사’, ‘2012년 구미 불산가스 누출사고’ 등을 계기로 국민안전과 화학사고 예방을 목적으로 각각 제정·개정됐다.

화평법은 각종 제품에 활용되는 화학물질을 더욱 엄격하게 관리하자는 취지로 2015년부터 시행됐으며 올해 1월 개정을 통해 한층 강화됐다.

화학물질의 용도 및 양 등을 매년 환경부장관에게 보고해야 하며, 국내 사업장에서 연간 1t 이상 제조하거나 수입하는 화학 물질은 정부에 등록을 해야 한다. 등록 시 제조·수입 물질의 용도나 특성, 유해성 등에 관한 자료를 제출하도록 규정돼 있다.

만약 제출한 화학물질이 위해물질로 판정될 경우 사용이 불가하며 대체물질을 활용해야 한다.

1990년 제정된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을 전면 개정해 2015년부터 시행된 화관법은 화학물질의 체계적인 관리와 유해화학물질의 취급 기준을 강화하자는 취지로 국내에서 제조됐거나 수입한 모든 화학제품의 성분과 함유량을 정부에 의무적으로 제출토록 하고 있다.

유독물질, 허가제한 금지물질, 사고대비물질 등을 유해화학물질로 규정해 안전관리 강화, 사고대비물질 관리 강화, 화학사고 대비 대응 등이 골자다. 만약 인체에 유해한 화학물질 유출 사고를 낼 경우 해당 사업장 매출의 최대 5%에 달하는 과징금이 부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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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화해도 모자란데 강화라니

그동안 기업들은 화평법·화관법을 기업 경영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대표적인 규정으로 꼽아왔다.

화평법은 유럽연합(EU)의 화학물질 등록 평가제도(RECAH)를 모델로 삼았는데, 규제 강도는 훨씬 높은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개정 이전에는 등록해야할 물질이 500여개였지만 7000여개로 14배나 급증했다.

화학물질 유해성 입증 책임 입증을 위한 절차에 투자되는 비용도 기업별로 1개 물질 등록에 최소 200만원에서 최대 1억2100만원(평균 1200만원)으로 규모가 크지 않은 중소기업이나 중견기업에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화학물질을 많이 소비하는 기업에게는 제품에 활용되는 성분이 최고 기밀로 여겨지는데 화관법에 따라 화학제품의 성분과 함유량을 정부에 공개해야하니 부담스럽다는 지적이다.

또 내년부터는 화관법 시행 이전에 지어진 공장에 대한 저압가스 배관검사 의무화 등 안전기준이 강화됐는데, 공장 가동을 멈춰야만 가능해 기업들의 불만은 커져만 가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지난 22일 정부에 화학물질 규제 개선 건의안을 제출했다.

건의안에는 △연구개발 저해 규제 개선 △선진국 대비 과도한 규제 완화 △중복 유사제도 통합 △불투명·불합리 기준 개선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경총은 “그동안 우리나라 화학물질 규제 법률은 선진국보다 과도하게 지속적으로 강화돼 왔다”며 “이는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제한이 됐으며, 특히 지난 2일 일본 수출 규제가 확정되면서 양국 간의 무역 거래에 큰 차질이 예상되는 가운데 이로 인한 어려움이 한층 더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혔다.

이 단체는 “일본 수출규제를 계기로 확인된 우리나라 소재·부품 산업의 구조적 취약성을 개선해야 하는 시기로 기업 경쟁력의 고도화 및 선진화를 위한 제반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며 “연구친화적 환경 조성을 위한 규제 개선이 필요하다” 강조했다.

지난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화관법·화평법 규제 완화 반대 기자회견 ⓒ뉴시스
지난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화관법·화평법 규제 완화 반대 기자회견 ⓒ뉴시스

최소한의 안전장치일 뿐

그러나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오히려 제2의 가습기살균제 참사·구미 불산 누출사고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을 예로, 아직까지 정확한 피해 정도도 제대로 파악되고 있지 않은 데다가 피해 보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등 화학물질과 화학제품으로 인한 사회적 참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화평법·화관법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는 게 이들의 목소리다.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이하 가습기넷), 발암물질없는사회만들기국민행동 등은 “최근 이슈되는 일본의 수출규제가 국내 화학물질 과잉규제 및 관련법 개정 논란으로까지 번지고 있는데 이는 법률의 원칙을 흔들어 소비자와 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규탄했다.

가습기넷 등은 “우리는 생활화학제품 생산·판매 과정에서 국민이 생명을 잃는 유래적인 참사를 겪었다. 이는 기업의 안일한 화학물질 관리가 원인이었다”며 “그럼에도 책임을 져야 하는 기업은 오히려 규제를 완화해 화학물질 정보 생산의 책임을 피하려고 한다. 일본의 수출 규제를 뒤에 엎고 사용자로서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무시한 채 이익을 챙기려는 고도화된 전략으로 밖에 판단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수출규제 사태는 정치·외교적 문제가 계기가 됐기 때문에 그 해결도 외교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점은 자명하다”며 “환경 규제 완화를 근본적 대안으로 택하는 것은 잘못된 진단을 토대로 엉뚱한 처방전을 휘둘러대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이들 단체는 기업의 역량을 높이고 제도를 보완해줄 수 있는 정부의 지원과 관리 책임을 명확히 하는 체계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가습기넷 등은 “화학물질 관리의 책임은 명확히 기업에게 있고 정부의 역할은 이를 효과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화학물질 등록과 평가 제체가 어렵다는 기업의 불만은 규제완화가 아닌 산업활동 기반과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직접적인 지원 제도 보완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전했다.

또 “화학물질 관리 기본을 중심으로 관리 일원화를 통해 관리의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화평법의 위상을 화학물질 관리의 기본법으로 상향시키는 논의가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와대 김상조 정책실장 ⓒ뉴시스
청와대 김상조 정책실장 ⓒ뉴시스

한치의 양보도 없는 양측의 갈등이 지속되는 가운데 정부와 국회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기업들의 입장이 이해되는 한편 그동안 화학물질로 인한 사고가 여러 차례 발생했고, 규제완화로 인해 또다시 이 같은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기업들을 의식한듯 지난 5일 화관법·화평법 시행 규정을 수출규제 대응물질 취급시설 인허가 및 기존 사업장 영업허가 변경 신청을 단축하는 내용으로 변경하는 ‘소재·부품·장비산업 경쟁력 강화 대책’을 내놨다.

그러면서도 다음날 국회 운영위원회에 참석한 청와대 김상조 정책실장은 “국민 생명·안전에 관한 현행법의 골간을 유지하되, 필요시 한시적으로 규제를 완화한다는 것일 뿐 생명·안전 관련 기존법의 근간을 흔드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어느 한쪽도 확실하게 만족시키지 못한 정부의 입장으로 기업들도, 시민단체도 모두 불만족스러운 가운데 화관법·화평법이 한층 더 강화될지, 한발 물러서 약화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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