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현 칼럼니스트
▲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오랫동안 답을 찾지 못했던 의문이 있었다. 일제와 도저히 상대가 안 되던 100년 전 상황에서 3.1운동과 임시정부 그리고 광복군의 항일투쟁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쟁취하지 못한 독립에 그 저항들은 과연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한없이 무력하여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했던 활동들을 왜 높이 사야 하는지, 그 해답의 증거들을 요즘들어 잘 보고 있다.

인간에게 생존은 가장 큰 이익이다. 둘 이상의 사람이 생존을 위해 뭉치면 본질적으론 이익공동체다. 살고자 운명을 개척한다는 점에서 운명공동체이기도 하다. 운명공동체의 절박함은 연대의식을 낳는다. 연대의식은 서로를 보호하도록 이끌어 생존을 더욱 유리하게 만들고, 거기서 얻는 안도감은 자신이 운명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을 키운다.

그러나 인원이 수십명 이상으로 불어나면 사람들 사이가 헐거워지면서 연대도 느슨해진다. 그럴 때 연대에는 이름이 필요하다. 연대의 이름을 불러 낼 수 있으면 결속의 이유를 모두에게 상기시켜서 개인이 공동체에 협력하도록 설득할 수 있다. 그 성과를 나누어 가지면서 공동체의 생존 보호 기능은 협력의 가치를 다시금 인식하게 해준다. 연대에 대한 헌신은 그로부터 비롯된다. 즉 연대의 이유를 정확히 지목해 부를 수 있는 이름은 공동체의 유지 때문에 필요하다. 그것을 가족이나 부족, 민족이나 국가, 종교나 이념 혹은 숫자 ‘1’이나 그 밖의 무엇으로 부르든 연대의식의 존재는 문명이 생겨난 이후로 줄곧 있어왔다.

연대의 이름을 불러낼 수 있을 때 운명공동체 구성원들의 최대이익인 생존과 번영이 실체를 갖는다. 이를 이끄는 게 정치다.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연대의식은 정치적으로 장려되고 보존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외부집단에 대해 자주 배타적인 생존권을 행사한다. 의식주에 필요한 것들을 다른 집단에 빼앗기지 않고 나눠 가질 뿐 아니라, 내부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모자라면 외부의 다른 집단이 누리던 이익까지 빼앗아오기도 한다.

이것이 한 장소에서 오랫동안 이어지면 연대의 소속원들에겐 두 가지가 당연하다는 듯 주어진다. 그것은 공간과 체제다. 이들은 조상들이 점유해 오던 ‘가장 오래된 공간’에서 ‘가장 우호적인 이익배분 체제’의 당연 계승자가 된다. 해당 연대에 소속된 이상 이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공간과 체제가 만들어낸 이익의 최우선 수혜자다.

이러한 정치체제가 이익을 늘리기 위해 주변을 삼켜가며 덩치를 키울수록 힘의 우열을 바탕으로 중앙과 변방이 나눠진다. 힘이 센 중앙의 운명공동체는 변방의 약한 운명공동체에게 모든 이익을 골고루 나누어 주지 않는다. 애당초 다른 집단과 이익을 공정하게 나누는 게 목적이라면 공평한 협상을 하면 되지 굳이 복속시킬 이유가 없다. 때문에 이전까지 자신들이 중앙이던 공동체가 변방이 되면 스스로를 최우선 수혜자로 보아주는 연대는 더 이상 없어진다. 이는 명백히 불평등과 불이익을 부른다. 근대의 제국주의는 처음부터 만인의 평등한 발전이라는 선의로 시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선하게 치장하더라도 일제에 의한 한일병탄은 처음부터 불평등하기에 불순한 의도일 수밖에 없다.

한 곳에서 오랜 시간 유지되던 연대가 실종되지 않도록 보존하는 것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다. 이 때문에 연대의식을 고도로 체계화한 정치체를 보존하기 위해 연대의 이름을 계속해서 불러내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외부에 의해 일시적으로 무너지더라도 공간과 체제를 다시 구현시킬 수 있다면, 그 공동체의 개인은 자신의 선조들이 과거로부터 당연 배부해 오던 권익을 지켜낼 수 있다. 자손들에게도 최우선의 권익이 승계될 수 있는 자격을 물려줄 수 있다. 이익은 지속되고 자손들은 안전해진다. 현대 이스라엘인들은 무려 수천 년 동안 유대인이라는 이름을 꼭 쥐고 있었기에 마침내 스스로를 최우선적으로 대우하는 운명공동체를 가질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현실해결능력이 모자랐던 항일투사들이 존경받아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항일정신의 요체는 한민족 또는 조선인이라 불리던 연대의 이름을 통해 공동체의 결성 동기를 보존해 연대의식을 과거로부터 잇는 것이다. 그들이 연대의식을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지는 즉시 당대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다른 집단이 침해할 수 없는 최우선의 권익을 보장받게 됐다. 항일투사들의 활동은 일제 강점기가 살기 좋았다고 말하는 이들의 후손에게조차 최대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운명공동체를 물려주었기 때문에 인정받아야 한다.

