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앞서서 허균이 몇 차례에 걸쳐 탄핵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가 불교를 신봉한다는 이유였다고 밝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다음과 같다.

삼척 부사(三陟府使) 허균(許筠)은 유학 집안의 아들로 그 아비와 아들이 종사하던 것과는 반대로 불교를 숭상하고 믿어서, 불경을 외며 평소에도 승려들이 입는 옷을 입고 부처에게 절을 하였고, 수령이 되었을 때에도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재(齎)를 열어 반승(飯僧)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할 줄을 몰랐으며, -(중략)-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아 사습(士習)을 바로 잡으소서.1)

허균은 실제로 불자(佛子)였을까? 이전에 언급했고, 위의 예문에도 등장하듯이 허균의 사상적 기반은 성리학이었다. 실제 그의 저술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의 학론에서 “도(道)를 밝혀서 뒤에 올 학문을 열어주어 천하 후세로 하여금 우리 학문은 높일 만하고, 도맥(道脈)이 자기를 힘입어 끊어지지 않았음을 환하게 알리는 것”을 “유자(儒者-유학자)”의 도리라고 언급한 것2)에서도 그러한 모습이 드러난다.

또한 허균은 당대 대표적인 화가였던 나옹(懶翁) 이정을 전송하면서 쓴 글에서 “불서의 성(性)을 논하고 심(心)을 논한 것은 비록 이치에 가깝다고 하지만 진실로 우리 유교와는 번번이 상반되는 것이고 그 미혹된 견해와 내실없는 설(說)은 가지가지 천리(天理)에 위배되었다.”3)고 밝혔다. 불교의 교리가 “우리” 유교와 상반되는 내용으로 불교의 견해를 미혹된 것으로, 불교의 여러 주장을 공허한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허균이 불교를 숭배했다는 허균을 향한 비판과 반대되는 사례이다.

재미있는 것은 임진왜란 때 격문을 보내서 승병(僧兵)을 모아 임진왜란 승전에 큰 역할을 했고, 한국 불교의 큰 스승 중 하나로 추앙받고 있는 서산대사 휴정의 문집인 『청허당집(淸虛堂集)』의 서문을 허균이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허균은 ‘불교와 자신이 전혀 맞지 않는다’고 밝힌 것은 또 하나의 반전이다. 심지어 휴정의 제자이자 승병을 이끌었던 사명당 유정의 비문도 허균이 지었다. 승려와의 개인적 친분으로 당대 선비가 문집의 서문이나 비문을 짓는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모습이 이례적인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이 허균은 유학자로서 불교에 대하여 비판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과 함께 허균이 불교를 신봉하는 듯한 모습도 보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여기에서 『청허당집(淸虛堂集)』이 처음 발간된 것이 1612년(광해군 4)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허균이 그 전부터 불교에 대해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모습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허균이 서른 두 살이던1600년에 황해도 도사에서 물러나 있었다. 이 때 허균은 임자승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여기에서 “나는 부처를 믿지 않지만, 그 문장을 좋아하고, 그로써 휴식을 다한다.”4)라고 밝혔다. 

또한 서른 네 살이던 1602년 서산대사에게 네 차례나 편지를 보내서 가르침을 청했는데, 여기에서 허균은 “남과 나, 그리고 만물이 모두 공(空)이다.”, “스님의 말을 따르겠다.”고 썼다. 같은 해 가을에 도술원 미타전의 비문에서 “나라에서 이단을 막아 불교를 높이지 않는 것은 옳긴 하지만 사람들이 복을 부처에게 비는 것은 또한 한 길이다.”라고 밝혔다. 사람들이 부처에게 복을 비는 것도 인정해야 된다는 의미이다. 

허균은 이 글 때문에 삼척부사로 재직했을 때 부처를 섬겼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고 밝혔다. 서른 여섯 살 때에는 사명당에게도 편지를 보냈는데, 선문답을 나누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수안 군수로 있을 때 자신의 거실에 불상을 모셨고, 명필인 한석봉에게 『반야심경(般若心經)』을 금글씨로 베끼게 하고 이정에게는 여러 불보살을 그리게 하고 거기에 찬(贊-누군가의 행적을 기리는 글)을 짓고 거실 벽에 걸어두었다. 그리고 1610년 유배에서 풀려나 부안으로 갔을 때 불교의 가르침에 깊이 빠졌음을 인정하면서 세상의 비난도 감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머리를 깎지 않고 가사를 입지 않았더라도 해안과 나는 같은 석가모니 무리이다”라고 밝히기에 이르렀다.5)

이러한 모습은 일반적으로 불심이 깊은 불교 신자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특히 금색 글씨로 사경(寫經)하는 것은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의례이며, 경전의 필사는 신앙심을 돋우고자 여러 종교에서 장려하는 행위이다. 또한 승려의 복장을 하고 석가모니의 무리임을 밝히는 모습은 오늘날 조계사 앞에 법복을 입고 다니는 불자들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균이 불교 신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교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의 학문에 대한 광범위한 관심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허균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제자백가를 비롯한 다양한 유학의 지식, 심지어 양명학, 불교 등 성리학에서 이단으로 평가하는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섭렵했다. 여기에 당시 사회에서 허균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이 반대로 불교에 더욱 심취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허균의 애민 정신과 실학의 시초로까지 평가받는 실용정신이 있다. 이이화는 그의 연구에서 “허균은 현실을 외면하고 산중 수도에만 전념하는 불교도들을 탐탁하게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중생구제에 앞장선 서산과 사명을 그들의 신앙의 경지와 함께 그 신앙을 실천하는 불교도의 사표로 보았다.”고 밝혔다. 그 근거로 이이화가 제시한 것은 「사명당비명」의 “사명당을 아는 이들이 더러 그가 불법의 참 구제는 제대로 못하면서 한갓 구구하게 세상이나 구한다고 병통으로 여겼다. 얕을진저.”라는 구절이었다.6)

이이화가 평가한 허균의 불교를 바라보는 자세는 성리학에 대한 자세와 비슷하다. 허균은 성리학 역시도 치세에 도움이 되고,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불교에 대한 허균의 생각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보인다. 결국 광범위한 분야에 대한 허균 특유의 호기심, 애민정신에 기반한 실용정신에서 비롯한 불교에 대한 연구는 허균을 불교신자로 규정지어도 무리가 없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허균의 도교에 대한 관심과 허균의 천주교를 조선에 처음 들여왔다는 세상의 평가로까지 이어진다.  


1)『선조실록』 211권, 선조 40년(1607) 5월 4일 병인 2번째 기사.

2)  허균, 「학론(學論)」,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제11권, 한국고전종합DB.

3)  허균, 「기달산(怾怛山)으로 돌아가는 이나옹(李懶翁)을 전송한 서(序)」,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제4권. 한국고전종합DB.

4)  허균, 「임자승에게 보냄」,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제21권. 한국고전종합DB.

5)  이이화, 『허균의 생각』, 교유서가, 2014, 210-213쪽.

6)  이이화, 『허균의 생각』, 교유서가, 2014,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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