그들의 활동은 본질적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을 최우선시한 일이다. 즉 항일의 이유를 민족이나 국가의 이름으로 불렀더라도 그 안에는 ‘우리’라고 하는 운명공동체에 대한 추구가 있었던 셈이다. 대한민국은 100년 전인 1919년 3.1운동이 보여준 무형의 연대의식을 잇기로 결정함으로써, 이 공간에 오랫동안 존재해 온 연대의 보호와 이익배분 기능에 대해 가장 익숙한 신뢰를 승계했다. 이후의 한국사는 연대의식의 보존이라는 관점에서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

현대 한국사는 주변 강대국들의 위협, 남북의 체제전, 내부의 계급투쟁으로 점철돼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관통하는 것은 ‘우리는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에 대한 집중이다. 안팎의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반동의 성격으로 출발한 탓에 그 ‘우리’가 집단자체를 통칭하며 개인이 지워졌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엔 각각의 개인들이 ‘우리’를 이루고 있으며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컫는 게 우리의 본질임을 자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서구 문명사에 비하면 느리거나 빈약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겠지만, 지난 100년 동안 다양한 계기와 이유를 거르지 않고 숨 가쁘게 달려왔다는 점에서 결코 게으르지 않았다. 이는 100년 동안의 열정이 만들어낸 일종의 한국식 시민혁명이다.

우리의 현대사는 매번 하나하나의 점들이 툭 튀어나오는 장면들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그 점들이 선형으로 이어진 맥락을 갖고 있다. 그 여정의 최신판에선 불의한 정권을 시민들의 힘으로 무력충돌 없이 몰아내기도 했다. 또한 최근의 한일 갈등에선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위험을 통제했으며, 그 과정에서 중구청장 등의 지자체 주도를 배격함으로써 시민인 우리를 대신하는 다른 어떠한 주체도 끼어들지 못하도록 했다. 우리 운명공동체가 추구하는 이익은 우리 시민들의 손으로 만들어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를 계속 확인하는 중이다.

최근의 조국 법무장관과 그에 대한 검찰 수사를 둘러싼 갈등을 본다. 시민들은 조 장관과 검찰 그리고 청와대를 향해 각자의 비판적인 시각을 주장하느라 분주하다. 여기엔 검찰개혁 사안의 당사자인 검찰과 법무부가중심에 있기에 판단이 쉽지 않다. 게다가 이 갈등을 둘러싸고 언론이 보여준 행태에서 언론개혁을 외치는 주장도 상당하다. 사람들은 무엇이 대의명분이며 어떤 것이 조직 이기주의인지 판가름하려 든다. 그런데 이 다양한 목소리들은 모두 “이렇게 해야만 나라가 잘 된다”라고 외치고 있다. 즉 지금의 갈등은 우리나라라는 이름의 운명공동체가 추구하는 생존이익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식 시민혁명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전과 달리 고무적인 현상이 보이기 때문에 여전히 희망적이다.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비난받기도 하는 한국 정치현실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정권 실세인 현직 장관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아무런 제재 없이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상황은 불과 수년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시민사회 각계의 날선 주장들이 여과 없이 사방에 자유롭게 퍼지고 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다만 이 시점에서 살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닌 ‘자기’만을 위한 주장들을 솎아내는 눈을 키우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권익을 위해 싸워온 것 중 하나가 ‘우리’를 참칭해 왔던 수많은 ‘자기’들이다. 예전에도 쉽지 않았고 지금도 쉽지 않다. 아무리 소리쳐도 바뀌는 게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의 격론들이 무의미 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검찰개혁은 말로만 무성할 뿐 실체적 접근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만져볼 수 없었다. 지금은 직접 상상할 수 있게 됐다. 그러니까 시끄러운 것이다. 수많은 ‘자기’들에 대한 해결의 상상도 곧 이루어질 것이다. 게으르지 않아왔던 지난 100년 그대로, 한국식 시민혁명은 우리들에 의해 여전히 이루어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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